-이정훈 울산대 법학과 교수 -
요즘 교계에선 소위 ‘뜨는’ 동영상이 있다. 이정훈(43) 울산대 법학과 교수의 ‘동성애와 이데올로기’ 유튜브 강좌다. 2주 만에 10만명 넘게 시청하면서 강의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 그를 지난 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스피릿 떨어졌을 때 교회 쳐야”
그는 초등학교부터 ‘반야심경 해설서’를 볼 정도로 종교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1993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 2학년 때는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삶의 근원적 문제,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회의감이 들더군요. 내가 어떤 존재이고,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게 정말 알고 싶었습니다.”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법철학이라는 학문을 만났다. 이 교수는 “신자유주의와 타락한 자본주의로 고통받는 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개혁하고자 법철학을 연구하게 됐다”면서 “좌파 법철학에 빠지니 교회는 없어져야 할 ‘원수’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
서울대 법학대학원에 들어갔다. 99년엔 군종장교(군법사)로 임관했고, 포교를 위해 군법당을 건축했다. 전역 후 환속(還俗)했다. 학승(學僧)이 돼 사회를 개혁하고 싶어서였다. 교회를 깨기 위해 장 칼뱅, 칼 바르트 등의 책을 탐독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배후에는 장 칼뱅과 존 로크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핵심엔 종교개혁이 있어요. 마침 한국교회의 영성은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마음이 급했습니다. ‘스피릿’(영성)이 떨어져 있을 때 적의 심장을 쳐서 쓸어버려야 한다는 비장함이 생겼습니다.”
‘정교분리’ 공격에 교회 자중지란
그는 종교자유정책연구원(종자연)을 기획·설계했으며, 2005년 출범 때 산파 역할을 했다. 종자연은 ‘종교의 자유도 인권’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민사소송과 입법청원, 헌법소원심판청구, 진정, 신고 등으로 한국교회를 종교편향 집단으로 내몰았다. 고려은단의 ‘Jesus loves you’ 광고판 제거, 공립학교 내 종교활동 금지, 공무원의 종교적 중립 강화, 교회 내 투표소 설치 반대 등을 관철시켰다. 학내 종교자유를 쟁취하겠다며 대광고 사건을 이슈화했다.
“정교분리 원칙을 살짝 왜곡해 공격했더니 교회 안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났습니다. 반격은커녕 무기력하게 스스로 분열하고 숨어버리더군요.”
종자연은 여세를 몰아 국가공무원법과 지방공무원법에서 종교중립 의무조항을 요구했다. 이 교수는 “당시 공적 영역에서 선교하는 기독교인을 아예 쓸어버리기 위해 처벌조항까지 넣으려 했다”면서 “불행 중 다행으로 권고에 그쳤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2007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기독교 공격 ‘포인트’를 잡으려고 교계 방송을 시청하던 중이었다. 한기채 서울 중앙성결교회 목사의 설교가 방송에 나왔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아이고, 쇼하네. 너나 잘하세요.’ 조롱하려던 순간 혀가 굳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강력한 전류가 흘러내렸다.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 자리에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희한하게도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신학 서적에서 봤던 ‘전적 부패’가 뭔지 몸의 구석구석, 세포까지 느껴졌습니다. 의롭다고 자만했던 저의 죄성이 낱낱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자리에 내가 앉아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죄인을 살리신 창조주, 구세주가 확실히 믿어진 것입니다.”
기독교를 모질게 핍박했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났듯(행 9:1∼18) 그의 삶은 극적으로 변화됐다. 십자가만 봐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2008년 서울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울산으로 내려가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현재 사상적 기반이 취약한 한국교회에 종교자유 보호를 위한 법철학을 ‘수혈’하고 있다.
종교자유 위한 법철학 기반 제시
이 교수는 한국교회를 혐오하는 현상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추론하지 않으면 답을 얻을 수 없다”면서 “그런데 이슬람 미화, 동성애 옹호 세력은 서로 연대해 인간을 가치 없는 존재로 격하시키고 교회를 마치 사회변혁의 걸림돌, 적폐세력인 양 공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의 마지막 부탁은 순교신앙의 재무장이었다. 그는 “지금은 한 발짝도 물러서면 안 될 때다. 위기는 기회”라고 말했다. 이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놓치면 영국처럼 영적으로 황폐화되는 수준을 넘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붕괴마저 우려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며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부활 파워로 반전(反轉)을 일으킬 때”라고 강조했다.
