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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암 말기 내게온 선물 - 죽음은 최후의 사명

배남준 2016. 12. 14. 07:09




이 작품은 암 없이 사는 삶을 희망하며 만들어진 Lars Wentzel와 Sarah Dees의 콜라보레이션이다. 사진 : flickr

 

 

한순간 죽음에 가까워진 C자매 

 

【이태형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 소장C자매는 40년 가까이 자신이 주인 되어 살았다. 영혼의 선장은 ‘오직 나’일 뿐이었다.

 

전형적인 ‘강남 스타일’인 그녀는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저녁이면 청담동 일대를 누비며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믿었다. 독신을 고집했다. 요즘 웬만한 사람이면 말하는 ‘카르페디엠(이 순간을 즐겨라)’은 그녀의 모토였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카르페디엠’ 식으로만 살아지는 게 아니었다. 2012년 10월, 그녀는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전 해부터 가슴에 통증이 왔지만 애써 무시하고 순간을 잡으며 살아나갔다. 8㎝의 암 덩어리는 유방을 넘어 폐와 뼈까지 전이됐다.

 

담당의는 치료가 더 이상 의미 없다고 말했다. “너는 집에 가서 유언하라. 네가 살지 못하리라”는 벼락같은 음성을 들은 히스기야와 같이 그녀는 한순간에 죽음을 준비하는 말기 암 환자가 되어버렸다.

 

그녀를 위한 기도

 

이전에 지속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 준 한 언니가 있었다. 그 언니는 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어.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해”라고 말했다. 그것이 성공이요, 행복이며 정답이라고 했다.

 

애써 그 이야기를 무시했었다. 새로운 주인은 필요 없었기에. 암에 대해 의사는 포기했지만 언니는 단호했다. “너, 죽지 않아. 반드시 살아. 죽어도 살아. 부활의 주님을 붙잡기만 하면...”

 

다른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 언니와 함께 교회 공동체들은 생면부지의 C자매를 위해 중보기도에 들어갔다. 언니는 전화로 기도하는 상황을 알려주기도 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고?’ 기도의 효능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변화가 생겼다. 1, 2차 항암치료를 받을 때 죽을 것 같이 힘들었었는데 3차 항암치료는 별 무리 없이 받게 됐다. ‘기도의 힘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토요일, 언니가 출석하는 지방의 교회 찬양 예배에 나갔다. 2시간 넘는 예배시간을 견디기 힘들었다. 목사님의 설교도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도망치듯 나왔다.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있었다. 인생의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만 더 가보자.’ 다음날 주일 예배에 자발적으로 참석키로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고?’ 그녀는 믿지 않았다. 정말 기도의 효능이 있을까? 사진 : flickr

 

 

암은 선물, 정답을 만나다

 

버스 안에서 그 교회가 발행한 소책자를 보았다. 부활 책자로 가장 큰 죄는 피조물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책자를 읽으면서 갑자기 깨달아졌다.

 

자신이 주인 되어 살았던 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라는 사실이 ‘믿어’졌다. 은혜였다. 예배당에 들어갔다. 갑자기 먼저 와 있는 성도들의 뒤통수에서 환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이런 마음이 들었다. ‘아, 여기가 내 집이로구나.’ 어제는 그렇게 들어오지 않던 목사님의 말씀이 콱콱 마음에 박혔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정답입니다.” 풀리지 않았던 인생의 의문점이 한순간에 해결됐다. 정답을 찾은 것이다.

 

정답을 찾은 그때, 단어의 의미가 바뀌었다. 암이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며, 죽음은 절망이 아닌 부활의 소망으로 전환됐다. 암이 아니었으면 부활의 주님을 찾을 생각조차 못했었던 그녀였다.

 

암이 정답을 만나게 해줬다. 그래서 암은 선물이었다. 이제 C자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현존하는 실재가 됐다.

 

작가 브레넌 매닝은 말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요구는 용기를 동원해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하는 부활에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1, 2차 항암치료를 받을 때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다. 가슴은 오그라들었고, 부은 얼굴은 잿빛이 되어갔다. 거울을 보니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한 번도 찾지 않은 하나님께 절규했다. “당신이 계시다면 나 좀 지금 데려가 주세요.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이긴 싫다고요.”

 

‘카르페디엠’이 모토였던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풀리지 않던 삶의 답을 찾았다. 사진 : flickr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C자매는 이사야 43장 1절 말씀을 떠올렸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는 말에 눈물이 났다.

 

“그래요. 하나님 제가 주님의 것인 것 맞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암에 걸리게 하셨다는 깨달음이 왔다. 암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잠시 멈춰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 같았다.

 

하나님이 계신지 돌아볼 생각을 했던 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었다. 성경을 보니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죽는 것은 자는 것이었고 죽음 이후를 위해 이미 예비 된 처소가 있었다.

 

항상 정답을 찾았는데 정작, 이미 손에 정답을 쥐고 있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다시 사신 그분을 만났을 때에 자신의 삶에서 비극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분은 부활하셨다. 하나님은 신이시다. 다시 사는 것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일.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 ‘인생의 주인이 나’라고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죄라는 자각이 왔다.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C자매는 죽음을 생각했다. 관점은 이미 바뀌었다. 회개 이후 C자매의 유일한 삶의 목적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말기 암에 걸린 자신이 할 일은 말이 아니라 죽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죽음은 자신에게 주어진 ‘최후의 사명’이었다. 병 중에 교회에서 처음으로 간증을 했다. “제가 혹시 죽더라도 주님께서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가실 터이니 결코 슬퍼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모두 지금처럼 기쁘게 앞만 보고 가시기 바랍니다.”

  

암에 걸린 모든 여성들과 Sarah Dees, 자신의 초상화이다. C자매는 아직 가슴 복원 수술을 하지 않아 한쪽 가슴에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다. 사진 : flickr

 

 

인생의 깨달음을 준 흉터 

 

여섯 차례의 항암치료를 받은 이후에 최종 결과가 나왔다. 암 덩어리가 없어졌다. “기적입니다. 축하합니다.”란 의사의 말에 C자매는 환호하지 않았다. 대신 죽음을 준비했던 자신에게 시간을 더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즉각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활을 증거하도록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이라는 자각만이 가득 찼다.

 

C자매의 삶은 달라졌다. 사람을 만날 때 그들의 조건이 아니라 영혼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며, 온갖 의무조항으로 가득 찬 일상에서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기도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직 그녀는 가슴 복원 수술을 하지 않았다. 한쪽 가슴엔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다. 그 흉터를 볼 때마다 C자매는 부활의 주님을 생각한다. 그 ‘스카’(Scar·흉터)는 예수님 영접했음을 알려주는 스티그마(Stigma·흔적)였다. 인생의 ‘스카’는 부활의 주님으로 인해 ‘스타’(Star·별)가 되었다.

 

요즘 C자매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예수는 나의 주!”를 세 번 외친다. 하루 종일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고 있다.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다.


              -이 태형 (국민일보 기독교연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