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웅 목사!
당신은 지금 내 곁에 없습니다. 8년전 이 맘 때쯤 미국으로 가족 전부가 이민을 가버렸습니다.
늦가을, 제법 쌀쌀해진 거리를 걸으며, 내 마음의 뜨락에 당신을 향한 소중한 기억이 낙엽처럼 하나, 둘 떨어져
아련한 그리움으로 쌓이고 있습니다.
닥쳐오는 한 겨울, 황량한 들판 위에, 한 그루 벌거벗은 나무처럼 저는 외로움을 타고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란 그 사람이 곁에 없을 때, 그 소중함의 정도를 깨닫는가 봅니다.
당신은 나의 벗이었습니다. 당신은 나와 동갑내기로 저의 모든 고민을 털어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였습니다. 92년도 당신은 나에게 환자로 찾아 왔습니다. 그는 극동방송을 켜놓고 진료하는 치과 분위기에 상당히 만족한 듯, 치료가 끝나면 으레 원장실로 들어와
기도를 뜨겁게 해주곤 했습니다.
당신은 그때 신촌 성결교회 집사님이셨습니다. 몇 번의 치료가 끝난 후 그는 오지 않았습니다. 나도 당신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년 후 그는 바람처럼 다시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날 당신이 치과를 다시 방문한 날의 모습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 치과에 특별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출근해 보니 치과 복도 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습니다.
도난 사건이었습니다. 전에도 두 번 당한 경험이 있어 두 개의 문을 철문으로 하고 네 개의 키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세 개의 키는 부서져 있고 마지막 키를 열다가 오히려 잠겨져 열쇠 수리 전문가를 불러야 했습니다.
그때 등 뒤에 당신이 빙긋한 웃음을 지으며 서있었고 여유 있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새벽에 치과를 위해서 기도했지요!”
열쇠 수리 전문가도 왜, 힘든 열쇠 3개는 열고 제일 쉬운 마지막 도어키를 열다, 오히려 그것이 안에서 고장이 나서 잠겼는지 잘 모를 일이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운이 좋다는 신기한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다시 만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신은 그간 신학을 전공하여 용인에 있는 작은 교회성가대를 지휘하는 음악 전도사로 봉직하고 있었습니다.
전도사님의 전공악기는 아코디언이었습니다. 아코디언을 빼고는 목사님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의 가슴엔 항상 아코디언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아코디언은 그의 연인이요, 그의 생명과도 과도 같았습니다. 목사님은 우리나라 아코디언계에 몇 안 되는 뛰어난 연주자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아코디언을 손풍금이라고도 부르며 길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있었습니다. 거리에서 관중을 모으고 여흥을 돋우는 약장수들이 흔히 이 손풍금을 사용하였습니다. 정말 살기가 힘들어 변변한 약조차도 사먹기 힘들고 극장 한번 가기도 벅찼던 그 시절에
거리의 약장수, 그들은 돌팔이 약사요, 떠돌이 코미디언 연예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충웅 전도사님은 아코디언을 켜며 거리에서 약을 팔았습니다. 그가 파는 약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성경말씀, 신약. 구약, 아멘약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파고다(탑골)공원에서, 삼성동 무역센터 전철역 입구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며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때로는 주위에 비아냥거리는 핍박도 아랑곳없이 오직 예수 사랑의 신묘한 약을 팔았습니다.
전도사님의 댁이 치과의원 동네인지라, 우리는 점심 휴식시간에 자주 만나서 주로 하나님에 관한 대화를 하였고, 영적인 위로자로
때로는 동갑내기 친구로 우정을 키워나갔습니다.
당시 저는 삼성 농아원 봉사를 정리하고, 화곡동에 ‘천사 양로원’을 토요일 주말에 방문하여 치아가 없는 할머니들에게 틀니를 무료로 제작해 드리고 있었는데, 전도사님도 동행하여 그는 위층에서 할머니들에게 흐뭇한 위로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금방 누구와도 친밀해지는 천부적인 호쾌함과 친절함을 타고났습니다. 천사 양로원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해서 할머니들이 모두 그의 팬이되었습니다. 제가 아래층에서 진료할 때 그는 위층에서 할머니들과 함께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고 마련해간 다과를 대접하며 때로는 흘러간 노래를 아코디언으로 연주하여 할머니들을 기쁘게 섬겼습니다.
그 후 어렵고도 귀하게 마련된 목사 안수식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축복해 주었지만, 그는 자신이 늘 돌보고 지도하던 연세 고아원생들의 축하 합창을 제일 반겼습니다. 그는 고아들을 진정 사랑했고 노인들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때로는 과부 촌에 가서 그녀들을 위로했습니다. 나의 진료실엔 많은 개척 교회 목사님들이 오시지만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아름다운 전도자중의 한 분이셨습니다.
99년 4월 27일 KBS 라디오 ‘나의삶 나의 보람’에서 유희라 아나운서와의 대담으로 이틀간 소개된 이충웅목사님의 삶은 청취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 . . . . 중략 . . . .
