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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학기행 [김춘수] - "예수는 늘 밖에서 나를 보고 있다"

배남준 2017. 6. 10. 09:46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꽃’ 전문)

경남 통영 서호동 서피랑 마을의 명소 99계단. 이 계단 끝에서 항구 쪽을 바라보면 오밀조밀하게 밀집한 주택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꽃의 시인’ 김춘수(1922~2004)가 태어나 자란 경남 통영의 사계절은 바다로 와서 바다로 넘어간다. 한산도에서 여수로 이어지는 이른바 한려수도로 불리는 트인 바다가 아름답고 잔잔한 고장이다. 

“내 고향은 경남 통영이다.… 봄에는 바닷물이 연두색이 되었다가 신록과 함께 짙은 초록으로 바뀐다. 한려수도를 건너서 불어오는 바람은 봄에는 진달래꽃 빛을 하고 느릅나무 어린 잎사귀를 흔들어준다.”(수필 ‘향수’중에서) 

서호동 99계단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전망대 서포루. 통영 바다와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통영의 아름다움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서피랑의 99계단을 힘겹게 올랐다. 뒤돌아보니 오밀조밀하게 밀집한 주택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다의 체취를 듬뿍 담은 항구의 바람이 불어왔다. 시인은 이곳을 오르면서 몇 번이나 뒤돌아봤을까.  

“어떤 늙은이가 내 뒤를 바짝 달라붙는다. 돌아보니 조막만한 다 으그러진 내 그림자다. 늦여름 지는 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뒤에서 받쳐주고 있다.”(‘산보길’ 전문) 

시인의 어린 시절 추억들은 해안 소도시를 정경으로 한 작품 속에 꾸준히 등장해 시의 표정이 되고 소리가 됐다.  

김춘수 유품전시관 2층 내부전경


“바다가 왼종일/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이따금/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날이 저물자/내 늑골과 늑골 사이/홈을 파고/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베고니아의/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처용단장 1부’ 중에서) 

교회 밖에 핀 예수꽃  
관념을 배제한 ‘무의미의 시’ 세계를 구축해온 시인의 작품 기저에 깔려있는 ‘눈물과 슬픔’ ‘비애’ 등의 정서는 기독교 정서와 깊은 연관이 있다. 작품에 나타나는 기독교적 이미지는 주로 신이 아닌 ‘인간 예수’의 고뇌와 희생이 보편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돼 기독인이 아닌 시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와 관련된 시인의 시가 단순한 신앙심을 노래한 차원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 받는다. 

“김춘수 시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예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예수에 관하여 일반 기독교인보다도 더 심도 있고 밀착된 관찰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그가 쓴 수필과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시전집을 보면 그는 80평생을 사는 동안 60여 년간 약 1000여 편의 시와 수백편의 수필을 발표했다. 그중에 35편의 시와 17편의 수필이 예수와 관련된 것이다.”(민영진의 ‘교회 밖에 핀 예수꽃’ 중에서) 

그는 예수에 관한 연작 수필 열두 편을 묶어 ‘내 속에 자리한 예수’라는 제목을 붙였다. 예수에 관한 수필이 몇 편 더 있다. ‘나를 스쳐간 그’라는 세편의 연작 수필 역시 그가 예수를 만난 사건을 고백적으로 쓴 것이다. 

시인은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는 미션 유치원에 다녔으며 독실한 침모 할머니를 따라 예배당에 더러 간 일이 있다. 충무교회 설립 및 호주선교 100주년 기념탑'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교회는 진명여학교, 문화유치원, 보건진료소를 설립…선교사들의 신앙훈련과 근대교육을 통해 종교 정치 경제 문화 경제계에 걸출한 인물들을 다수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는 유치환 박경리 김춘수 김상옥 윤이상 공덕귀 여사 등이 있다.” 

