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오래된 질문입니다. 같은 물음을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래와 하갈의 갈등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은혜와 율법의 관계로 해석하도록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행위가 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너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질문을 듣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확한 지침을 내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하나님이 아닌 자기 스스로와 세상이 하도록 내버려 둬선 안 됩니다. 세상도 모르는 질문을 하고 본인도 모르는 답을 하면 혼란 가운데 귀한 시간을 낭비할 뿐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하는 물음은 모호한 질문이 아닙니다. 물음에 답이 있습니다. 질문 자체에 이미 하갈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하갈’이라고 하지 않고 ‘사래의 여종 하갈’이라고 그의 출발지를 명확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갈이 이 말을 듣고 얼마나 섬뜩했을까요. 자신은 자유롭고 싶어서 ‘하갈’이라는 그 이름의 뜻대로 도망하고 있는데 사래의 여종이라니요.
‘은혜와 율법’이란 관점으로 본다면 여호와의 사자가 하는 질문은 ‘인간의 행위로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너희들아. 너희들이 비롯된 곳이 어디인 줄 아니? 바로 은혜야’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 가지 신앙의 행위로 하나님께 상급을 쌓고 있다고 생각하는 뭇 인생들에게 “너희의 출발지와 종착지를 알고 있니? 너희의 출발점이 행위 율법이라면 구원을 목적으로 한 그 여행은 끝마칠 수 없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갈은 한 가지, 온 곳만 대답합니다. 이는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인생은 자신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런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말합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매몰차게 들리지만 하갈이 이 말을 듣고 사라에게 돌아갔을 때, 그는 방황을 멈췄습니다. 우리 삶의 방황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손길이 은혜라는 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멈춥니다.
우리는 은혜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은혜로 다시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흙을 빚는 일을 겸하고 있기에 제 주변엔 많은 흙이 있습니다. 어떤 흙은 6년째 그릇으로 태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제 손에 들려져서 반죽되고 세상에 태어나기를 원할까요. 흙의 입장에서 본다면 토기장이의 손길 위에 들려진 것만 해도 이미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 삶을 살아가든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생은 이미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인생일진대 우리는 함부로 삶을 삽니다. 그런 삶을 뒤로 하고 나를 넘어 참된 ‘나’를 있게 하신 분이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하늘을 볼 수 있다면 그것도 은혜입니다. 그 창조주의 손 위에 들려진 것을 알게 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는 이제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출발지와 목적지를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신상엽 목사(서울 토기장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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