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이며 탐험가인 아프리카의 아버지 리빙스턴-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 첫발을 들여 놓았을 무렵, 1840년대의 아프리카 대륙은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없고 문명이 전파되지 않은 대륙이었습니다.
해안지방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륙 내부를 성공적으로 탐험한 사람도 없었고, 대륙 자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상아와 황금과 흑인으로 상징되던 이 미지의 대륙을 최초로 탐험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한 사람이 바로 리빙스턴입니다.
리빙스턴은 1813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열 살 때부터 낮에는 방직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한 리빙스턴은 이웃들의 불행한 모습을 충분히 알 수 있었고, 자라나면서 점점 이들에 대한 동정심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불행한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리빙스턴이 스무 살 되던 해, 그는 중국의 기독교 전도에 관한 책을 읽고 중국 전도를 결심하고 선교사 자격을 획득하여 중국으로 출발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840년의 아편전쟁으로 중국행이 불가능해진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미개지 전도를 결정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는 선교사들이 더러 파견되었으나, 아프리카의 미개지 전도는 리빙스턴이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토인들이 다른 마을이나 다른 종족을 습격하여 포로로 사로잡아 온 토인들을 가축처럼 부리거나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리는 것이 흔한 일이었고, 이렇게 팔린 노예들은 항구로 끌려가 노예선에 실려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이 되곤 하였습니다.
1840년 12월,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5개월 동안의 항해 끝에 아프리카에 도착한 리빙스턴은 곧 토인들의 말을 배웠고, 밀림 속에 있는 토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려주었습니다.
이곳에 발을 들여 놓은지 얼마 되지 않아, 사자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빼앗길 뻔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한밤중, 한 토인이 문을 두드리며 급한 왕진을 청했습니다. 밀림의 맹수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일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병이란 때가 늦으면 고칠 수 없는 법이오. 옳은 일을 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니 아무 일 없을 것이오.”라고 오히려 사람들을 위로하며 토인과 함께 캄캄한 밀림 길을 담대하게 걸어나갔습니다.
이처럼 그는 언제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토인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토인들은 리빙스턴이 말하는 친절한 하나님이 바로 리빙스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오지(奧地)에는 미개한 생활을 하는 토인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안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곳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서 그들을 깨우치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질이 나쁜 토인들이 살고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위험한 오지로 간다는 리빙스턴의 결심에 반대했습니다.
“나는 이 아프리카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토인들은 병이 들어도 의사가 없어서 그대로 죽어갑니다. 상처를 입어도 치료할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더욱 비참한 것은 토인들이 노예로 매매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나쁜 환경과 습관을 내가 가서 바로잡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것이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나 혼자서라도 오지로 가서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겠습니다.” 그의 결심은 굳건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만나서 결혼한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오지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목적지는 죽음의 사막이라는 칼라하리 사막 북쪽에 있는 느기미라는 호수 부근입니다. 30명의 토인들이 30마리나 되는 소를 끌고 뒤를 따랐습니다. 가도가도 끝없는 사막, 무서운 사막의 맹수들,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모래바람, 타는 듯한 갈증, 이 모든 악조건으로 인해 사막 기후에 익숙한 토인들마저 기운을 잃고 쓰러져 갔습니다.
리빙스턴 일행은 온갖 고생 끝에 2개월만에 칼라하리 토인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일행은 그곳에서 저마다 타조알 한 개씩 받아들고 그 속에 있는 물을 마시고는 기운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칼라하리 토인들은 물이 없는 곳에 살고 있었으므로 물을 가장 소중하게 간수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적의 습격으로부터 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물을 타조알에 채워 땅 속에 묻어둡니다.
이 마을의 여자들은 타조알에 물을 채우는 것이 가장 큰일이었습니다. 축축한 땅을 찾아 보릿대처럼 생긴 풀줄기를 땅에 꽂고는 입으로 물을 빨아 올려서 타조알 속에 채워 넣는 데 세 시간이나 걸립니다. 리빙스턴은 이런 불편한 생활을 조금이라도 개선시켜 주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에게 신앙심을 갖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천막을 치고 곧 환자를 치료하면서, 토인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도 금방 토인들과 사귈 수 있어서 그들을 의심하던 토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열병에 걸렸을 때 토인들이 다 함께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모습을 본 리빙스턴은 하나님의 존재조차 몰랐던 야만적인 토인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고생을 무릅쓰고 온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착한 마음을 그들 마음 속에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 후, 리빙스턴은 목숨보다 사랑하는 딸을 열병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많은 그는 슬픔을 몰아내고 다시 일어나서 칼라하리 사막을 지나 더 북쪽에 있는 마콜롤로라는 마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아프리카의 진기한 식물이나 동물, 토산물 등에 대하여 자세히 관찰, 조사하면서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마콜롤로에 도착했습니다. 리빙스턴 일행은 그곳에 짐을 풀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탐험을 계속했습니다.