그는 유년시절 성탄절 때 교회에서 아기 천사의 그림을 보고 ‘그 아이가 예수다’하는 소리의 울림을 들었다.(수필 ‘나를 스쳐간 그 1’) 이때 감상을 ‘천사’란 시에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그것은 처음에 한 줄기의 빛이었다/느릅나무 가지에 앉더니/수천 수만의 빛줄기로 흩어지면서/멀리 한려수도로까지 뻗어가고 말았다/그 뒤로 내 눈에는 아지랑이가 끼이고/내 귀는 자주 자주 봄바다가/기슭을 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천사’ 전문) 

시인이 평소 사용했던 낙관과 도장


이후 시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예수의 시선을 항상 느꼈다고 말한다. 

“예수는 늘 밖에서 나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게 던져지는 하나의 시선이며 누가 역사와 양심을 말할 때 그 시선이 나타나기도 한다.”(수필 ‘나를 스쳐간 그 2’ 중에서)

시인이 세 번째 예수를 만난 것은 일본 유학시절 일본 천황과 총독을 비판하다가 선동 학생으로 몰려 헌병대 감방에서 취조를 받을 때였다. 그는 고문이 무서워 거짓 자백을 했을 때 십자가에서 고통을 끝까지 감당한 예수를 만났다고 수필에서 밝혔다.  

“이럴 때(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했을 때) 우리는 예수가 하나의 차원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예수가 왜 그리스도가 되었는가를 알게 되고, 왜 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도 알게 된다.…이런 패배적 처지를 실감하게 될 때 예수는 나를 스쳐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만이 그것을 할 수 있었다고”(수필 ‘나를 스쳐간 그 3’ 중에서) 

나의 하나님은 연두빛 바람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늙은 비애다/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시인 릴케가 만난/슬라브 여인의 마음속에 갈앉은/놋쇠 항아리다/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또 죽지도 않는/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순결이다/삼월에/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연둣빛 바람이다.”(‘나의 하나님’전문)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은 현대시론 강의에서 은유의 예를 제시 할 때 많이 인용되는 시 중 하나이다. ‘늙은 비애’라고 표현되는 하나님의 슬픔은 장구한 세월 속에 누적된 슬픔일 것이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인 하나님은 자기 살을 아깝지 않게 분배해 희생을 불사하는 하나님이며, 놋쇠 항아리처럼 속이 깊은 인내로 기다리는 분이다. 찔림과 상함과 온갖 멸시, 손바닥에 못을 박아도 죽지 않은, 옷을 벗겨 조롱해도 오히려 순결한 사랑을 하는 하나님이다. 오직 하나의 희망인 하나님이다.

그는 만석꾼의 집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냈다. 경남 통영시 통새미길 373-2에 생가 표지석이 있다. 현재 다른 이가 살고 있는 생가 철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니 고요한 마당이다. 
그는 1939년 경기공립중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40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졸업은 못했다. 42년 일본 천황과 총독을 비판하다 경찰에 붙잡혀 퇴학조치를 당하고 요코하마와 도쿄의 유치장에서 7개월을 보내야했다. 이 경험이 관념을 배제한 시들을 쓰는 데 결정적인 동기가 됐다. 이후 통영중학교와 마산중학교 교사, 경북대학교와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81년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 및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 선출됐다. 한국시인협회상과 자유문학상·대한민국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문화훈장(은관) 등을 수상했다.

나는 왜 시인인가  
김춘수 유품전시관은 통영시가지와 통영항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봉평동에 있다. 통영시가 2008년 옛 한려행상국립공원 동부사무소 건물을 리모델링해 개관했다. 유품 전시관에는 육필원고 126점과 서예작품, 생전에 사용하던 가구와 옷가지 등 유품이 전시돼 있다. 특히 전시관 한쪽엔 생전에 기거하던 비슷한 형태로 김춘수 방을 꾸몄고 나머지 공간에는 옷가지와 책, 평소 쓰던 소지품 사진 등을 전시해 시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육필원고와 지우고 또 지우면서 쓴 습작노트에서 시인의 고뇌와 숨결이 느껴졌다. 

