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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8] 장애인들의 천사 임마누엘집원장- 사모의 헌신 감동

배남준 2017. 7. 12. 09:24

[역경의 열매] 김경식 <8> 건축비 부족하자 옥한흠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기사의 사진

김경식 목사는 결혼식을 올리고 곧바로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다. 4년 후 충남 부여로 떠난 가족여행 모습. 임마누엘집 제공


결혼식 이듬해 나는 백석신학대에 입학했다. 임마누엘집 식구들과 예배를 드리면서 신학의 필요를 절감했다. 목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였다. 나는 초등학교까지 기어 다니면서 “예수 믿어야 천당 간다”고 전도했다. 친구들은 나를 놀리면서도 ‘목사’라고 불렀다. 그때부터 목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결혼 후 아내도 내가 목회자로 살아가길 바랐다.

낮에는 외판 세일을 계속했고 밤에는 신학공부를 했다. 아침 일찍 나가면 밤 11시가 넘어 귀가했다. 아내는 그때까지 임마누엘집의 가사 일에 전념했다. 전신마비 장애인들의 목욕과 용변처리, 빨래, 사무행정 등 온갖 일을 도맡았다. 꿈같은 신혼생활 대신 매일 매일 지친 몸으로 끙끙 앓았다.

이런 가운데 아내가 임신을 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1985년 개장한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 자전거를 타고 가서 배추와 무 등 야채를 주워왔다. 당시 가락시장엔 지방에서 야채를 싣고 온 차들이 많았다. 짐을 부려놓으면서 떨어진 야채가 많았는데 그걸 모았다.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내가 야채를 주우러 다니자 상인들은 물었다. “아니, 젊은 새댁이 왜 야채를 줍고 다녀?” 아내는 “장애인을 모시고 산다”며 형편을 얘기했다. 그러자 시장 상인들이 딱하다며 야채를 그냥 주기도 했다. 어떤 날은 갖은 양념 재료까지 얻어왔다. 아내가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85년 5월 아들 바울이가 태어났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하얀 피부를 가진 잘생긴 아기였다. 진도에 계시던 어머니는 손자 소식에 춤을 덩실덩실 추셨다 한다. 아내는 몸조리도 제대로 못한 채 출산 이틀 만에 집안일을 돌봤다.  

당시 임마누엘집에는 지체장애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학생 등 40여명이 모여 살았다. 학생 15명은 부모가 장애인이어서 학교 진학을 못해 우리가 돈을 모아 공부를 시켰다. 정신이 온전하고 생활력이 있는 분들은 결혼을 시키며 자립을 도왔다. 식구들 중에 30년 동안 전신마비로 살아왔던 형제가 생각난다. 강동윤 형제다. 그는 죽어도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임마누엘집에서 살다가 하늘나라로 가겠다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곤 했다.  

그는 임마누엘집에 오기 전 아무 곳도 자신을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고 한다. 행복하게 살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식구가 된 지 5년 만에 주님 품으로 떠났다. 욕창이 악화된 데다 대장암까지 겹쳤다. “저는 천국 갑니다”하며 평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식구들이 늘어나고 셋방살이를 하면서 눈치 보는 일도 많아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큰집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88년 논픽션 드라마로 방송을 탄 후 나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전국에서 집회 요청이 쇄도했고 후원의 손길도 이어졌다. 나는 한 달에 20차례 넘게 간증집회를 나갔다. 그렇게 강연하고 책을 팔자 돈이 모아졌고 지금의 임마누엘집 땅 660㎡(200평)을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건축할 돈은 부족했다. 

그때 하나님은 돕는 천사를 보내셨다.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님이었다. 옥 목사님은 어느 날 전화를 하더니 “외환은행에 가봐” 하셨다. 은행에 갔더니 수표를 줬다. 300만원이었다. 나는 너무 감사하고 기뻐서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이를 시작으로 후원금이 들어오기 시작해 건축비용이 마련됐다. 90년 11월 3일 지상 5층, 지하 1층의 건물을 지었다. 임마누엘집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된 날이었다. 우리는 93년 사회복지법인 허가를 받았다. 강원도 인제, 경기도 이천과 포천, 전남 진도 등에 복지관을 세우며 시설을 확장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