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듭난 요한 웨슬레
아메리카 선교에서 돌아온 웨슬레는 1738년 2월7일 런던에서 모라비안 목사 한 사람을 만났다. 그의 이름은 피터 뵐러였다. 뵐러와 약 한달 가량 사귀는 동안, 웨슬레는 겸손한 태도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몇 가지 중요한 도리를 배웠다. 무엇보다도 기도, 예배, 성만찬, 금식 등을 열심으로 해야 한다거나, 구제, 전도, 봉사, 선교 등을 많이 하려들기 전에, 순수한 믿음으로 값없이, 자신의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그렇게 죄사함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일은 즉각적으로 단번에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웨슬레는 이런 말이 그때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념에 너무나 거슬렸으나 성경을 뒤져보고 과연 뵐러가 옳았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대로 되어 있지 않아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그러는 동안에 뵐러의 지도를 받고, 단번에 죄사함을 받고, 중생을 하는 중생자들이 생겼다. 그 가운데에는 유기 공 브해이와 그의 누이 터너 부인, 페인트 공 흘런드 등도 있었다. 뵐러는 이렇게 거듭난 사람들과 평일에 수시로 가정집에 모여서, 신앙간증, 질문응답, 성서연구 등 을 하게 하였다.
그 해 5월 24일 수요일 저녁 웨슬레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약속을 했기 때문에, 가정집회가 있는 올더스게잇 가에 갔다. 옥스포드의 쟁쟁한 학자요, 명 설교가인 웨슬레가 그날 거기 앉아서 듣게 된 것은, 페인트 공 흘런드씨의 성경강해였다. 흘런드씨가 루터가 쓴 책을 한 권 읽어가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을 때, 웨슬레는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웨슬레 자신이 이때 마음이 이상하게 더워짐을 느꼈다고 썼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마음이 뜨거워지는 믿음을 강조하지만, 심장의 온도가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변화가 문제인 것을 알아야 한다.
웨슬레 자신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저녁 9시 15분전쯤,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일으키시는 변화를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하게 더워짐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위하여 내가 분명코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나의 죄를, 바로 내 것을 제해 버리셨으며,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 내셨다는, 하나의 확증이 나에게 부여되었다. 나는 좀 특별한 태도로 나를 모욕하며, 핍박해온 자들을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하여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처음으로 마음에 느낀 것을, 거기 모인 사람들 앞에 내놓고 간증하였다.‥‥ 죄의 유혹에 대하여 과거에는 은혜와 율법 아래서 힘껏 노력하고 투쟁했어도, 때로 패배했었는데, 지금은 언제나 승리자이다."
웨슬레는 영적생명을 얻었다. 그는 그날 저녁에 위에서 났다. 거듭난 것이다.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이 일이 있은지 4일 후인 5월 28일 일요일 저녁 허튼씨네 서재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웨슬레는, "닷새 전에는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닷새 전에 내가 이방에 와 있지 않았던 것만큼 확실합니다. 당신들도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모두들 현재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믿고, 시인하셔야 합니다." 라고 말하여, 그 자리를 반대와 야유의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우리 영국 교회가 그리스도인도 못된 사람을 목사로 안수했단 말인가? 우리가 처음 당신을 알던 때로부터,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면, 계속 우리들로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도록 행동했으니 큰 위선자입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든지 웨슬레는 사실을 말한 것 뿐이었다.
** 요한 웨슬레와 모라비안 교도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가 미국으로 가려고 탄 배가 항해 중 침몰직전의 위급한 상황을 만납니다. 그때 미국 인디안에게 선교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가는 자신은, 지금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데, 한 쪽 구석에서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찬송을 부르고, 평안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들이 바로 모라비안 교도였습니다.