그는 청년으로 성장해서 63년도에 군에 입대했습니다. 카츄사로 선발되었습니다.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카츄사는 지금도 힘들지만
당시는 미군의 전성시대라, 더욱 선발되기가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운이 좋다기보다 그가 평소에 주경야독한 실력을 세상에서 처음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성실한 근무로 표창을 받은 ‘모범사병증’은 제대 후 월남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
미국국방성 군속검사관으로 월남에 취업할 수 있는 행운을 그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 월남 나트랑 해변의 석양 -
이충웅 목사는 1966년 3월부터 7년간을 월남에서 근무했습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직무 수행에 따르는 파워도 있었습니다.
호쾌한 남아, 따이한기질의 그에게 독일 간호장교 바바라와의 뜨겁고도 아름다웠던 추억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야자수 나무 밑, 달빛어린 바닷가에서 그가 좋아하는 아코디언을 켜며 두 이국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 밤이 새도록 익어갔습니다.
베트남의 해변들은 열대의 정취가 흠뻑 배어있는, 그 한가로운 정경이 참으로 낭만적이고 매혹적인 곳이 많이 있습니다. (필자도 월남 참전)
하나님은 그를 무척이나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 방황하고 타락할 때 그대로 방치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를간섭하기 시작하셨습니다.
69년 8월, 그는 가끔 고통당하던 담석증이 갑자기 심해져, 심한 복통으로 진찰을 받은 결과 수술을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건강하던 그에게 그것은 푸른 하늘에 날벼락이었습니다. 수술전날 그는 공포심에 교회를 찾아 눈물로 기도하며 살려만 주면, 온 일생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겠노라고 서원기도를 하였습니다.
95년 ‘이동 후송병원’에서 미군공군 군의관 어거스틴 대위의 집도로 수술이 진행되었고, 야전병원이라 모든 시설과 피도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수술은 예상보다 힘들게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려 9시간이나 걸리는 대수술이었습니다. 수술 경과는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그의맥박은 점점 약해지고 그의 호흡이 완전히 끊겼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군의관과 간호장교, 리즈 중위는 그의 죽음을 애처롭게 바라보았습니다.
미모의 리즈 중위는 평소에 농담도 자주하며 가까이 지내던 유망한 한 젊은이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진실한 크리스천인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소생의 가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시체는 냉동 영안실로 옮겨질 찰나였습니다. 리즈 간호장교의 눈물이 이 검사관의 이마 위에 똑똑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환자의 눈이 떠지고, 이 검사관은 자신의 얼굴 위에서 울고 있는 리즈 중위를 쳐다 볼 수가 있었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간절한 눈물의 기도가 죽어가는 한 생명을 다시 살려놓은 것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약5:16)”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맥박이 끊어지는 순간 육체로부터 빠져나와 하늘 위를 빠른 속도로 솟구치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꽃구름이 그를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그의 양 곁에는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천사라고 생각되어지는 모습이 자신을 안내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밝은 빛 속으로 신속히 전진해 나아갔습니다. 빛이 너무 밝아 감히 앞을 바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름답고 황홀한 빛 속의 여행이었습니다. 그 빛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감정으로 그를 에워싸는 듯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임을 인식하면서 세상에서 모르던 깊은 평온감과 희열감으로 충만해져 있었습니다. 하늘 속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악기를 늘 다루던그 자신도 지상에선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음률이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나아가다 갑자기 흑암의 장벽을 만나 그의 영혼이 순간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어둠의 공포 속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빠져나갔던 그의 영혼이 다시 육체 속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검사관은 깨어났습니다. 죽음 직전에 하늘의 영광까지 몸소 체험하며 다시 살아난 그는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월남에서 귀국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여러 가지 사업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잘 나가던 사업들도 예기치 않은 사정으로 모두 여의치 못했습니다.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고 젊은 날, 월남 전쟁터에서 하나님께 서원했던 하나님의 소명의식이 점차로 되살아났고, 자신의 길이 세상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50여세가 넘어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사가 되어, 음악선교사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동아문화 센터와 강남YMCA 회관에서 아코디언 교실을 열고 다녀간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며 예수님을 찬양으로 전도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사회적인 공로로 서울시장 표창도 받으셨습니다.
언젠가 새벽에 막내 지은이가 슬며시 나가더니 신문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과 세 자매, 온 가족 다섯 명이 함께 미국에 갈 때까지 4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신문을 배달했습니다. 목사님은 집집마다 신문을 돌리며 문 앞에서 일일이 기도를 했습니다.
하루 네 시간만 자도 기쁨으로 일하니 신기하게도 더욱 건강이 좋아지셨다고 자랑하셨습니다.
이민 갈 무렵 미국 대사관에서 필요로 하는 재정 및 여러 여건이 부족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위에서 목사님들이 강력히 보증을 섰습니다. 그 때 저는 추천서에 이렇게 적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 관점에서 볼 때 이충웅 목사님을 받는 미국은 얻었고, 보내는대한민국은 잃었습니다.”
이민이 쉽게 허용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기적이었습니다.
이충웅 목사님! 그분은 어쩌면 종교계에 김삿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듭니다. 그는 지금 미국에서도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불우 이웃, 소외된 영혼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며 전도에 열정을 쏟고 계십니다.
늘 건강하소서!
(P.S 이충웅 목사님은 현재 미국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 받고 세상에서 버려진 소외되고 불행한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에덴 크리스천 교회'를 설립하고 마지막 여생을 헌신하고 있다)
-어느 치과의사의 과학속에 만난 하나님' 책 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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