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칼럼(하늘소망)

양자역학과 인간의 자유 의지

배남준 2018. 1. 28. 17:13


양자역학의 이해 (양자물리학) - 동영상 포함


  양자역학에서 나타난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언급하려면 자연히 예정론이 등장하게 되고 구원의 문제가 따라야 한다. 신학적인 논쟁이 아직도 이어지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이다. 신학자들의 주장과 설명을 읽고 또 읽어도 너무 어려워서 알다가도 몰라진다. 머리가 아프다. 그저 전문가들의 일로 맡겨두고 자신의 생각은 접어두기 마련이다.

"어떻게 비유로 쉽게 설명 될 수 없을까?" 오랫동안 고민해오던 숙제였다.

그런데 양자역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자유의지의 확고한 의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먼저 자유의 의미. 참 자유가 주는 깊은 뜻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지식은 언제나 한계가 있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게 더 많아진다. 창조의 신비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몰라 답답할 때, 진정 무엇을 구할 때 하나님의 대변자이신 예수님 속에서 찾아야 한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

여기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 속에 거할 때 참 자유가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진정한 자유는 반드시 선해야 한다. 악하다면 그것은 방종이지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니다. 예를 들면 나이트 클럽에서 밤새 여성과 함께 술을 먹으며 춤추며 신나게 놀았다. 자신은 자유를 만끽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마음이 몹시 괴롭다. 하나님을 몰랐던 젊은 시절 누구나 한번쯤 겪어본 경험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태안 기름 유출 사고로 얼룩진 해변가에서 하루종일 땀을 흘리며 봉사를 했다. 다음 날 느끼는 마음의 기쁨은 어떠한가. 그렇다면 나이트 클럽에서의 하루와 해변가에서의 하루, 어느 날이 진정한 자유로움을 누린 것일까?

 

참 자유는 육체적인 것 보다 정신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로 인해서 느끼는 기쁨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요, 계속적인 것이어야 한다. 두고 두고 생각 할수록 기쁨의 그리움이 묻어나야 한다.

 

인간의 몸은 약 1백조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한개의 세포는 수 많은 분자와 또 원자, 그리고 원자 속에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다. 대략 인간의 몸에는 1028승의 원자가 있다고 한다. 우주의 별의 수는 10의 22승이라고 하니 백만배나 더 복잡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들 속의 전자들이 맹렬하게 제 마음대로 궤도를 달리고 있다. 이와 같은 전자들의 자유스런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창조할 때 분명히 '자유의지'를 허락하셨음을 과학적으로 깨달 을 수가 있다


하이젠베르크

- 독일 하이젠 베르크 -

  

이러한 전자들의 불확실한 모습에서 독일의 하이젠베르크의 유명한 '불확정성의 원리'가 탄생되었다. 그의 저서 '부분과 전체' 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원자물리학의 시작에서부터 세계 2차대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비극에 이르기까지 원자물리학의 발전사를 자서전 형식으로 대화와 토론의 장으로 이끌어 간다. 어려운 과학이론을 빼고 그가 그리는 자연의 정경속에 서있노라면, 마치 헷세와 만난듯한 착각과 낭만에 빠져든다. 그의 유려한 문장때문이다. 과학자가 아니라면 그는 훌륭한 소설가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아안슈타인이 여러번 등장하여 그의 진지한 사고와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을 뿐 아니라 20세기 초 양자 물리학의 거장들이 총출연하여 고뇌하며 사색하는 장면들이다. 서울대학이 추천한 100대 도서중의 하나이다.

1920년 봄, 젊은 대학생이었던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친구들과 자연속을 도보 여행하며 원자의 세계에 대해 토론을 했다. 빛나는 너도 밤나무 숲사이를 지나 호수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어느 날 밤은 모닥불을 피우고 성곽이 바라보이는 초원의 천막 안에서 밤을 지새우며 대화를 했다. 그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6년 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천재였다. 그의 스승은 덴마크의 양자물리학의 개척자 보어였다. 여기에 오스트리아의 양자물리학의 공헌자 슈뢰딩거가 합세를 하여, 이들 삼총사에 의하여 오늘 날 양자역학의 체계가 튼튼히 자리잡을 수 있었다. 때로는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일행은 요트로 바다를 여행하며 선상에서, 외로운 섬의 해변을 거닐며 서로의 이론을 토론했다.

19269, 보어의 초청을 받아들인 슈뢰딩거는 한 주일동안 보어의 집에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머물렀다.

보어와 슈뢰딩거의 토론은 코펜하겐의 역에서부터 시작되어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그토론의 열정을 후에 하이젠베르크는 다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음을 토로하고 있다.

