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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다시 회자되는 장기려박사와 아내의 편지

배남준 2018. 11. 17. 05:31



북녘의 아내에게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듯 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리가 없건만 혹시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두움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 40 년이 흘러 여든이 된 지금 “여보”라는 호칭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당시는 쓰지않던 “택용이 어머니”라고 부른다는것도 이상하고…  어쨌든 여보, 어느덧 40 년이 흘렀소. 6.25 참화로 생이별한 이가 어찌 나뿐이오만 해마다 6월이 되면 뭉클 가슴깊은 곳에서 치미는 이산의 설움을 감당못하고 기도로 눈물을 삭이곤합니다.  택용, 신용, 성용, 인용, 진용, 북에 두고온 다섯애들이 모두 살아있다는 얘기는 어찌어찌 흘러전해진 소식으로 들었소.

   50년 12월 3일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을 떠날때 둘째 가용이만 데리고 월남한 것이 지금 내 가슴속의 못이 되었다오.  그것이 벌써 40년전. 당신과 내가 나이 여든이 되도록 북과 남에 헤어져 애틋한 그리움만 간직한채 살게되는 시작이었음을 어찌 알았겠소.

   의사란 직분때문에 국군야전병원 엠블런스를 얻어타고 평양을 빠져나올때 거리의 아수라장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날 아침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이용못해 임시부교를 건너서나마 좀더 남쪽에 가있겠다고 당신과 다섯아이가 신양리 집을 나선뒤 나는 교회에 가 맹렬히 기도를 했더랬소. 오후 4시경 국군 야전병원일을 해준 관계로 친해진 안소령이 앰블런스를 대고 타라했을때 나는 한두어달후면 다시 평양으로 돌아올 것이란 생각으로 차에 올랐답니다. 그때 신양리집에는 부모님들도 계셨지만 “중공군이 내려오면 젊은이들은 모두 죽인다니 너만 타고 떠나거라 우리는 집을 지키겠다”고 말씀하셔 부모님도 남겨둔째였지요. 그일도 한으로 남았습니다.

   피난민들로 북적이는 평양종로 거리를 엠블런스가 달릴때 가용이가 하염없이 창밖을 보다 문득 “아버지, 저기 신용이…”하고 외친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차를 세워달라는 말을 끝내 하지못했소.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환자 차에 얻어타기도 했으려니와 차를 세운다면 피난민들이 몰려와 너도나도 태워달라고 간청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날부터 며칠간 당신과 아이들은 걸어서 남하하다가 중공군이 앞질러가는 바람에 울며 평양으로 되돌아갔다는 얘기를 나중에 목격자들한테 들었습니다. 다 내 불찰입니다. 그날 아침 당신과 얘들을 먼저 대동강변에 보내지않았다면… 또 종로거리에서 차를 세우기만 했었다면…

   당신도 기억하지요 50년 9월 16일 그 엄청난 평양공습. 그때의 폭탄은 물체에 부딧치면 곧 터져 수천수만의 파편을 좌우로 흘뿌려 평양거리와 시민을 초토화시킨 무서운 것이었지요. 그때 나는 평양의대병원 2층 수술실에 있었는데  3층지붕에 폭탄이 떨어져 불지옥이 되고 그런 와중에도 수술은 계속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밤새 파편에 맞은 환자들이 쏟아져들어오고 나는 일곱 수술실을 번갈아돌며 모두 49명의 환자를 수술해주고… 그러다 새벽녘 병원앞뜰을 내려다보니 미처 병원에 못들어온 부상자 수백명이 누워 신음하고 있는게 아니겠소. 그때의 울분. 누가 이 사람들을 다치고 죽게 했소. 사상도 이념도 모르고 한 생을 살아왔을 이 민족에게 폭탄을 퍼부은자가 누구란 말이오. 전쟁의 책임을 또 역사의 심판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것입니까.

   45년 쏘련군이 진주하고도 5년간을 당신과 나 우리가족은 평양에 살았지요. 공산주의자들이 나의 신앙을 박해하고 어떻게든 유물사관을 심어주겠다고 별렀지만 실패한것을 당신도 똑똑히 기억하겠지요. 당시 내가 김일성대학 의대교수로 있었고 또 김일성 맹장수술도 해주었다는 허황된 소문도 나돌았지만 나는 절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었소. 김일성대학 부총장 박일 부속병원장  최필석등이 “1년 후면 장선생을 꼭 공산주의자로 만들어드리리다”고 장담했지만 그 결과는 무었이었습니까. 수술에 앞서 기도하고 주일이면 교회에 가는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지 못했지요. 오히려 그들이 무자비한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지 않했던가요.

