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신앙칼럼,뉴스,시,그림

2차대전 영웅/데즈먼드 도스의 기독교적 희생 영화화' 핵소 리지'

배남준 2018. 3. 13. 13:22

 

 

멜 깁슨이 감독한 "핵소 리지"의 실제 주인공인 데즈먼드 T. 도스에 대한 이야기.


  오키나와의 대천사 데즈먼드 T. 도스 이야기

 

 


데즈먼드는 안식교 신자로 양심적 집총거부자여서 의무병 교육을 거친 후 42년에 배치,

44년에는 괌과 필리핀 전투에서 사격받는 부상자를 달려가서 살린 공로로 동성 훈장을 받음.

그리고 45년 4월 29일부터 77 보병 사단 307 보병연대 1대대 B 중대 2소대 소속 의무병(일병)으로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됨.



5월 2일 데즈먼드는 마에다 고지에서 중화기와 박격포에 노출된 전선 앞으로 200야드 뛰어나가 부상자를 구출함.

5월 4일에는 중화기로 무장한 일본군 동굴 진지를 공격하다 쓰러진 4명을 구하기 위해 적군이 수류탄을 계속 던지는 동굴 입구로 들어감. 

그리고 적으로부터 8야드 앞까지 접근해 부상자 응급조치를 한 후 한 명씩 업고 나옴. 4번(!) 왕복했다는 소리.

5월 5일 데즈먼드는 중포와 소화기 사격을 뚫고 다친 포격 관측 장교에게 붕대를 감아 준 후 소화기 엄호가 되는 곳으로 끌고 감. 

그리고 중포와 박격포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침착하게 장교에게 혈장을 수혈해줌.

또 적군으로부터 25피트 떨어진 곳까지 접근해 부상자에게 응급조치를 하고 안전지대까지 100야드를 끌고나옴.

[핵소고지] 영화와 뒷 이야기

 

 


그러나 가장 극적인 순간은 같은 날 B중대가 마에다 고지(절벽)를 점령할 때였음.

B중대가 공세에 성공하여 정상에 올라서자마자 일본군의 중포 박격포 기관총 등 집중포화가 쏟아져

중대원 중 약 약 75명이 부상당해 그자리에 쓰러져 버리고 나머지 55명은 겨우 자력으로 절벽 밑의 기지로 패퇴함.


패퇴한 아군들이 부상당한 전우들의 신음을 들으며 할수없이 절벽 위만 쳐다보고 있는 순간

절벽 위에서 데즈먼드가 나타나 부상자 한명을 줄에 묶어서 내려보냄.

데즈먼드는 절벽 위에서 후퇴하지 않고 쓰러진 부상자 한명 한명에게 응급처지를 하고 있었던 것.


일본군 포격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지만 데즈먼드는 개의치 않고 엄폐하라는 지시도 무시하며 부상자 하나하나를 절벽 끝으로 붙잡고 끌고 간 뒤 줄에 묶어 아군 지대로 내려줬음.

심지어 동굴에서 기어나온 일본군들이 착검돌격과 조준 사격으로 데즈먼드를 죽이려고 했으나 데즈먼드는 부상자를 응급조치 후 절벽 끝으로 데려가는 일에만 집중했고

데즈먼드가 끌고가는 부상자가 데즈먼드를 노리는 일본군들을 처치해줬음.



이걸 무려 5시간에 걸쳐 75번을 함.



그날 밤 A. D. 브루스 장군은 77 보병사단 본부에서 일선으로 직접 나와 공훈 보고를 들었고 즉시 명예훈장 추천서를 올림.



데스먼드의 후송 역시 영웅다웠는데,

5월 21일 슈리 고지 야간 전투에서 데즈먼드는 일본군으로 오인되어 사살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개활지에서 응급조치를 해주면서 뛰어다님.

한 구덩이에서 세명의 다른 군인과 함께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일본군 수류탄이 한 가운데 떨어졌음.

다른 세명은 피했지만 데스먼드는 너무 늦게 움직여서 하반신에 심각한 타박상을 입음. 

데즈먼드는 다른 의무병을 부르는 대신 자기가 자기 상처에 붕대를 감고 해가 뜰 때까지 5시간을 혼자 기다림.

그리고 들것이 오자 들것에 타고 후송이 되는데 후송 되던 중 더 심한 부상자를 보곤 들것에서 내림. 그리고 더 심한 부상자를 들것에 들려보낸 후 들것이 다시 오기를 기다림.


들것을 다시 기다리는 와중, 데즈먼드는 부상병을 한 명 더 만나서 두명이서 의지하며 퇴각하기 시작함.

서로 기대가며 퇴각하는 와중 총성이 울림.

일본군 저격수의 총알이 데즈먼드의 손목과 팔을 관통한 후 부상당한 동료의 어깨에 박혔던 것.

(데즈먼드가 저격수 총알을 맞지 않았으면 동료 목에 총알이 박혔을거라고...)

데즈먼드는 동료의 소총을 빌려서 부목으로 쓴 후

동료와 함께 기어서 안전지대로 탈출함.



데즈먼드의 팔과 다리에는 17개의 파편이 박혀있었고 

데즈먼드는 병원선에서 치료를 받다가 귀향하게 됨.



데즈먼드는 고향에 돌아와서도 구조 활동에 힘씀.

명예훈장 수여자 중 생존자들에게는 1965년 미의회에서 매달 100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는데,

데즈먼드는 그 돈과 자신의 수입 일부를 가지고 자신이 살고 있는 조지아주 워커 카운티 민간인 구조대 설립에 재정적인 지원을 함.

워커 카운티 민간 구조대는 창립 다음 해, 가스가 가득 찬 동굴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7명의 보이스카웃과 보이스카웃 대장을 구해내는 성과를 올림.

해당 구조 작업 때 데즈먼드는 남들보다 몇시간이나 더 수색에 참가했다고 함.

귀향하고 나서도 전쟁 때 필리핀에서 얻은 결핵으로 인해 데즈먼드는 여러번 사경을 해멨지만 아내 도로시의 지극한 간호로 항상 극복해냄.

하지만 91년 11월 17일에 교통사고로 아내가 죽었고 데즈먼드 옹도 06년 3월 23일에 타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