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목사-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존경받는 한 정치인이 미국의 로저 밥슨(Roger Bobson) 기자에게 물었다.
“유럽 사람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북미가 아니라 남미였다. 남미는 북미보다 기후도 온화하고 지하자원도 풍부하다.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미가 남미보다 훨씬 잘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밥슨 기자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 정치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남미는 스페인 사람들이 황금을 찾아 정착한 땅이다. 북미는 영국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터를 닦은 땅이다. 과연 하나님이 어느 쪽을 더 사랑하실까. 황금인가, 신앙인가.”
우리 가정은 감사하게도 ‘북미 인생’으로 출발했다. 한국에 선교사가 처음 들어왔을 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 바탕 위에서 ‘믿음의 신대륙’을 건설한 축복의 가문이었다. 복음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주의 종을 극진히 섬기고, 교회의 거룩성과 영광성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을 가문의 전통으로 여겼다.
베어드 선교사와 신양리
베어드(Baird/한국명 배위량) 선교사는 증조부에게 복음의 씨앗을 처음 심어준 분이다. 그 축복의 땅은 평양 신양리였다. 신양리가 어떤 곳인가. 고 장기려 박사가 꿈에도 그리워하고 사모하던 고향의 이름이다. 그리고 베어드 선교사가 13명의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학문과 성경을 가르치던 곳이다. 그 땅, 그 자리에, 그 사람이 처음 세운 미션스쿨이 바로 숭실고등학교다.
증조부는 신양리에서 베어드 선교사 일행을 만나 복음을 받아들였다. 전주 이씨 가문의 8대 독자인 증조부(정종대왕의 4남 선성군의 16대손 이재식 옹)는 복음의 흡수력이 왕성했다. 8대 독자라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증조부는 거침없이 예수를 믿었다.
교회를 건축할 때는 직접 산에 올라가 도끼로 나무를 찍어서 건축 자재를 마련했다.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헌신했다. 8대 독자라면 고집도 좀 세고, 이기적일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복음 앞에서는 용감한 여호수아요, 욕심많은 야곱이었다.
우리 가문은 자손이 귀했다. 아마 9대독자인 조부(이원근 장로)에 대해서도 주위의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을 것이다. 증조부의 신앙을 이어받은 신앙적 열정은 인정하지만, 9대째 독자로 이어 내려온 것에 대해서는 내심 걱정이었다. 그런데 할머니에게 태기(胎氣)가 나타났다. 하나님은 성전을 완공하는데 앞장선 증조부의 독자 아들의 가정에 태(胎)의 문을 여시고 ‘다산(多産)’과 ‘번성(繁盛)’의 복으로 채워주셨다. 9대 독자인 조부는 9남매(4남 5녀)를 얻는 복을 누렸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9남매를 얻은 것은 상상을 초월한 축복이었다.
오벧에돔의 축복
다윗은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했다. 그런데 도중에 웃사가 급사하는 바람에 모든 사람들이 법궤를 두려워했다. 결국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안치됐다. 그로 인해 오벧에돔과 그의 가족이 여호와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는다.
복음을 처음 받아들인 후 성전건축에 전념했던 증조부의 삶과 그의 후손을 어찌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우리 가문에게 ‘오벧에돔의 축복’으로 다가왔다.
조부의 아들 넷 중 하나는 목사, 셋은 장로가 되었다. 딸 다섯 중 하나는 목사 사모,셋은 권사가 되었다. 9남매 중 출가했던 딸 하나만 북한에 남고 나머지는 모두 아버지(조부)와 함께 신앙의 자유를 찾아 복음의 신대륙인 남한으로 넘어왔다. 아버지는그 중 둘째였다.
평양의 고모님은 어떻게 살았을까? 나는 늘 그것이 궁금했다. 고모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완벽한 신앙의 명문가를 이루려면 신앙의 낙오자가 없어야 한다. 평양 고모님의 신앙은 물론 생사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미국 시민권을 가진 고모부가 10여 년 전 평양을 방문해 기어이 고모님 후손들을 만나서 내게 그 소식을 전해주었다.
“고모는 평양에서 8남매를 낳았어. 아주 다복한 삶을 사셨지. 그리고 하늘나라 가는 순간까지 신앙생활을 아주 잘 하셨어. 그 후손들이 지금 평양에 살고 있어. 이제 안심하게. 완벽한 복음화를 이룬 거야.”
나의 궁금증이 모두 풀린 셈이다.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믿음의 명가를 이룩한 것에 감사드린다. 우리 가족들은 황금을 노려 남미를 찾아온 스페인 선원처럼 살지는 않았다. 기독교 복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북미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온 것이 감격스럽다.
외가 쪽 ‘4대 목사’를 기대한다
외가 쪽도 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고 있다. 오히려 친가보다 더 열정적이다.
어머니(김선실 목사)는 신실한 목사님의 따님이다. 외할아버지(김종삼 목사)는 황해도 장연에서 목회를 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시골의 일곱 개의 교회를 맡아 사역했다. 한국교회사의 거목 민경배 교수님, 소망교회 원로목사 곽선희 목사님이 장연 출신이시다. 언젠가 곽선희 목사님이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내 고향이 바로 장연입니다. 목사님의 외할아버지를 내가 잘 알지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셨지요. 아주 훌륭한 어른이셨습니다.”외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외삼촌(김선경 목사)도 목사가 되었다. 외삼촌의 두 아들(김성규 목사, 김일규 목사)도 목사다. 그런데 그 아들이 또 목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4대에 걸친 ‘F4 목회자’가 곧 탄생할 것이다. 아마 130년 한국 기독교회사에 4대에 걸친 목회자 배출은 거의 드문 일일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 가정(순복음)을 제외한 친가 쪽은 큰아버지(이경화 장로)를 포함해 두 분의 작은아버지(이경준 목사, 이경섭 장로)와 고모부(윤명호 목사) 모두 장로교 통합 측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외가 쪽은 모두 장로교 합동 측 교회에 출석했다. 오촌 아저씨 한 분은 성결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군종감(양영배 목사)으로 사역했다. 내 동생(이영찬 선교사)은 뉴저지연합감리교회에서 파송을 받고 현재 아프리카 케냐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그야말로 장감성순(장로교/감리교/성결교/순복음)이 조화를 이룬 완벽한 에큐메니컬이다.
나는 이 글이 행여 신앙적 자랑으로 비쳐지지 않길 바란다. 복음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섭리가 한 가족에게 얼마나 구체적으로 역사했는지를 증명하고 싶다.
자손 대대로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제공 신앙계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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