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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퍼 최일도 전도사와 수녀의 만남 - 첫 사랑 이야기

배남준 2017. 12. 8. 14:18
[역경의 열매] 최일도 <6> 베델성서 연구모임서 수녀였던 아내와 첫 만남 기사의 사진
청년 시절 최일도 목사와 당시 수녀였던 김연수 사모가 함께 찍은 사진. 두 사람은 베델성서 연구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역경의 열매] 

                       베델성서 연구모임서 수녀였던 아내와 첫 만남  

  

 

갑자기 별세하신 아버지가 주일성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아 지옥에 갔다는 전도사의 발언은 참으로 긴긴 세월 상처로 남았다. “더 이상 그런 교회는 나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자 교인들은 위로는 못할망정 “아버지가 돌아가시더니 일도가 이상해졌고 타락했다”며 정죄만 일삼았다. 그로 인해 나는 교회에 대한 환멸을 갖게 됐다. 

어린 나이였다. 기독교는 아니다 싶어서 가톨릭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됐다. 참으로 괴롭고 고통스러웠지만 난 모(母)교회와 어머니 곁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전국의 수도원을 찾아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많은 가톨릭 관계자들을 만났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고마운 분은 김수환 추기경의 비서실장이던 홍인수 신부다. 그분이 오류동 성당의 주임신부였을 때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가 수도 생활과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분의 서재에 있는 신앙서적은 거의 다 읽었다.

더 많은 책을 읽고 싶다 했더니 홍 신부는 신학대학 도서관만큼 많은 책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했다. 바로 지금의 아내가 당시에 수녀로 있던, 명동성당 바로 뒤에 있는 샤르트르 바오로 수녀원의 도서관이다. 그곳을 자주 찾아가 책을 뒤지고 잡히는 대로 정말 열심히 읽었다.

때마침 수녀원에서 베델성서 연구모임이 시작됐다. 지금의 영적 멘토인 박종삼(전 월드비전 회장) 목사님을 통해 베델성서 연구의 내용을 익히 들었던 터라 수녀들 틈에서 베델성서 공부 및 베델의 노래와 레크리에이션을 인도할 기회가 생겼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기회는 애초의 목적과 다르게 나와 한 수녀의 운명까지도 바꿔놓고 말았다. 

베델성서 연구반에서 물론 난 청일점이었다. 여느 날처럼 악보를 펴놓고 교육내용에 맞는 음악을 선정하고 있었다. 그때 교육관으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문을 등진 상태였고 소파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부터 들었다. 신선하고 맑은 목소리가 아름다운 멜로디처럼 들려왔다. “유 수녀님, 예고도 없이 찾아와 죄송해요. 저도 베델성서를 공부하려고 왔어요.”

“아네스 로즈. 잠시만요. 아참 두 분 서로 인사하세요. 이분은 수사 신부가 되길 원하는 최일도 전도사님. 그리고 이분은 김 아네스 로즈 수녀님이에요. 계성여중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지요.” 그제야 뒤돌아봤다. 키가 훌쩍 크고 얼굴이 하얗고 목이 가느다란 수녀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하얀 프리지어꽃이 웃는 듯했고 코스모스가 내게 인사하는 듯했다. 난 그만 황홀경에 빠졌다.

인사를 나눈 뒤 성서연구반 담당수녀와 대화를 나누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었다. 천진스러운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이야기하는 그 수녀가 왜 그토록 내 마음을 흔들었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하나님께 자신의 전 생애를 봉헌한 수도자인데 말이다. 알을 깨고 막 나오는 햇병아리의 솜털과도 같은 의식의 발아가 어쩌면 그리도 아프던지.

그날부터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녀를 만난 이후 일기장엔 온통 그녀 이야기로만 가득 찼다. 그날부터 잠들기 전, 그리고 하루가 시작되는 가장 순결한 새벽의 첫 시간이면 어김없이 언제나 목마른 그리움으로 사랑의 시를 썼다. 하루도 빠짐없이.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밥은 잔치이다. 작은 밥상이든 큰 밥상이든 밥이 있고 그 안에 땀과 눈물과 정성어린 ‘밥심(心)’이 담겼다면 밥을 나누는 시간은 언제나 축제의 시간이다. 1988년부터 청량리 쌍굴다리 아래서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밥을 퍼온 다일공동체 최일도(55) 목사와 김연수(60) 사모. 이들에게 밥은 나눔과 섬김의 도를 깨닫고 실천하게 해 준 선물이었다.