글·사진=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스피릿 떨어졌을 때 교회 쳐야”
그는 초등학교부터 ‘반야심경 해설서’를 볼 정도로 종교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1993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 2학년 때는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삶의 근원적 문제,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회의감이 들더군요. 내가 어떤 존재이고,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게 정말 알고 싶었습니다.”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법철학이라는 학문을 만났다. 이 교수는 “신자유주의와 타락한 자본주의로 고통받는 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개혁하고자 법철학을 연구하게 됐다”면서 “좌파 법철학에 빠지니 교회는 없어져야 할 ‘원수’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
서울대 법학대학원에 들어갔다. 99년엔 군종장교(군법사)로 임관했고, 포교를 위해 군법당을 건축했다. 전역 후 환속(還俗)했다. 학승(學僧)이 돼 사회를 개혁하고 싶어서였다. 교회를 깨기 위해 장 칼뱅, 칼 바르트 등의 책을 탐독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배후에는 장 칼뱅과 존 로크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핵심엔 종교개혁이 있어요. 마침 한국교회의 영성은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마음이 급했습니다. ‘스피릿’(영성)이 떨어져 있을 때 적의 심장을 쳐서 쓸어버려야 한다는 비장함이 생겼습니다.”
‘정교분리’ 공격에 교회 자중지란
그는 종교자유정책연구원(종자연)을 기획·설계했으며, 2005년 출범 때 산파 역할을 했다. 종자연은 ‘종교의 자유도 인권’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민사소송과 입법청원, 헌법소원심판청구, 진정, 신고 등으로 한국교회를 종교편향 집단으로 내몰았다. 고려은단의 ‘Jesus loves you’ 광고판 제거, 공립학교 내 종교활동 금지, 공무원의 종교적 중립 강화, 교회 내 투표소 설치 반대 등을 관철시켰다. 학내 종교자유를 쟁취하겠다며 대광고 사건을 이슈화했다.
“정교분리 원칙을 살짝 왜곡해 공격했더니 교회 안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났습니다. 반격은커녕 무기력하게 스스로 분열하고 숨어버리더군요.”
종자연은 여세를 몰아 국가공무원법과 지방공무원법에서 종교중립 의무조항을 요구했다. 이 교수는 “당시 공적 영역에서 선교하는 기독교인을 아예 쓸어버리기 위해 처벌조항까지 넣으려 했다”면서 “불행 중 다행으로 권고에 그쳤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2007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기독교 공격 ‘포인트’를 잡으려고 교계 방송을 시청하던 중이었다. 한기채 서울 중앙성결교회 목사의 설교가 방송에 나왔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아이고, 쇼하네. 너나 잘하세요.’ 조롱하려던 순간 혀가 굳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강력한 전류가 흘러내렸다.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 자리에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희한하게도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신학 서적에서 봤던 ‘전적 부패’가 뭔지 몸의 구석구석, 세포까지 느껴졌습니다. 의롭다고 자만했던 저의 죄성이 낱낱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자리에 내가 앉아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죄인을 살리신 창조주, 구세주가 확실히 믿어진 것입니다.”
기독교를 모질게 핍박했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났듯(행 9:1∼18) 그의 삶은 극적으로 변화됐다. 십자가만 봐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2008년 서울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울산으로 내려가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현재 사상적 기반이 취약한 한국교회에 종교자유 보호를 위한 법철학을 ‘수혈’하고 있다.
종교자유 위한 법철학 기반 제시
이 교수는 한국교회를 혐오하는 현상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추론하지 않으면 답을 얻을 수 없다”면서 “그런데 이슬람 미화, 동성애 옹호 세력은 서로 연대해 인간을 가치 없는 존재로 격하시키고 교회를 마치 사회변혁의 걸림돌, 적폐세력인 양 공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의 마지막 부탁은 순교신앙의 재무장이었다. 그는 “지금은 한 발짝도 물러서면 안 될 때다. 위기는 기회”라고 말했다. 이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놓치면 영국처럼 영적으로 황폐화되는 수준을 넘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붕괴마저 우려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며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부활 파워로 반전(反轉)을 일으킬 때”라고 강조했다.
글·사진=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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