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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소리]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

배남준 2017. 9. 27. 10:25


[시온의 소리]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 기사의 사진
국토의 반 이상이 알프스산맥으로 이뤄져 식량 생산을 위한 평야가 부족했던 스위스는 중세기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이웃 나라의 전쟁을 대행하는 용병제도에 의존하고 있었다. 1515년 이탈리아 마리냐노(Marignano) 전투에 군종 사제로 참가했던 츠빙글리는 스위스 연방 젊은이들이 돈 때문에 서로 적군이 되어 죽이고 죽는 현장을 목격했다. 츠빙글리는 용병제의 모순을 철저히 깨달았고, 이는 그가 종교개혁을 이끌어가는 계기가 됐다. 그는 용병제 모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용병제로 직간접 이익을 취하는 집단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또 직접적인 희생 당사자인 청년들에게 용병제의 문제점을 알리고, 땀 흘리는 대안적 노동의 가치에 대해 역설했다. 

츠빙글리가 본격적으로 비판 강도를 높이게 된 계기는 육류 섭취를 철저히 금했던 사순절 첫 주일인 1522년 3월 9일 저녁, 그의 개혁 사상에 동참했던 인쇄업자이자 출판업자인 크리스토퍼 프로샤우어(Christopher Froschauer·1490∼1564)가 몇몇 동료를 초청해 소시지를 먹은 사건이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보다 교회의 전통과 예전에 더 큰 비중을 두었고 사순절 금식 규정을 어긴 것을 교회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으로 정죄했다. 

츠빙글리는 이 자리에 있었지만 소시지를 입에 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사람이 음식을 못 먹게 할 권한을 교회가 가질 수 없다고 맞섰다. 교회가 상황 윤리를 고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획일적인 율법 규정으로 통제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츠빙글리는 젊은이를 전장으로 몰아세워 이득을 보는 교회 지도층 인사들의 죄가 육체노동에 시달려 단백질이 필요한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금식 규정을 어긴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죄악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 소시지 사건을 발단으로 취리히에서는 종교개혁 논의가 본격화됐고, 츠빙글리는 취리히 시의회와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종교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츠빙글리는 기독교적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입장을 피력하고 종교개혁적인 정신에 입각해 복음을 해석하는 역할 모델이 되어 주었다. 

츠빙글리는 1522년 3월 23일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심이 된 그로스뮌스터 교회 강단에서 금식 규정을 어긴 이들을 옹호하며 금식규례 문제에 대해 설교했다. 츠빙글리는 이 설교를 수정 보완해 그해 부활절 직후인 4월 16일, ‘자유로운 음식 선택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글은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게 한 공식적인 문헌이 됐다. 츠빙글리는 그의 동지들을 주교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종교개혁의 주제들을 소개하며 공개적인 방식으로 발표하고자 했다. 또 빈곤문제를 포함, 사회제도 개혁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1523년 기독교적 사회윤리를 위한 신학적 성찰이 담긴 글을 발표했다. 그중 하나가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라는 글이다. 이 글에서 츠빙글리는 인간을 자유하게 해방시키는 메시지인 복음이 인간의 의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규정과 전승보다 앞서야 한다는 내용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기쁨이 빠진 계율 준수와 기계적으로 전통적인 예전을 따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 자체로 지고선이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지만, 인간의 불완전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요청을 따르지 못하게 한다. 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있었고 이것이 복음이다. 인간 사이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정의가 필요하지만, 우리의 정의는 결코 하나님의 정의에 이르지 못한다. 인간의 정의는 하나님 말씀의 빛에 의하여 끊임없이 새롭게 정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불러오는 예기치 못한 또 다른 불의한 문제성은 짚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의로움은 언제나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때문에 내가 하는 행동만이 절대적 의라고 주장할 수 없다. 정의 실현을 위한 우리의 시각과 행동의 불완전성, 이중 잣대적인 판단을 항상 경계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자신의 정의만을 절대화할 때,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자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불의를 반복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상대적인 모든 것을 절대화하는 것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다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의 빛에 비추어 인간의 정의를 실현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단 9:18)” 이뤄가야 할 일이다.

정미현(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출처]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