밥心과 꽃心

부부는 최근 ‘밥心’, ‘꽃心’(마음의 숲)을 나란히 펴냈다. 남편의 ‘밥心’은 이 땅의 저잣거리로 내려와 서민들과 함께 온몸으로 따뜻함을 나누는 에세이. 아내의 ‘꽃心’은 인간의 고결한 영혼과 정신을 다룬 시집이다.

밥의 마음은 ‘나눔’이고 꽃의 마음은 ‘감사’이다. 밥心’은 세상에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이 어떻게 힘이 되고 심이 되는지, 기적은 밥에서 태어나고 퍼줄 때, 행동할 때 가꾸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꽃心’은 어떤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이 세상을 꽃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아픔도 향기가 되고 슬픔도 빛나는 보석이 된다고 말한다.

밥은 어째서 따뜻하고 꽃은 어째서 향기로울까. 온기를 가지고 태어난 밥의 속성과 향기를 지니고 태어난 꽃의 속성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베풀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밥의 마음만으로는 살 수 없고 꽃의 마음만으로도 살 수 없다. 밥심과 꽃심이 어우러져 절묘한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래서 밥심이, 꽃심이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인심이 된다. 밥의 마음과 꽃의 마음으로 동행해온 부부의 인연은 아주 특별했다.

솔로에서 듀엣으로

1981년 7월 24일. “덜커덩” 수녀원의 문이 열렸다. 서른 한 살의 김연수 수녀는 바깥세상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11년 동안 살던 집을 떠나는 발걸음이었다. 한동안 눈을 감았다. 높은 수도원 담장 밖에서 패기 넘치는 한 젊은 신학생이 보내온 연가는 끝내 그녀를 밖으로 불러냈다. 하나님께 솔로로 드리던 찬미의 노래를 듀엣으로 바꿔 부르는 새 삶이 시작됐다.

시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인 아내는 82년 결혼 후 한 편의 시도 쓸 수 없었다. 삶의 짐을 지고 가파른 산을 등정해야 하는 가장의 책임이 어깨를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7년 동안 신학공부를 하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하루빨리 남편이 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로 청빙받는 날만 학수고대했다.

그래도 아내는 남편의 자존심이 상할까봐 화장대 서랍에 돈을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도록 배려했다. 남편은 그 돈으로 매일 노숙인들에게 밥을 사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아내는 “여보, 내게도 왜 그런 마음이 없겠어요. 그렇지만 우리 힘으론 역부족입니다”라며 말렸다. 남편은 등산용 버너와 코펠을 구입해 청량리로 나갔다. 노숙인들에게 라면을 끓여주었다. 다일공동체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노숙인들에게 나눠 주는 손길이 무거웠다. “나는 집에서 밥을 먹는데…, 아무리 그들과 같이 라면 먹고 함께 땅바닥에 뒹군들 나는 그들과 같아질 수가 없지 않은가.” 이런 자책은 따뜻한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계속됐다. 지켜보던 아내는 울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왜 그러는지 다 알아요. 없는 사람들 생각나서 그런거죠? 그렇게 밥 한 끼도 편히 못 먹고 청승 떨려면 당장 그만두세요. 나도 더 이상 못 참겠어요.”

