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취재하러 오신 멋진 기자님… 멋지게 취재해 주세요.'
가래를 뽑아내기 위해 목관을 착용한 장유진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오른손을 들어 기자에게 시 한 편을 선물했다. 제목은 '기자님'. 비뚤비뚤한 글씨체였지만 그의 시에선 만남의 반가움과 짧지만 함께할 시간에 대한 바람이 오롯이 느껴졌다.
지난 11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의 한 요양병원에서 만난 유진이는 뇌병변 2급 장애인이다. 2002년 6월 대한민국 월드컵에서 박지성과 히딩크가 부둥켜안던 날, 초등학교 1학년이던 유진이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병원으로 실려 갔다. 어머니 이성미(52·안산제일교회) 집사는 의사로부터 “포기하라. 지금 수술해도 식물인간이 될 확률이 높다”는 날벼락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병명은 선천성 뇌동정맥 기형. 뇌혈관이 실타래처럼 엉켜 뇌출혈과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희귀병이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지금까지 열 네 번의 뇌출혈을 겪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차례 오가야 했다. 수술 후유증으로 뇌병변·시각 장애까지 겹쳤다. 가녀린 어린 소녀의 생을 지탱해 준 힘은 시(詩)였다. 이 집사는 “첫 수술 후 14층 병동에 입원했는데 유진이가 야경을 바라보며 뭔가 적기 시작했다”면서 “다 쓴 것을 보니 별들이 밤에는 땅으로 내려와 술래잡기를 한다는 내용의 시였다. 유진이 눈에는 가로등 불빛, 도로 위 차량의 전조등이 별빛처럼 보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유진이가 쓴 시는 스프링 공책으로 58권, 1만여 편에 달한다. 보고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시상을 떠올리게 했다. 콧줄을 통해 식사하는 옆 침상의 환자는 ‘코끼리 할머니’로, 밥그릇은 배부름을 채워주는 ‘수호천사’로 탄생했다. 스프링 공책 속 작품들 중 아끼는 시를 모아 5권의 시집을 내기도 했다. 2015년에는 입학사정관제로 성균관대 중앙대 숙명여대에 합격했지만 “자신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 친구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며 입학을 포기했다.
대신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이 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아나운서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성경을 보면서 글을 쓰고 아나운서 아카데미를 다니며 연습에 매진했다. 노력 끝에 지난해에는 롯데홈쇼핑 아나운서로 선발됐고, KBS 장애인 아나운서 공채에서 최종 6명 안에 들기도 했다. 이 집사가 보여 준 ‘유진이의 꿈 목록’ 노트에는 ‘이금희 아나운서처럼 내레이션 하기’ ‘노벨문학상 받기’ ‘죽을 때까지 시집 100권 내기’ 등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꿈을 향해 전진하던 유진이는 지난해 11월 악몽 같은 뇌출혈이 또 일어났다. 이 집사는 “언제 의식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유진이는 이번에도 기적처럼 일어났다. 5개월 만에 깨어난 그녀의 몸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온몸을 덮친 마비 가운데서도 오른손은 꿈을 향해 꿈틀거렸다. 이 집사는 “하나님께서 유진이의 오른손을 들어 쓰시려고 계획하신 것”이라며 눈물을 닦았다.
비급여항목인 약품들이 많아 매달 나가는 치료비만 200여만원. 이 집사에겐 이미 ‘신용불량’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하지만 눈감으며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엄마와 딸은 희망의 시를 함께 써내려가고 있다.
안산=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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