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신앙칼럼,뉴스,시,그림

'지선아 사랑해' 그후 - 한동대 교수로

배남준 2017. 6. 8. 13:24



Why][김윤덕의 사람人] 이지선의 '인생 2막'

  • 김윤덕 기자


 

그날 이후 10년…거울을 보고말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자신을 홀라당 타버린 여자라며 킥킥 웃는 그녀…7중 추돌사고, 살아난 게 기적
이식수술 30번… 더 이상 갖다 쓸 피부가 없다

뉴욕 국제마라톤…이식한 피부엔 땀구멍도 없는데
주저앉아 울며 뛰며 7시간…다리를 질질 끌며 결승선에

해지기 전 사진부터 찍는다고 도산공원으로 나서자, 사람들 몇이 몰려들었다. "이지선씨 아니세요? '지선아 사랑해'에 그 지선이?" 수줍은 듯 반가운 표정으로 이지선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참 예뻐졌네." 지선씨가 혀를 쏙 내밀며 "감사합니다" 한다. "이지선 씨를 어떻게 아느냐" 묻자, 일행의 리더로 보이는 한 남자가 대답했다. "아이고, 왜 몰라요. 우리들 희망인데요, 희망!"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저 없이 '희망'으로 불리는 여자. 국가대표 운동선수도 아니고, 유명한 영화배우도 아닌데 수천 명의 팔로어(follower)를 몰고 다니는 이 트위터리안의 정체는, 자신을 '홀라당 타버린 여자'라고 말하며 킥킥 웃는 이지선(32)씨다.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0년, 만취 운전자가 낸 7중 추돌사고로 그녀는 얼굴을 포함한 전신 55%에 3도의 중화상을 입었다. 살아 숨 쉬는 게 기적이라고 했고, 살아남았다 한들 까맣게 타서 일그러진 얼굴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주위의 탄식과 절망을 자아냈다.

하지만 기적처럼 그녀는 살아났다. 그것도 환하게 웃으면서. 사고 후 처음으로 쓴 글에서 그녀는 '모든 걸 잃은 것 같지만, 살아 있어서 흰 눈도 보게 하시고, 추운 겨울을 다시 맞게 하시니, 나는 축복 받은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이후 이지선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메신저가 되었다. 사고가 일어난 지 1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지선의 홈페이지(www.ezsun.net)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희망을 얻고 위안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한국은 물론 미국, 일본에서도 강연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 이지선의 힘은 어디에서 샘솟는 것일까.

2004년 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보스턴대학에서 재활상담학 석사를, 컬럼비아대학에서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올가을부터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한국YWCA가 선정한 '젊은 지도자상'을 받으러 서울에 온 길이다. 그녀는 유머가 많았다. "연애는 안 하느냐"고 묻자, "이제 '지도자'도 되었으니 하나님도 (남자를) 주실 때가 된 듯한데 아직 아무 기별이 없다"고 해서 웃음이 터졌다.

"삶은, 선물입니다." 단풍으로 물든 서울 도산공원에서 이지선씨를 만났다. 그는“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이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돈 주고는 절대 살 수 없는‘보물’을 얻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한 번 주어지는 인생, 그에게‘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보다는, 무언가에‘어떻게’맞섰고‘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그러니까 힘내세요 여러분!”/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30여 차례의 이식수술, 떼낼 살이 없다

―사고 난 지 10년이 지났고, '지선아 사랑해'라는 말도 이제 구문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왜 여전히 사람들은 당신의 근황을 궁금해할까.

"내가 대단한 사람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처럼, 이웃처럼 그냥 자연스럽게 소식을 궁금해하는 게 아닐까. 내가 처음 알려진 10년 전 그때 그 모습으로 멈춰 있지 않고 계속 무언가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꿈을 향해 조금씩 걸어가고 있다는 점도 그분들을 기쁘게 하는 것 같다."

―트위터에는 어떤 글을 올리나?

"소소한 일상. 아침에 학교 가면서 떠오른 생각, 새로운 날에 대한 감사, 수업 들어가서 교수님께 핀잔 듣고 너덜너덜해져서 힘들었다는 투정도 쓰고. 페이퍼 잘 썼다고 칭찬받은 날엔 또 신나서 자랑하고 그런다."

―아까 그 아주머니 말씀대로 정말 예뻐졌다.

"내가 생각해도 많이 좋아졌다. 그래도 여전히 다리는 굵어서 신경이 쓰인다. 의사선생님은 이식수술에 쓸 피부가 많다고 내 굵은 다리를 좋아하시지만.(웃음)"

―지금도 계속 이식수술을 받고 있나.

