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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와 하나님 -소설가 박계주가 처음 기사화

배남준 2018. 3. 13. 21:16



 
 

유관순 열사(1902~1920)의 만세운동 및 순국 사실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건 해방 후 2년이 지난 1947년 2월 28일이었다.

소설 ‘순애보’로 유명한 박계주씨(사진)가 3월 1일을 하루 앞두고 한 신문에 ‘순국의 처녀’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이 계기가 돼 같은 해 8월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되고, 이듬해 영화 ‘유관순’이 만들어진 것이다.

“1920년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밤 아홉시가 지나 감방의 죄수들이 이미 자리에 누웠을 때 어느 한 감방으로부터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가냘픈 소녀의 목소리었다.”

박씨의 ‘순국의 처녀’는 유 열사의 옥중 만세운동 모습부터 시작된다. 이어 유 열사를 “고등법원에서 칠년 언도를 받고 감방에 끌려 들어온 16세의 소녀였다. 그는 일찍이 충남 논산 지방의 한 농가에서 자라난 유관순이라는 소녀로 한해 전인 기미년(1919년)에는 서울 이화고등여학교 일학년생이었다”고 소개했다.

박씨의 글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었다. 그는 처음 유 열사 고향을 논산으로 알았으나 6개월 후 유 열사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린 때는 천안으로 바로 잡았다.

천안향토사학자 임명순씨는 지난 23일 이같은 ‘유 열사 첫 발굴 소개’사실을 독립기념관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했다.

임씨는 “대한민국 최초 국어교과서를 제작한 박창해씨가 회고의 글에서 46년 유 열사 조카인 유제한씨에게서 ‘우리 집안에 3.1운동으로 옥살이한 이화학당 학생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지만 정작 일반에 알려진 건 박씨의 이 소설같은 기사를 통해서였다”고 밝혔다.


박씨는 고향 천안에 내려온 유 열사를 잔다크에 비유했다. “그는 올루레안의 소녀 짠·따-크와 같이 밤을 밝혀 하느님에게 기도를 올렸다. ‘저로 하여금 하느님이어 조국을 위해 나서게 해주소서. 조국을 위해 피 흘릴 수 있고 목숨을 바칠수 있는 광영을 입게 해주소서.’ ”

이후 유 열사는 아우내만세시위를 이끌다 일제에 잡혀 고문을 당한다. 주동자를 캐는 질문에 계속 자신이라고 대답하자 일제 경찰이 “소녀의 목전에서 그들은 소녀의 아버지를 총살하였다”. 부모 순국 내용도 이후 만세시위 현장에서 순국한 것으로 바로잡혔다.

박씨는 유 열사 마지막 순국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왜놈들의 복수는 소녀의 육체를 여섯 토막으로 꺾어서 석유궤짝에 담아 놓은 것이었다. 이것을 안 이화고녀 회계 월쳐양은 자기가 친히 감옥을 찾아가 시체 양도를 강요했다…시체는 석유 궤짝에 닫친체 정동예배당에 옮겨와서 경관 입회하에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마에는 교장 푸라이양이 올려 놓아준 흰꽃이 있었고 가슴에는 성서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박씨의 유 열사 이야기는 같은 제목으로 48년 1월 문교부 중등 국어책(1학년)에 실렸다. 같은 해 3월엔 유 열사 최초 전기인 전영택의 ‘순국처녀 유관순전’이 출간됐다.



◇ 3·1절=해방 다음해부터 경축일로 지정됐다. 미군정청은 1946년 2월 21일 이승만, 김구 등 남한 각 정당지도자로 구성된 재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民主議院) 결의를 받아들여 경축일로 공포했다. 국경일 지정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인 49년이었다.

  조한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