웨슬리는 미국선교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모라비안에게 많은 영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당시 모라비안은 진젠돌프 백작이 이끌었는데, 다양한 교파적 배경을 초월하여, 하나 된 교회생활을 시도했고, 적극적으로 선교를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또 하나 유명한 것은 그들의 찬송이 매우 깊은 영성과 품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와 모라비안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요? 그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웨슬리는 신대륙의 조지아(Georgia) 주에서 선교사역을 하기 위하여, 1735년 10월에 런던을 떠났다. 대서양을 횡단하던 웨슬리는 미국에 도착하기 약 10일 전인, 1736년 1월 25일에 심한 폭풍우를 만나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됐다. 이때 웨슬리는 그런 형편에서도 변함없이 평안히 기도와 찬송을 하면서, 배 안에 있는 궂은 일을 불평없이 감당하는 무리를 보았는데, 그들이 바로 영국을 출발할 때부터 함께 하였던 모라비안 교도들이었다.
웨슬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하였으며, 동시에 그와는 달리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모라비안 교도들에게서 큰 충격을 받았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독일의 경건주의 전통을 따르는 이들로서, 독일을 떠나 웨슬리처럼 조지아 주로 가고 있었다. 웨슬리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들 안에 있는 깊은 신앙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들이 신학적으로 영국국교회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도 발견했다.
모라비안(Moravian)운동은 교회사에서 잘 알려진 운동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그들은 최초의 프로테스탄트라는 점과, 현대 선교운동의 선구자라는 점과, 교회연합을 강조하였다는 점등 이다. 특히 그 운동의 지도자 진젠도르프의 신앙과 열심, 그리고 헌신은 그리스도교 지도자의 훌륭한 모델로서 비쳐지고 있다. 모라비안 운동이 교회사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의 영향이 지역적으로 유럽의 여러 지역과 세계에 널리 미쳤다는 점이다. 그래서 로날드 녹스(Ronald Knox)는 모라비안 운동의 그런 점을 가리켜 "유럽선교에 활력 있는 누룩"이라 하였고, 비숍 하세(Bishop Hasse)는 말하기를 "모라비안의 영향은 초기 영국의 부흥의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
죠지아에서 그들의 활동은 좋은 반응을 보였고, 마침내 더 많은 선교사를 죠지아로 파송하도록 결정하였다. 1737년 8월, 26명이 헤른후트를 떠나 런던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이유는 런던에서 죠지아로 가는 배를 잡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시몬즈(Simmonds)라는 배로 대서양을 횡단하게 되었다. 그 배에는 당시 죠지아 총독 오글톱의 초청을 받고 죠지아로 가는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도 승선을 했는데, 바로 이 사건이 18세기 영국교회의 부흥운동을 가져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배에는 영국인 벤자민 잉함(Benjamin Ingham)과 찰스 델라모트(Charles Delamotte)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도 후에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방법은 우연한 만님인 것 같은 사건을 통하여, 사람을 예정된 축복의 도구로 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웨슬레가 그 후에 모라비안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웨슬리의 부흥운동에 연결되는 것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들은 3개월이란 긴 항해를 통하여, 영적으로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였다. 잉함 목사는 후에 미국에 돌아와서, 형제단의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어 활약하였다.
** 요한 웨슬레의 문서 전도운동
요한 웨슬레는 18세기에 영국에서 큰 부흥을 일으켰으며, 어떤 역사가들은, 이것을 또 다른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영국을 구출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1782년에 "전도 책자 협회"를 처음으로 창시했는데,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종교책자 분배협회"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 협회의 노력으로 영국에 사는, 수백만의 비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웨슬레의 책자와 설교는 18세기와 19세기 초에 걸쳐,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했다.
웨슬레의 첫 책자들은 대부분 1페어의 값으로 팔렸다. 단순 명료한 웨슬레의 책자들은 때때로 특정한 사람들에게 보내졌다. 범죄자에게 한 마디, 매춘부에게 한 마디, 술주정꾼에게 한 마디 등등 런던 전역에 배포된 "심각한 회개에 대한 간곡한 권면"이라는, 그의 책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죽은 종교로부터,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산 경험을 하도록 만들었다.
웨슬레는 53년 동안 4만 번의 설교를 했는데, 약속된 설교를 하기 위해 말을 타고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책자들을 기록했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그의 책자들은 영국 전역에 뿌려졌다. 그의 책자들을 통해 그의 이름이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떼지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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