"최근엔 7월에 했다. 목 아래쪽. 이식한 피부는 신축성이 없다. 이식한 피부가 옆 피부를 당기고, 그게 심하면 절개를 하고 다시 피부를 이식해야 한다. 화상을 입지 않은 다리 쪽 살을 가져다 쓰는데, 30번 넘게 수술하다 보니 더 이상 갖다 쓸 피부가 없다."

―수술이 지긋지긋하겠다.

"이식할 피부를 얇게 떼어낼 땐 정말 고통스럽다. 이젠 일상이 됐다. 초반에 전신마취하고 수술할 땐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었다. 지금은 국소마취를 한다. 원래 얼굴처럼 편하진 않지만 눈도 잘 감기고, 입도 다물어지고, 발음도 잘 나온다."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할 텐데, 일반 성형을 하러 오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어떤가.

"저렇게 예쁜데 왜 오지? 그런 생각 한다. 그분들이 나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도 궁금하고. 성형하려는 분들 마음 이해할 수는 있다. 나도 수술을 통해 얼굴 기능이 회복되고 더 예뻐졌으니까. 이만하면 귀엽지 않나?(웃음)"

―사고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땐 지금처럼 태연하지 않았을 거다.

"화상으로 입이 작아져서 엄마가 숟가락을 새로 사왔는데 그 반짝이는 면에 내 얼굴이 비치더라. 수술 때문에 빡빡 깎은 머리에 빨갛게 도드라져 올라온 피부, 눈썹도 없고, 얼굴 피부는 목과 턱 아래 방향으로 당겨지는데, 영화 '스크림'에 나오는 마스크 같더라. 하지만 그게 나였다. 익숙해지려고 거울을 볼 때마다 인사했다. '안녕, 이지선!' 하면서. 어떤 사람은 괴물 같은 자기 얼굴을 보고 자살 충동을 느낀다던데, 나는 그렇진 않았다. 자꾸 보니까 나름 귀여웠다."

―원래 그렇게 낙천적이고 긍정적인가.

"예쁜 거, 화장하고 거울 보는 거 좋아하는 공주과 여학생이었던 내가 그때의 얼굴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된 것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것부터가 기적이었으니까. 절망이 너무 커서 그랬을까? '살아 있는 것만으로 축복'이라며 의연해하신 부모님 신앙이 컸다."


포기하지 않았더니 기적이 찾아왔다

―지난 여름 개정판으로 낸 '다시 새롭게 지선아 사랑해'(문학동네)를 읽어보니 사고를 낸 만취운전자에 관한 대목이 나오더라. 자신의 불행보다 가해자인 그 사람의 심적 고통을 염려하고 있던데, 진심이었나? 사고를 내고 도망치려다 경찰에 붙잡힌 사람이다.

"사고 난 날이 일요일 밤이다. 가족들과 따뜻하게 보내야 할 시간에 혼자서 소주를 다섯 병이나 마시고 운전했을 그분의 곤고하고 마른 가슴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에 비하면 내가 훨씬 낫지 않은가. 아프고 불편하지만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사고 당시 우리 가족은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할 정신이 없었다. 그냥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처럼 사고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화상치료비는 액수가 어마어마하다던데 그걸 다 어떻게 감수했나.

"가해자분이 다행히 보험을 들어놓아 큰 어려움 없이 치료를 받았다. 집도 안 팔았고.(웃음)"

―유학까지 간 것을 보고 부잣집 딸인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공무원 아버지가 무슨 돈이 있겠나. 하용조 목사님 계신 온누리교회에서 장학금을 주셨다. 보스턴 대학교에서는 학교 장학금을 받았고, 박사과정도 전액장학금으로 들어왔다. 내 책 '지선아 사랑해'를 읽어주신 독자들의 '인세장학금'도 큰 보탬이 됐다. 감사할 일뿐이다."

―지난해 11월 뉴욕에서 열린 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완주해서 결승점에 들어올 때 태극기를 날리고 있더라.

"장애인 재활병원을 짓고 있는 푸르메 재단의 홍보대사로서 참가했다. 역사가 오래된 국제대회인데, 나 말고도 감전사고로 양팔을 잃은 분, 1급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소아마비 장애인 등 한국대표 5명이 뛰었다."

―42.195㎞는 건강한 일반인도 완주하기 힘든 거리인데, 제대로 뛰긴 한 건가?

