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
‘해안 선교시대에서 내지 선교시대의 문을 연 선교사, 중국 선교의 아버지, 중국 내지선교회 설립자, 믿음으로 사역했던 선교사’ 등으로 불리는 허드슨 테일러는
1832년 5월 21일 영국 요크셔 지방의 경건한 감리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부모는 주님께 그를 서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적 분위기와 가족의 기도 가운데 성장하다 17세에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18세부터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으며, 수련 기간 중 가난과 영양실조, 악성 열병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사는 훈련, 자기 부인의 신앙적 태도,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의 열정 때문이었다. 21세에 중국으로 향하여 1854년 이른 봄, 상해에 도착한 그는 중국 복음화 선교회 소속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상해에 도착할 때는 태평천국의 난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도여행을 해야 할 정도로 대단히 어려웠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도 10회 이상이나 용기와 인내심을 가지고 전도여행을 감행하였다.
당시는 대부분 선교사들이 해안에서만 선교했던 상황이었기에, 내륙으로 들어간 그의 시도는 놀랍고 새로운 것이었다. 내륙의 중국인들이 외국인인 자신의 복장과 외모를 보고 이상히 여기자 중국식의 변발과 복장을 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많은 동료선교사와 고국인 영국으로부터 우등민족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비난을 받았고, 미친 사람이라는 놀림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영혼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많은 영혼을 전도할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의 변화는 즉각적으로 선교 사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많은 중국인이 그를 집으로 초대하고 복음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다가왔다. 그는 가는 곳마다 날씨와 환경,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오해, 강도의 위협을 받았으나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주님의 손길을 의지하고 기도로 나아갔다.
그 후 후원이 부족한 중국 복음화 선교회와 어려운 관계를 갖게 되어 1857년 정식으로 탈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들이 나중의 그의 사역과 선교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후 영파에서 그는 마리아 다이어와 결혼하게 되었고, 그해 여름에 천진 조약이 조인되어 마침내 내륙지방에 전도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사역하는 가운데 외국인 학살 계획이 세워져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의료사역을 중심으로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헌신적으로 사역했다. 하지만 사역을 하는 가운데 자신의 의학 지식의 한계를 느끼고 의학 공부와 함께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고자 장기 휴가를 받아 1860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중국인 조수를 데리고 가서 닝포 신약전서의 개역판을 만들었다. 이 휴가 기간 중 “중국내지 선교회”가 탄생하였다.
이 중국 내지 선교회는 어느 교파에도 속하지 않으며 노동자 계급 출신들이 주로 사역했고 타 단체와의 경쟁은 피하며 선교본부는 중국 본토에 두었다. 재정에서는 누구의 도움도 기대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리는 방법이었다. 교단 파송 선교사밖에 없던 시절, 그리고 대부분 교단과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던 시절, 교단을 벗어난 초 교파적인 단체를 세운다는 것과 ‘믿음의 선교’ 방식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무모해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철저하게 믿음으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재정을 조달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되었고, 헌금 모금으로 인해 다른 선교단체와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선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 믿음을 기초로 주체성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더 큰 사역을 펼칠 수 있었다. 중국 내지선교회를 창설할 때 그가 당시 3억에 달하는 모든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해 중국 전역을 복음화하겠다는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세운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만약에 1,000명의 복음 전파자를 확보한다면, 그리고 이들 각 사람이 매일 50명 내지 200명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3년 이내에 모든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중국에 교회를 세우는 데 주력하기보다는 빠른 시일 안에 중국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 후 2차 전도 여행 중 1867년 8월 사랑하던 딸 나리아 그레이스가 폐렴으로, 1870년 2월에는 다섯 살 난 아들 사무엘을 결핵성 장염으로 잃었다. 같은 해 9월 아들 노엘이 태어난 지 20일 만에 죽었고, 그로부터 13일 후에는 아내마저 32세의 나이로 죽었다.
선교회가 설립된 지 30년이 지난 1895년에는 64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중국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헌신하였다. 그의 헌신으로 북미,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호주, 뉴질랜드에 중국선교회 지부가 설립되고, 이렇게 하여 한 때 중국에 모여든 선교사는 1천 명을 넘었다. 1900년 5월 ‘의화단 사건’이 전국을 휩쓸었을 때는 135명의 선교사와 53명의 선교사 자녀들이 살해되었는데 대부분 중국 내지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었다. 그중에서는 독신 여성선교사들도 많았다. 의화단 사건이 지나가고 1902년 그는 선교회 대표직을 사임했다. 73세인 그는 중국 방문 여행에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중국을 향했다. 그곳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존경심으로 영접해 주었고 어디를 가나 그를 “중국의 은인”으로 불렀다. 여러 선교 본부를 방문한 후 그는 이전에 배타적인 지방이었던 호남의 지방도시 '장사'에서 73살의 나이로 열정적인 전도자의 일생을 마쳤다. 허드슨 테일러는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았고 영혼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고, 전도의 목표를 위해 언어, 의학, 기도훈련을 철저히 감당하였으며, 고난과 시련을 겪으며 감당한 헌신적인 전도생활을 실천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진정한 중국 복음화의 선구자였다.
-그리스도인 카페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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