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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땅의 시간 하늘의 시간」- 조정민 -

배남준 2017. 9. 27. 10:49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 자전과 공전에 갇힌 시간이 아니라 영원의 시간입니다.

영원이란 시간 밖의 시간입니다. 어쩌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어쩌면 시간 자체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뜻합니다. ‘영원’은 오랫동안 끝없이 살아가는 무한한 시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영원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혜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더 이상 어리석게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더 이상 어리석게 살지 않도록 세심하게 모든 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지혜 없는 사람, 예수님 모르는 사람, 예수님 안 믿는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 있는 사람, 예수님 아는 사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세상의 실상을 직시하고 어떻게 행할지를 결정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시간이 가지는 목적은 자명해집니다. 인간이 시간을 선물로 받은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목적과 의미를 안다면 좀 더 잘 먹고 잘 사는게 인생의 목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됩니다. 시간의 마지막 목적을 알지 못하면 허무한 삶을 살게 됩니다.

 

 


*문제는 인간의 탐욕이 이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코드를 우리 안에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영원을 심어두신 걸 기억하는 것, 영원을 발견하는 게 구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에 눈뜨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아름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 안에서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신앙은 내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발견입니다. 신앙은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각성입니다. 하나님을 거처로 삼는 인생이 뭐가 두렵겠습니까? 다윗, 요나단, 모세, 다니엘 등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밀을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9,10)”


*시간 앞에서 우리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흙이고 티끌임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교만이고,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호흡이 멈추면 흙과 티끌로 돌아간다는 자각 앞에서 우리는 교만할 수 없습니다. 돈이나 권력 앞에 있을 때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망각합니다. 인기 앞에 있으면 자신을 아예 잃어버립니다. 인간은 시간 앞에 있을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자각합니다.

 

그래서 시간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만듭니다. 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모름지기 나라는 존재는 영원에 비하면 한순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겸손의 시작입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은 뿐 임이니이다.(시 90:4)”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삶의 태도가 안식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을 기억하고 행하면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일이 되고,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행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됩니다.


*어떤 것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훈련, 먹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기억하는 훈련,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하루하루 거두어 먹는 훈련을 통해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어져 가는 거지요. 핵심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단 하나의 목적입니다. ‘너희들은 바로의 백성, 세상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먹이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기에 자유인으로 마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의 시간입니다. 안식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눈물에 약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물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으십니다. 간구와 탄원의 눈물은 병에 담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라에게 쫓겨난 하갈이 광야에서 통곡하며 기도하자 물을 주시고 이스마엘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녀가 없어 브닌나에게 멸시당하고 눈물로 통곡하는 한나에게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사시대에 눈물로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했을 때 놀라운 응답을 받았습니다.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겁니다. 인간의 목적을 위해 얼마든지 신과 협상할 수 있다는 게 종교적 속성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뿌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우리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야망에 불탓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위해 줄달음쳤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뒤 새로운 시간에 눈을 뜨면서 발견한 것이 ‘영광’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그는 영원의 시간에 접속되었고, 그 하나님의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구원은 미래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사건입니다. 미래에서 현재가 해석되기 시작했고 미래에서 과거가 해석되는 사건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시간에 붙들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눈 떳을 때 그의 인생 전체가 새롭게 해석되고 놀랍게도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하고 하나님을 위해 내가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의 시작이자 믿음의 시작입니다. 나아가 내가 내 것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겸손의 성장입니다. 죽을힘을 다한 뒤에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자각하는 것이 겸손의 성숙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영적 교만의 뿌리입니다. 복음 안에 스며든 이단이며 가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끝까지 쓰임 받는 단 한 가지 조건은 겸손입니다.


*구원의 본질은 시간의 구원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다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시간 너머 영원한 시간으로 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으로 가는 것이며, 죄의 삯인 죽음으로부터 검진 받는 것입니다. 다라서 구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사건이고, 땅의 시간에서 하늘의 시간으로 옮겨지는 사건입니다.


*믿음 사건이란 사망의 시간에서 생명의 시간으로 옮겨지는 사건입니다. 내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르는 패러다임 쉬프트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온전히 바꾸는 작업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일이 배후에서 진행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밖에 다가갈 수 없고, 믿음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때에 민감해야 합니다. 내 시간표를 내려놓고 예수님의 시간표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게으르거나 조급할 뿐입니다. 우리는 데게 하나님의 시간이 느리다고 느낍니다. 우리 삶의 패턴이 점점 조급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시간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능력 가운데 머무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두는 장소에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시간을 결정하고 우리에게 장소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인간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시제이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입니다. 그래서 영원이란 개념은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시간의 억압과 속박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인생은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가장 먼저 시간을 사용하는 그것이 인생을 결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시간의 혁명입니다. 신앙은 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불과한 것에 내 시간을 쓰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구원은 더 이상 나를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결정을 수반합니다.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녀의 이 결단을 존중하시며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시간의 혁명을 의롭다 인정하십니다.

 


*바울이 예전에는 하나님을 추구했지만 형제를 사랑했습니까? 그는 율법을 달달 외웠지만 서로 우애했나요? 그는 가장 존경받는 랍비가 되기를 갈망했지만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존경했나요? 아닙니다. 그러던 그가 변화된 후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시간의 우선순위입니다.


 

*십자가는 시간의 역설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영광이 절정일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영광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십자가는 내 머리에 영광의 관이 씌어졌을 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면류관을 하나님 발아래 벗어 놓을 때라고 가르칩니다. 십자가는 내가 이제 마음껏 고개를 들고 활개 쳐야 할 때가 바로 한 알의 밀처럼 땅에 떨어져 썩어야 할 때라고 가르칩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의지나 결심으로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은혜로만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고 질 수 있습니다.


 

*“여호와로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소원이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모든 소원을 이루는 시작입니다. 하지만 내 소원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뻐해야 내게 가장 소중한 소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것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뻐해야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전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소원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면 정말 소원해야 할 것을 소원하게 되고, 이미 그 소원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출처 : 꽃비 내리던 날
글쓴이 : 좋은열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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