양자 물리학은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심어져 열정적인 대화와 토론으로 화려한 꽃을 피었던 것이다.


[정태유 추천도서] 아인슈타인이 외판원이었다면... (켄 태너 저)

   - 아인슈타인-

 1927년 가을 물리학회에서 물리학자들의 공개적인 대결이 있었다. 주로 보어가 양자의 원리를 설명하고 아인슈타인이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묵고 있는 호텔 식탁에서 주로 많은 시간을 토론했고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과제를 풀기위해 과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하루종일 끙끙거렸다. 그러나 저녁때가 되면 그 해답은 훌륭히 주어졌고 다음 날 아침 아인슈타인은 더욱 복잡한 과제를 던졌으나 저녁이되면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양자 물리학자들의 승리였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후세에 저 유명한 한 마디를 남겼다.

"사랑하는 하나님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불확실한 확률만이 존재하는 양자의 세계에 대한 그의 볼멘 불만의 고백이였다.

그후 반세기 넘어 세월이 흐르고 아인슈타인이 틀렸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이되었다. 하나님은 주사위를 던지신다. 공중에 던지신 주사위는 떨어질 때 1에서 6까지 자유스럽게 자신의 숫자를 표현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에게 분명히 자유의지를 부여하셨다.

 

오늘의 세계는 카오스의 세계이다.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 볼 수없는 혼돈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마치 원자 속의 세계와도 같다. 원자 속에 전자들은 어쩌면 바쁜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과 너무나 닮아 있다. 미국의 유명한 우주 과학자 칼 세이건은 죽음 직전에 아렇게 고백했다.

"우리가 사는 우주는 우주 밖에 큰 우주들이 무한이 계속되고 그에 비하면 이 우주는 하나의 작은 입자가 아닐까?"

오늘 날의 과학자들은 양파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면 또 양파 껍질이 있듯이, 다 차원의 우주 또는 무한한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양자의 세계를 알고난후 부터 과학자들의 사고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인류는 3차원 속에 존재하며 시간이 흐르는 4차원 세계에 살고 있다. 그렇다. 인류가 존재하는 이 세계가 하나의 원자이고 우리 한 개인들은 그 속에 전자들이라고 믿어진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내 책상과 의자는 얌전히 어제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신기한 일이다. 원자의 세계를 알고나면 당연한 일이 신기하게 여겨진다. 책상과 의자는 수많은 분자들로 구성되어있고 또 그것은 수많은 원자들과 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전자들의 튀는 행동대로라면 그 물건들은 어디론가 날아가 사라져 안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제의 나 개인이 무척 이리 저리 튀며 자유스럽게 살았어도 아침에 깨고 나면 지구촌의 사정은 변함없이 유유한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미시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무한한 자유와 우연들의 결합이 확율이란 세계를 넘어 보이는 거시 세계에서 질서와 조화와 필연으로 변화되는 과정이야말로 하나님 창조주만이 알 수있고 할 수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전지 전능하시다.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심이 하나님의 본질이신 것이다.

 

성경을 다 읽고나면 크리스천들은 여러가지 연상을 하게 된다. 그 중에 하나가 인류의 역사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편의 시나리오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기획된 한 편의 영화라고 믿어진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예정하셨다. 그러나 예정과 결정은 다르다. 예정은 100% 결정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예정 속에 포함된 자유의지의 범위와 비중은 어떠한가? 그리고 인간의 구원은 과연 선택된 자들만의 은혜일까?

인류의 역사가 한편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하니까 '왜 하나님은 다 아시는 내용을 보고계실까?' 이런 의문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한편의 영화를 떠올리면서 그 해답이 주어졌다. 바로 영화 '춘향전'이였다.


[경주시립노인전문요양병원] [영화감상] 1961作 성춘향

-최은희 주연 신상옥 감독 -

춘향전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래도 그 영화는 여러번 제작되었다. 내용을 모르던 영화보다 오히려 더 많이 상영되었다. 춘향전은 그만이 갖는 독특한 감동과 재미가 있다. 국민적 향수가 묻어 있다.