   50년 6월 25일의 민족전쟁은 김일성이 쏘련 진주 군사령관 스티코프의 시사에 의해 도발한 것입니다. 자본주의 국가와는 공존할 수 없고 어떻게든 타도 괴멸해 공산사회를 세워야한다는 김일성의 신조가 민족의 피를 부른 것입니다. 노동신문은 “남조선 군대가 북침하므로 남에 대한 반격이 불가피하게 시행되었으며 성공적으로 진행중”이라고 보도했으나 그날 나는 박헌영이 방송을 통해 “남조선 군대가 먼저 쳐들어왔다”고 말하며 심하게 더듬는 것을 듣고 공산주의자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작용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한 기억이 납니다.

   여보, 평화통일에의 꿈은 40년전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지금이나 북과 남의 우리 민족 모두의 염원일 것이요. 특히 북녘에 처자 부모를 두고와 불효자 불민한 남편 그리고 제도리를 못한 아버지로 스스로를 자책하는 나에게는 민족사랑에 의한  평화통일을 보는 것만이 여생의 마지막 소망이기도 하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분단되었던 나라들이 속속 통일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이 그렇고 예멘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지도자와 민족의 슬기로 피흘리지 않고 통일을 쟁취했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력에 의한 통일은 반대합니다. 당신과 가족이 보고 싶다고 다시 수천수만의 피를 흘리는 대가로 우리가 재회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배트남은 전쟁을 통해 통일을 얻었지만 남은 것은 가난과  폐허뿐이 아닙니까.

   여보, 나는 정치는 모르오. 또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나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하기위해 헤게모니를 잡기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정치가, 자기욕심에만 빠지고 공평을 실현하지 못한 정치가들 때문에 동족상잔과 가족이산의 비극이 빚어진 것을 철저히 느낍니다. 평화통일은 민족성원 모두가 공생애를 산다고 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요즈음의 국제정세가 화평의 분위기를 타고 한반도에도 긴장완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하지만 사랑과 평화 믿음이 없이는 진정한 평화통일은 힘들 것입니다.

   택용 어머니, 나는 요즈음도 이따금 당신과 아이들의 꿈을 꿉니다. 50년 월남후 부산에 내려와 세운 무료병원 복음병원앞에 당신과 내가 서있는데 갑자기 파도가 밀려와 당신을 삼켜가는 꿈도 꾸었습니다. 놀라 일어나보면 텅 빈 방에 혼자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고…당신에 대한 나의 깊은 사랑을 다시 느낍니다. 당신이 나에게 가르쳐준 노래를 나직이 불러봅니다.

   단풍잎은 떨어져서 뜰앞을 쓸고나간다
   누른 국화향내는 바람을 떠나 살더니
   처량한 가을이여…
   붉은물 풀어놓은것 같이
   찬란하다 낙조.
   
   내가 지금 인생의 낙조에 들어섰으니 이제와서 부르라고 당신이 가르쳐준 것이었을까요.

   40년을 남한에 살며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이 들었다오. 그러나 당신에게 한 나 스스로의 언약.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 만일 우리 둘 중 누가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사랑은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육으로 있을 때 뿐아니라 떠나있을 때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사랑이다”고 한 말을 상기하며 당신를 기다렸소.

   여보. 몇년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명씩 남과 북을 방문하여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난들 왜 가보고 싶지 않았겠소. 당신과 자식들을 만나고 지금은 돌아가셨을 부모님 산소도 들러보고 용천 입암리 고향집과 평양 신양리의 옛집… 그러나 1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 않을텐데 어찌 나만 가족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었겠소.

   나는 내 생전 평화통일이 될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당신도 아는 함석헌 선생이 돌아가시기전 이런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제 육으로는 안될것같아. 영생을 사는 영으로 북녘땅을 밟아봐야지…” 함선생은 벌써 북녘땅을 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평화통일이 이루어질것이란 확신을 가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북에서는 종교가 누구에게나 용인되지 않겠지만 당신은 항상 기도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 생전에 38선이 열리고 이산가족 모두가 만나 재상봉의 감격을 나눌 수 있다고 믿기에 기쁜 마음으로 이 편지를 끝낼 수 있습니다.

1990년6월 24일, 이산 40년만에 부산에서 당신의 기려.

   기도 속에서 언제나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아이들이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저는 마음속의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이렇게 하면 어떠냐고 응답해 주셨고, 저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잘 자란 우리 아이들, 몸은 헤어져 있었지만 저 혼자서 키운 것이 아닙니다. 꿈속의 당신이 무의촌에 갔다오면서 주머니 속에서 쌀 봉투를 꺼내 주시면 저는 하루 종일 기뻤습니다. 당신이 거기에서도 당신답게 사신다는 것을 혜원의 편지를 받기 전부터 저는 알았습니다. 이산가족들과의 만남이 하루 빨리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팔십이 넘도록 살아 있음이 어쩐지 우리가 만나게 될 약속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 오려나
썩은 나뭇가지에서 꽃이 필 때에 오려나
일구원심 나의 맘에 그대 마음 간절하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 오려나

암만 말하여도 안타깝기만 하여 이만하고 당신과 기용이네 가족이 건강하여 만나게 될 그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으며 부디 옥체 건강하시기를 바라고 또 바라옵니다.

평양에서 김봉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