한참 울던 아내가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가지고 가서 당신 소원대로 한 끼라도 밥을 지어 함께 나누어 드세요. 이게 지금 우리집에 있는 현금 전부예요.” 통장 잔액에 79만원이란 숫자가 찍혀 있었다. 남편은 그 돈으로 전기밥솥 4개와 40명분의 숟가락·젓가락을 샀다. 그제야 비로소 ‘내가 먹는 밥을 그들과도 함께 나눌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청량리의 오병이어 기적

다일공동체가 청량리역 광장에서 배식을 할 거란 소문이 퍼졌다. 청량리경찰서 정보과 형사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거지들이 광장에 모여 밥을 먹는 사진이 북쪽에 전송되면 큰일”이라고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청량리 야채시장 주변은 야채 썩는 냄새가 코를 들쑤셔댔다. 냄새는 한번만 맡아도 오장육부가 뒤틀려 올라올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배식을 시작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시장 상인들이 팔다 남은 생선과 야채 그리고 쌀을 가져다주며 “내일도 그들에게 밥을 해 주세요”라고 했다. 상인들의 도움으로 두 달 동안 무료 급식이 이어졌다. 이후 영락교회, 소망교회 등 7개 교회가 하루씩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오병이어의 기적이었다.

배식하던 어느 날, 소나기가 쏟아졌다. 모두 식판을 들고 비를 피해 뛰어간 곳이 쌍굴다리 아래였다. 그곳에서 14년간 배식이 이루어졌고. 지금은 공터가 된 조립식 다일공동체 시설에서 8년간 배식을 했다. 다일공동체는 지난 성탄절에 처음으로 독립 건물을 건축할 수 있었다.

큰 교회를 세우기보다 평생 부랑인을 돌보는 사역을 해 온 남편을 보며 아내로서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가 수녀원 생활을 통해 몸에 밴 절약과 인내심이 없었다면 몇 번씩 보따리를 쌌을 것이다. 김 사모는 성령의 위로를 받았기에 절망의 고비를 넘을 수 있었다. “5년만 참자고 하던 것이 23년이 됐어요. 절망과 고난의 시간도 있었지만 고비마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몇 배의 위로를 받았어요. 얼굴도 본 적 없는 1004명이 다일천사병원 건립에 동참한 것이 기적 아니면 뭐겠어요.”

반면 최 목사는 그동안 가족들이 남편과 아버지의 빈 자리를 바라보며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미안해했다. “아내의 신음과 비명을 너무나 당연히 여겼습니다. 내 안에 해처럼 빛나는 아내에게,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과 두 딸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그리고 진실로 고맙습니다.”

또 아내는 어느새 50대가 된 남편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다. “직장생활이나 취미생활도 지겨워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는데 이 어려운 일을 23년 동안 해온 남편을 존경합니다. 많은 협력자들이 있지만 리더의 자리는 늘 외롭고 힘들거든요. 잘생겼던 남편의 얼굴에 주름이 늘고 머리숱도 줄어드는 것을 보면 마음이 짠해요.”

한톨이를 아시나요?

다일공동체는 다일천사병원, 다일영성수련원을 둔 사회복지법인이다. 또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네팔 등 7개 나라에 해외 지부를 둔 국제적인 NGO가 됐다. 한 사람을 위해 라면을 끓일 땐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부부의 ‘밥퍼운동’은 한국에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됐지만 현재 비기독교인들이 더 많이 참여하고 있다. 최 목사는 한 해 평균 캄보디아를 방문하는 한국인 24만명 중 8만명이 ‘밥퍼운동’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캄보디아 다일공동체에서만 1억6000만원의 후원금이 모아졌어요. 비기독교인들이 ‘당신이 믿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먼저 주라고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코끝이 찡해집니다.”

또한 그는 굶주리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도 밥심이 전해지길 바란다. 그는 대뜸 한톨이를 아냐고 물었다. “한톨이를 아세요? 키는 5㎜, 몸무게 0.2g. 제발 한톨이를 창고에서 썩도록 쌓아두지 말고 한톨이를 보내주세요. 한톨이를 만나길 원하고, 먹어 힘내고 싶어 하는 저 북녘땅 굶주린 어린아이들을 위해 우리의 쌀, 한톨이를 보내주세요.”

세상에 태어나 어쩌면 가장 슬프고 비참한 일이 밥 굶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일어서도록 손 잡아주고 격려하는 밥심으로 배고픈 누군가에게 따뜻한 밥이 되어준 일이 있다면 우린 분명 잔치의 감격을 경험할 수 있을 터이다. 밥의 마음과 꽃의 마음으로 살아온 부부처럼.

                                                          글 이지현 기자·사진 김태형 선임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