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영업과장으로 승진하고 1년 뒤 임마누엘집은 이사를 했다. 도봉산 자락에서 벗어나 서울 송파구 거여동의 한 무허가 건물에 월세로 입주했다. 비만 와도 빗물이 뚝뚝 떨어져 잠 못 이루던 도봉산 천막집을 생각하면 거여동 집은 호텔방처럼 아늑했다. 임마누엘집 가족도 늘어났다. 빨래와 식사준비를 할 사람이 없어 어려움이 더해갔다. 당시 내 나이 29세. 결혼할 때도 됐고 임마누엘집을 함께 이끌어갈 동반자도 필요했다. 나는 그때부터 배필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는 사이 ‘신앙계’ 잡지에서 내 성공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나는 결혼이 급하니 간증문도 게재해 달라고 요청했다. 내 사연이 소개되자 자매들의 편지가 쇄도했다. 호기심과 동정심, 격려가 담긴 내용이 많았다.
나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매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30번 넘게 맞선을 봤다. 일생을 함께 할 반려자이기에 신중해야 했다. 그 중 19번째 자매가 마음에 다가왔다. 나이는 좀 어렸지만 겸손했고 세상 때가 전혀 묻지 않았다.
“자매님, 저와 믿음의 식구들을 위해 사랑하며 헌신할 수 있습니까.” “네, 사람이 한번 태어나 보람 있게 살다 가야할 것 같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더욱 그래야겠지요.”
나는 그래도 반신반의했다. 자매의 가정은 부유한 집안으로 좋은 직장까지 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 해도 그 헌신의 결심을 믿을 수 없었다. 자매의 집안에서 알면 반대가 심할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모았고 결혼 날짜를 잡았다.
장인 장모에게 청첩장을 보냈다. 예상대로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장인은 “당장 가자”며 자매를 데려가 버렸다. 마음이 찢어지는 듯 했다. 그런데 이튿날 자매가 임마누엘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놀라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자매 집안은 서울 쌍문동에 큰 집을 갖고 있었고 경남 진주에 전답과 과수원을 가진 유지였다. 온 가족이 동원돼 자매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우리는 1984년 10월 1일 송정중앙교회에서 박호훈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엔 막내 처제만 유일하게 참석했다. 당시 막내처제는 결혼 비용 80만원을 빌려주기도 했다. 처제는 서울에서 언니와 함께 살았는데 6개월간 나와 언니의 만남을 지켜봤다. 그래서 우리의 진심을 알아줬다. 막내처제는 장인 장모에게도 “형부는 몸만 불편할 뿐이다. 좋은 사람”이라며 변호했다.
나는 당시 결혼을 반대하는 장모에게 사위 셋 중 제일 효도하는 사위가 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지랄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중에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장모님 팔순 잔치를 해드렸다. 사위 셋은 모두 임마누엘집 소속 사회복지재단에서 일했고 큰 동서는 지난해 퇴직했다.
장인 장모가 결혼을 인정한 것은 결혼으로부터 4년이 지나서였다. 88년 KBS 방송 ‘코뿔소 만세’라는 인간 드라마에 내가 출연하면서다. 방송이 나간 후 장인어른은 새벽 3시에 전화를 하셨다. 첫마디가 “김 서방, 이제는 허락하겠네”였다. 나는 처음엔 누군지도 모르고 “누구십니까” 했더니 “누구긴 누구야 연순이 애비야” 하셨다.
장모님은 양복을 해 입으라며 20만원을 주셨다. 그 돈으로 양복을 구입해 아직도 입고 다닌다. 예수 안에 있으면 축복과 부요함이 넘친다. 장애의 몸을 갖고 있어도 절대 좌절하지 말라.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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