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동안 세브란스재활병원에서 사역해 온 김복남 전도사는 그동안 수많은 환자를 만나면서 ‘감사’를 배웠다고 했다.
김복남 전도사는 ‘사랑의 복음전도자’다. 그는 27년 동안 세브란스재활병원 전도사로 환자들의 영적 건강을 보살폈다. 절망을 희망으로,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다. 지난 2월, 65세로 세브란스재활병원 전도사에서 은퇴한 그는 여전히 퇴원한 환자를 심방하거나 상담사역을 하며 변함없이 복음전도자로 살고 있다.
최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만난 김 전도사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발견한 인생의 키워드는 ‘감사’였다고 했다. “사람들은 저더러 고생이 많았다고 했지만 환자들을 위로하다 제가 더 많은 위로를 받았고, 만족을 모르고 살던 내가 감사를 배웠지요.”
김 전도사는 세브란스재활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중도 장애인이 된 사람을 많이 만났다. 감전 사고로 두 팔을 잃고 의수를 한 환자의 고백을 잊을 수 없다. “저는 아내가 밥을 떠먹여 줘야 먹을 수 있고, 화장실에 가서도 바지를 내리고 뒤처리까지 다 해줘야 해요. 그런데 저는 그런 아내를 안아줄 수 없는 몸이 됐어요. 두 팔이 있었을 때 자주 안아주지 못한 게 많이 후회돼요.”
“온전한 다리로 걸어 다닐 수 있고, 자신의 손으로 밥을 먹을 수 있고, 배우자가 ‘여보’라고 부르고, 자녀들이 ‘엄마’ 또는 ‘아빠’라고 불렀을 때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고 있는지요. 자신에게 건강한 팔이 있다면 열심히 일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껏 안아주길 바랍니다.”
김 전도사는 이들이 바라는 기적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라고 했다. 자신 역시 소중한 것을 잃은 뒤 후회했던 사람이었다고 고백했다. 지난 세월 그가 병원 사역과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1989년 소천한 남편 때문이었다.
당시 남편은 예배와 전도에 열심이었다. 농협대학 교수였던 남편이 어느 날, 일본 선교사로 헌신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극구 만류했다. 그러던 중 남편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직장암이었다. 3년 동안 3번의 수술, 40회의 방사선 치료를 하며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남편은 말기 암 판정을 받고도 영혼구원에 대한 간절한 열망으로 수많은 사람을 전도했다.
“남편은 죽기 전에 한 영혼이라도 전도해야 한다면서 통증으로 한숨도 못 잔 몸을 이끌고 이 병원 저 병원, 이 집 저 집, 이 가게 저 가게를 다니며 전도했어요. 88년 5월 29일 서울 은광교회 새 신자 초청 주일에 46명을 전도해 왔어요. 그때 교회에서 받은 전도 상패는 우리 집 가보입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10살이던 딸이 “이제 엄마가 아빠처럼 병든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약속해줘”라며 그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의 삶을 결심했다.
그는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임상목회 상담과정을 수료하고 세브란스재활병원에서 전도사로 근무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학위와 목사 안수, 세상의 직함을 포기했다. 연차와 명절 휴가는 물론, 심지어 남들이 퇴근할 때 교회로 출근했고 쉬는 날과 개인생활도 포기했다. 몸은 고달팠지만 복음 전하는 걸 사명으로 여기며 기쁨으로 순종했다. 2010년 김 전도사는 뇌종양으로 2번의 수술을 받은 후에도 복음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국내외에서 3700여회 간증집회를 했고, 이 가운데 해외집회는 100회가 넘는다. 집회를 다니며 받은 사례비와 후원금을 병원에 기부해 많은 절단 장애 환자들에게 다리(의족)를 만들어 주었다. 휠체어농구단을 창단해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세브란스병원 건축기부금으로 5000만원을 후원했다.
그동안 홀로 두 자녀를 키우면서 막막했던 순간이 많았지만 되돌아보면 감사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아들은 일본 선교사로 나가길 원했던 아버지 뜻을 이어 일본 홋카이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삿포로 국제교회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딸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복음 전도는 현재 진행 중이다.
글·사진=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최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만난 김 전도사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발견한 인생의 키워드는 ‘감사’였다고 했다. “사람들은 저더러 고생이 많았다고 했지만 환자들을 위로하다 제가 더 많은 위로를 받았고, 만족을 모르고 살던 내가 감사를 배웠지요.”
김 전도사는 세브란스재활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중도 장애인이 된 사람을 많이 만났다. 감전 사고로 두 팔을 잃고 의수를 한 환자의 고백을 잊을 수 없다. “저는 아내가 밥을 떠먹여 줘야 먹을 수 있고, 화장실에 가서도 바지를 내리고 뒤처리까지 다 해줘야 해요. 그런데 저는 그런 아내를 안아줄 수 없는 몸이 됐어요. 두 팔이 있었을 때 자주 안아주지 못한 게 많이 후회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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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다리로 걸어 다닐 수 있고, 자신의 손으로 밥을 먹을 수 있고, 배우자가 ‘여보’라고 부르고, 자녀들이 ‘엄마’ 또는 ‘아빠’라고 불렀을 때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고 있는지요. 자신에게 건강한 팔이 있다면 열심히 일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껏 안아주길 바랍니다.”
김 전도사는 이들이 바라는 기적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라고 했다. 자신 역시 소중한 것을 잃은 뒤 후회했던 사람이었다고 고백했다. 지난 세월 그가 병원 사역과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1989년 소천한 남편 때문이었다.
당시 남편은 예배와 전도에 열심이었다. 농협대학 교수였던 남편이 어느 날, 일본 선교사로 헌신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극구 만류했다. 그러던 중 남편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직장암이었다. 3년 동안 3번의 수술, 40회의 방사선 치료를 하며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남편은 말기 암 판정을 받고도 영혼구원에 대한 간절한 열망으로 수많은 사람을 전도했다.
“남편은 죽기 전에 한 영혼이라도 전도해야 한다면서 통증으로 한숨도 못 잔 몸을 이끌고 이 병원 저 병원, 이 집 저 집, 이 가게 저 가게를 다니며 전도했어요. 88년 5월 29일 서울 은광교회 새 신자 초청 주일에 46명을 전도해 왔어요. 그때 교회에서 받은 전도 상패는 우리 집 가보입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10살이던 딸이 “이제 엄마가 아빠처럼 병든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약속해줘”라며 그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의 삶을 결심했다.
그는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임상목회 상담과정을 수료하고 세브란스재활병원에서 전도사로 근무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학위와 목사 안수, 세상의 직함을 포기했다. 연차와 명절 휴가는 물론, 심지어 남들이 퇴근할 때 교회로 출근했고 쉬는 날과 개인생활도 포기했다. 몸은 고달팠지만 복음 전하는 걸 사명으로 여기며 기쁨으로 순종했다. 2010년 김 전도사는 뇌종양으로 2번의 수술을 받은 후에도 복음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국내외에서 3700여회 간증집회를 했고, 이 가운데 해외집회는 100회가 넘는다. 집회를 다니며 받은 사례비와 후원금을 병원에 기부해 많은 절단 장애 환자들에게 다리(의족)를 만들어 주었다. 휠체어농구단을 창단해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세브란스병원 건축기부금으로 5000만원을 후원했다.
그동안 홀로 두 자녀를 키우면서 막막했던 순간이 많았지만 되돌아보면 감사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아들은 일본 선교사로 나가길 원했던 아버지 뜻을 이어 일본 홋카이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삿포로 국제교회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딸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복음 전도는 현재 진행 중이다.
글·사진=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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