춘향전은 지금까지 8번 제작되었다. 1961년에는 두편의 춘향전이 같은 무렵 경쟁적으로 상영되었다. 신상옥감독과 최은희 부부가 만든 '성춘향'과 홍성기 감독과 김지미 부부가 만든 '춘향전'이 대결했다. 그러나 성춘향은 흥행에 최고의 기록을 세우며 크게 성공한 반면에 춘향전은 참패했다. 같은 내용이면서도 어느 것은 성공하고 어느 것은 실패한다. 왜 그럴까? 배우들의 연기와 화면의 배경에서 느껴지는 감동과 재미, 작품성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인류의 드라마를 통하여 이 같은 감동의 기쁨을 느끼고 싶어 하신다. 그리고 어쩌면 냉철한 모습으로 드라마의 작품성을 예의 주시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연출가이신 하나님은 영화의 모든 내용을 시나리오에 예정하시고 다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대로 옮기신다. 그러나 연기의 내용까지 세세히 기록하지는 않는다. 연기는 출연자인 배우들의 몫이다. 배우는 한가지 표정과 동작에도 수많은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배우들의 연기는 시나리오와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자유스런 표현이다. 바로 이것이 인류의 드라마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 범위가 아닐까?

연기자들의 연기력에 작품이 빛나고 바래기도 한다. 성춘향에서는 배우 허장강이 방자로 출연하여 뛰어난 코믹 연기로 관중에게 웃음과 재미를 선사했다. 연출자는 시나리오를 약간 변경해서 예정에 없는 몇 장면도 방자를 위해서 추가할 수 있다. 하나님도 때로는 인류에게 주어진 역의 예정을 약간 벗어나 행하시기를 원하신다. 춘향전의 압권은 어사출도해서 이도령과 결박된 춘향이의 해후하는 장면이다. 슬픔과 기쁨과 감동이 교차하는 크라이맥스에서 두 주인공의 표정과 동작은 100번을 반복해도 절대로 똑 같을 수가 없다. 그들의 연기는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표현된다. 그러나 스토리 내용은 전혀 변함이 없다. 춘향이가 변사또에게 수청을 드는 춘향전은 결코 생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매일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제한된 자유인 것이다. 이것이 연출자의 뜻이요 하나님의 뜻이리라.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으로 모세에게 불같이 화를 내시는 장면이 여러번 나온다. 그 때 성경을 읽던 독자들은 당황한다. 하나님은 정말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을 몰랐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나도 해답을 못 찾아 한동안 답답한 적이 있었다. 정말 몰랐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님이 아니시고 알았다면 연기로 기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진퇴양난이다.

영화를 촬영할 때 밤샘을 하며 길거리에서 수고하는 일행들을 가끔 목격한다. 때로는 감독이 연기자에게 화를 벌컥내며 주위의 분위기를 긴장시키는 모습도 본다. 감독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감독이 거짓 으로 화를 냈을까? 아니다. 그는 정말 화가 나 있다. 신경이 예민해 있다. 감독이 진정으로 원하는 뜻과 분위기를 배우들이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진심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화를 내셨다.

드라마란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한 얘기의 연속이라면 가치가 없다. 모든 드라마의 내용엔 성공과 실패가 있다. 기쁨과 슬픔이 있기 마련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성경속 인류역사도 에덴동산의 행복에서 불행으로 고난에서 축복으로 흥망성쇠의 계속되는 장대한 파노라마이다. 그래야 영화가 재미 있고 작품성이 있다.

 

그렇다면 영혼 구원과 인간에게 주어진 예정과 자유의지의 관계는 무엇일까?

참으로 중요한 문제에서 그 답을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 보아야 한다.

l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14:15-24)

 

결혼 잔치의 비유는 참으로 중요하다. 예수님은 신랑이시고 구원받은 백성들은 모두 신부들이다. 저 하늘나라에서 어린양 예수님과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졌다. 예수 믿는다고 다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는 열처녀 중에서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만이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위에 말씀 중에서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신랑은 예수님이시고 구원받을 백성들은 초대장을 받았다. 초대장은 이미 주인에의하여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오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의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구원의 권리를 포기했다. 예정은 결정이 아니다.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예정은 철회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방인들이 초대되었다. 그들도 여러가지 사정을 핑게하며 세상 형편이 바빠서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초대를 거절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전혀 예정되 있지 않던 사람들이 초대되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은 만인에게 평등하게 열려있다. 윗 글에 종은 누구일까? 이들은 하나님이 미리 확실히 선택하신 에레미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 선지자들이다. 오늘 날 교회의 목사님들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믿음 좋은 장로 권사님들일 것이다. 일부 하나님의 심부름꾼 종들은 확실히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세상의 일부 사람들의 구원만을 위해서 저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서 그 보배 피를 흘리셨을까? 성경을 아는 크리스천들의 순간적인 영적인 판단은 절대로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게 된다.




십자가의길


십자가의 의미는 실로 하늘과 바다보다 넓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신학적으로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러한 영적인 지혜는 신학적 이론에 우선한다. 과학의 지식을 초월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위대하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그 문은 복음의 기쁜 소식을 알려고 다가가는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결혼 잔치에 부지런히 참석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혼인 잔치에서 우리의 신랑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