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라한 가을 햇살을 등진 채 인사를 건네는 바이올리니스트 박지혜(30)는 이제 막 길거리 공연을 마치고 온 행위예술가 같았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만난 그녀의 곁에는 ‘영혼의 동반자’인 1735년산 ‘페트루스 과르네리(Petrus Guarnerius)’가 함께 했다. 독일 정부 예술부 장학기관으로부터 평생 무상임대를 받은 세계 3대 명기 중 하나다.
독일 남서부 라인란트팔츠주의 주도 마인츠에서 태어난 박씨는 어린시절부터 바이올린을 끼고 살았다. 10대를 지나면서는 ‘독일 총연방 청소년 콩쿠르 1위’ ‘독일 마인츠 음대 최연소 입학’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탄생’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성공하기 까지는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견뎌야했다. 우울증과 음악적·정신적 슬럼프를 견뎌야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아니라 24시간이 밤이고 계속 어둠 속에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삶 가운데 아픔은 늘 존재하죠. 중요한 건 그 아픔 속에서 피난처가 돼 준 기도의 소중함과 아픔을 딛고 일어났을 때 새로운 열정과 꿈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이에요. 그 슬럼프가 없었다면 제 삶의 전환점도 없었을 겁니다.”
음악이 가져다 준 우울증은 음악으로 치유됐다. 찬양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는 박씨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치료제였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닌 ‘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목표가 수정되자 보이지 않던 장벽들이 무너졌다.
“아픔의 순간이 지나가고 나니 클래식 무대만 내 무대라는 경계선이 허물어졌어요.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곡만 들려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보다 친숙한 방식으로 편곡해 연주를 들려줬죠. 청중들의 반응이요? 이전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달랐죠.(웃음)”
2009년 방한했을 때 한 목회자의 제안으로 성도들을 위한 연주회를 열면서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은 것이 또 하나의 변곡점이 됐다. 자신을 치유해줬던 음악, 아픔과 회복의 순간을 담은 이야기가 어우러져 무대를 수놓으면서 박지혜만의 마법 같은 힐링 연주가 그의 인생에 새로운 악장을 열어젖혔다.
세계적인 강연 프로그램인 테드(TED), 5000여명의 중독치료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미국 최대 규모의 정신건강 콘퍼런스 등 무대 위에서 그의 이야기와 연주가 퍼져나가는 곳곳마다 박수와 갈채가 쏟아졌다. 미국 카네기홀, 워싱턴 케네디 센터 등 세계적인 콘서트홀부터 작은 교회, 한센인 병원, 복지 시설 등 그녀의 연주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바이올린과 활을 들었다.
박지혜는 “크고 작음을 떠나 내가 서있는 자리만이라도 어둠을 걷어내고 밝힐 수 있다면 그 자체가 내 중심에 있는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무대가 달라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고 했다. 앙코르 무대에서 연주하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이다.
클래식, 크로스오버, CCM 등 음악의 경계를 허물고 희망의 연주를 이어가는 그녀에게 가을 햇살은 너무 짧았지만 여운은 길었다. “삶은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포장을 벗겨내고 나누는 것입니다. 제가 들려드리는 음악엔 가사가 없어요. 그래서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한계 없이 나눌 수 있죠. 저와 함께 삶을 연주해보시지 않을래요?”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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