김 시인은 46년 광복 1주년 기념 시화집 ‘날개’에 시 ‘애가’를 발표했으며, 대구 지방에서 발행된 동인지 ‘죽순’에 시 ‘온실’ 외 1편을 발표했다. 48년에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내며 문단에 등단한 이후, ‘산악’ ‘사’ ‘기(旗)’ ‘모나리자에게’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생가 표지석


50년대 당대 시인들이 서구 모더니즘에 경도되던 그 시절에 그는 주저없이 릴케 류의 상징주의 시 정신을 받아들여 우리 문단의 협소함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 무렵 그가 지향한 문학적 이데올로기는 ‘절대 순수'였다. 투쟁보다 화해, 고통보다 안정, 탐구보다 신앙을 희원했다.

그는 수필 ‘왜 나는 시인인가’에서 존재하는 것의 슬픔을 깊이깊이 느끼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나는 시인이라고 답한다.  

“사람으로 태어난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깊이깊이 느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시인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점에 있어서 많이 부족하다. 그것을 솔직히 남 앞에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시인이다.” 

기념관을 빠져 나올 때 교회 밖의 시인이 교회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방문객을 배웅했다. “시편의 남은 구절은 너희가 잇고/술에 마약을 풀어/아픔을 어둠으로 흘리지 마라/살을 찢고 뼈를 부수어/너희가 낸 길을 너희가 가라/맨발로 가라,찔리며 가라”(시 ‘못’ 중에서) 

[김춘수처럼 생각하기]  
“하나님의 말씀이 평생 내 마음을 우볐다” 



“구름 위 땅 위에/하나님의 말씀/이제는 피도 낫설고 모래가 되어/한줌 한줌 무너지고 있다/밖에는 봄비가 내리고/남천이 젖고 있다/남천은 머지 않아 하얀꽃을 달고/하나님의 말씀 머나먼 말씀/살을 우비리라/다시 또 우비리라”(시 ‘땅위에’) 

시인 김춘수(사진)는 교회 밖에서 거주하는 사람이었지만 교회 안에 상주하는 사람 이상으로 기독교적인 사색과 고뇌를 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평생 자신의 마음을 우볐다고 말했다.

“‘땅 위에’라는 시에서 나는 그 두려움과 그 아픔을 드러내 보려고 했다. 그 두려움과 그 아픔을 견뎌낸 사람의 말씀은 또한 한없이 두렵고, 간혹은 아픔으로 다가온다. 가슴을 우빈다…하나님-예수의 말씀을 늘 저버리고 있으면서 간혹은 그 말씀들이 몸의 어딘가를 우비기도 한다. 그때 나는 또 예수의 손바닥에 박힌 못이 생각나서 몸서리가 쳐진다. 나는 도저히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그런데 어느 날 그(예수)가 왜 나를 스쳐갔을까?”(수필 ‘못’ 중에서) 

죽어서도 가난한자를 찾아 위로하는 예수를 그린 그의 시는 우리들의 가슴을 우빈다. “너무 달아서 흰빛이 된/해가 지고, 이따금 생각난 듯/골고다 언덕에는 굵은 빗방울이/잿빛이 된 사토(砂土)를 적시고 있었다/예수는 죽어서 밤에/한 사내를 찾아가고 있었다/예루살렘에서 제일 가난한 사내/유월절에 쑥을 파는 사내/요보라를 그가 잠든/겟세마네 뒤쪽/올리브 숲 속으로, 못 박혔던 발을 절며/찾아가고 있었다/…안심하라고,”(시 ‘요보라의 쑥’ 전문) 

예수가 못 박혔던 발을 절며 빈자의 상징인 요보라를 제일 먼저 찾아간 이유는 ‘안심하라, 쑥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란 말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통영=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