1851년, 그는 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잠베지 강을 발견하여 강의 모양과 너비, 깊이 등을 기록하여 영국으로 보냄으로써, 당시 아프리카의 지도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공으로 영국 지리학 협회로부터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 어디에든지 노예 상인들의 손이 뻗쳐 있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리빙스턴이 거주하고 있는 마콜롤로에도 노예 상인들의 손이 뻗쳐 있었습니다. 토인들은 포로로 잡아온 노예를 팔아서 그 돈으로 총을 사들였습니다. ‘노예 매매를 그만두게 하려면 먼저 문명국의 물건을 손쉽게 얻도록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오지에서 해안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뚫어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의 생활 수준도 높아질 것이고, 또 편해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리빙스턴은 오지에서 해안으로 직접 나갈 수 있는 지름길을 탐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길만이 아프리카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자, 그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탐험길에 올랐습니다. 이번 여행은 도중에 야만인이나 맹수에게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는 유언장을 써 놓고 떠났습니다. 서해안을 향해 나아가던 리빙스턴은 도중에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고열이 계속되어 음식을 삼킬 수 없었기에 그는 눈에 띄게 야위어 갔습니다. 그는 소 잔등에 엎드려 비를 맞으면서도 “서해안, 서해안으로!” 하고 계속 일행을 재촉했습니다.
리빙스턴 일행이 치보크 마을을 지나가려 할 때 그 마을의 토인들이 일제히 창을 들고 나와서 일행을 막아섰습니다. 마을을 지나가려면 두 사람의 토인을 두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리빙스턴이 강경하게 거절하자 토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창을 쳐들었습니다.
리빙스턴은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는 토인 대신 소 한 마리를 주겠다고 제안하여 다행히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러나 리빙스턴을 따라온 토인들은 소가 아까워서 차라리 자신들이 노예로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리빙스턴은 “너희들의 목숨을 잃고 싶지 않다. 너희들 모두의 목숨과 자유를 지켜야 한다”라고 말하며 그들을 끝까지 지켜주었습니다. 그러한 리빙스턴이었기에 토인들은 그를 ‘빠빠(:추장에 대한 경칭)’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에도 사나운 토인들의 많은 방해와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모든 것을 이겨내고 드디어 바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오지에서 서해안으로 나가는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리빙스턴이 마콜롤로를 떠난 지 반년만인 1854년에야 포르투갈의 식민지 항구 루안다에 도착했습니다. 쇠약해진 리빙스턴은 영국 군함으로 옮겨져 간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몸이 완쾌되자 그는 여행 중에 조사해온 지리, 동물, 식물, 그리고 각 지방의 토산물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영국으로 보냈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노예매매를 금지하도록 힘을 써 달라고 편지도 써 보냈습니다.
다시 마콜롤로 마을로 돌아온 리빙스턴은 이번엔 동해안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서해안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고 사나운 종족들이 있기에, 토인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다시 여행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토인들은 그들의 빠빠가 이토록 자신들을 위해 걱정해 주는 것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리빙스턴은 “행복의 빛은 동쪽에서 비친다는 말을 굳게 믿고 탐험을 할 것이오” 라며 동해안을 향해 몇 명의 일행과 함께 출발했습니다.
도중에 일행은 토인들이 일컫는 ‘소리내는 연기’가 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토인들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연기 가까이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무서운 요술쟁이가 살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연기가 되고 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연기의 정체는 바로 너비가 1700미터나 되는 엄청나게 큰 폭포였습니다.
리빙스턴은 이 폭포에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일행은 다시 강을 내려가 5개월 후에는 동해안에 도착하여 마침내 아프리카 대륙 횡단에 성공하였습니다.
-빅토리이 폭포 (짐비아)-
리빙스턴은 다음 탐험 준비를 위하여 일단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영웅이며 아프리카의 성자이신 리빙스턴 만세!” 영국 국민들은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그를 환영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를 불러서 칭찬의 말과 함께 명예훈장을 내렸습니다.
글래스고 대학에서 그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습니다.
대학에 나타난 리빙스턴을 본 회중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멋진 건강한 청년이었던 그의 모습을 지금은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몹시 쇠약해 보였습니다.
아프리카의 원시림에서 사자에게 물리기도 했으며,
심한 열병으로 스무 번이나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학위를 받은 리빙스턴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 아프리카에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을 하자 모두 놀랐습니다.
극심한 고생이 기다리는 아프리카에 그가 다시 돌아가리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중들은 술렁대기 시작합니다.
리빙스턴은 주위를 둘러본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나의 길동무가 되어 원시림과 광야를 함께 걸어가 주십니다.
그러니 내게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이후, 나일강의 수원지를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탐험하던 리빙스턴은 폐병을 얻어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리빙스턴이 나일강 수원의 탐험에서 최후를 맞았을 때, 토인들은 사랑하는 빠빠 리빙스턴의 주검을 미이라로 만들어, 9개월 동안의 험난한 모험길을 무릅쓰고 동해안의 영국 영사관으로 운반하였습니다.
리빙스턴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작은 예수의 삶은 그곳 미지의 아프리카에 한알의 밀알이되어 오늘날 아프리카에 풍성한 그리스도의 열매가 맺어진 것입니다.
'기독교 > 간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윤정 사모(마리아 콩쿠르 우승, 스위스 베른 극장 오페라 주역) 간증 (0) | 2016.02.23 |
---|---|
북한 억류 임현수 목사 어둠의 땅에서 빛이되소서! 기도를!! (0) | 2016.02.23 |
마리아칼라스 콩쿠르 우승 - 이윤정 집사 (0) | 2016.02.22 |
동아리서 시작한 순결서약 3년만에 학교행사로 (0) | 2016.02.19 |
영화 일사각오 예고 2분 45초 버전 - 주기철 목사 신사참배 순교 (0) | 2016.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