"처음 5㎞까지는 함께 병원 중환자실에 있기도 했던 장애인 마라토너 김황태씨가 속도를 맞춰 뛰어주셨는데 페이스가 너무 안 맞으니 미안해서 제발 혼자 가시라고 했다. 그분이 먼저 가시면서 그러더라. '중환자실 있을 때를 생각해. 그보다는 힘들지 않잖아?' 사람들이 막 응원하고 있으면 미안해서 좀 뛰는 시늉을 하다가 힘들면 다시 걸었다. 이식한 피부에는 땀구멍이 없고, 피부가 유연하지 않으니 달리기가 쉽지 않았다. 평소 4~5㎞도 제대로 걸어본 적 없는데."

―중간에 포기한다고 해서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잖나.

"솔직히 어느 지점에서 포기할까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30㎞쯤에선가 '지선씨 힘내세요'라는 피켓을 든 한국 여성을 보았다. 내 또래 유학생쯤으로 보였다. 내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걸 보고 급히 응원 피켓을 만들어온 거였다. 어떤 외국인 마라토너는 자기 바나나를 반으로 나눠 주면서 끝까지 뛰어보자고 하더라. 다리를 질질 끌면서 결승선에 들어왔다. 42.195㎞는 내게 불가능의 숫자였는데,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더니 기적이 찾아오더라. 출발한 지 7시간22분 만이었다."

―지난 3월에도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그 또한 푸르메재단의 재활병원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참가했다. 엄마는 '또 완주하기만 해봐라' 하며 벼르셨고 오빠도 딱 10㎞만 뛰자고 했는데, 뛰다 보니 끝까지 갔다. 40분이나 기록 단축도 하고. 하하! 서울에서 대회가 열리니 친구들도 오고, 사촌동생들도 함께 뛰었다. 뉴욕에서 혼자 뛸 때는 꼭 죽을 것만 같더니 서울에선 안 그랬다. 마라톤, 아니 우리 인생도 이렇듯 함께 뛰면 훨씬 쉽고 빠르게 달릴 수 있겠구나 싶더라."

지선씨는 음식 만들기의 즐거움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사고로 마디마디 뭉툭해진 손가락이지만 어느 유학생보다 맛있는 밥을 할줄 안다고 자랑하면서.“ 외롭고 서글픈 유학생활에 따뜻한 밥 한 그릇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르시죠?”/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열심히 공부해서 열심히 남 주려고요

―미국 유학생활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 떠났나?

"덤으로 얻은 삶, 장애인을 비롯해 사회에서 소위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보스턴 대학에서 재활상담학을 공부했는데, 내가 1대1 상담보다는 정책 분야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컬럼비아대학으로 가서 사회복지학 석사를 했고,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아 UCLA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UCLA에 우수학생 전액장학금으로 들어갔다. 공부에 재능이 있나 보다.

"전혀 아니다. 웬만해서 내가 힘들다 소리 안 하는데 공부는 정말 힘들다. 영어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원래 느리게 배운다. 어릴 때 시험 때만 되면 공부를 도와주시던 아빠가 '이 밥통아' 하고 구박하던 기억이 난다. 박사과정만 해도 다른 친구들은 논문 주제를 정해 벌써 3주째 페이퍼를 발전시켜가고 있는데 나는 주제를 계속 바꾸고 있다. 남이랑 비교하면서 스스로 불행해 하는 성격이 아닌데도, 수업시간에 앉아 있으면 내가 꼴찌라는 사실이 명백히 보여 괴롭다."

―박사과정이 등수를 매기는 게 아니지 않나.

"교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니 괴로운 거다. 더 이상 자존심 상하기 싫어 요즘엔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말한다. 용감하지 않나? 지난주엔 '폭풍공부'를 해서 페이퍼를 준비해갔더니 교수님이 칭찬하시더라. 내겐 박사과정에 들어온 것만 해도 기적이다. 이 박사 마라톤이 언제 또 끝이 날지. 열심히 공부해서 남 줘야 하는데 아직도 멀었다.(웃음)"

―미국에서도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 시선을 느끼나.

"섭섭할 정도로 무관심하다. 지금 쓰고 있는 페이퍼만 해도 내가 '장애인에 대해 갖는 사회의 인식, 태도'에 관해 연구하겠다고 하자 교수님이 이해하지 못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무슨 피해를 보고 있느냐고 되물으면서. 50년에 걸친 장애인 인권운동의 성과다."

―한국에선 그런 시선을 많이 느꼈나 보다.

"거리에만 나서면 '쯧쯧쯧' 소리가 들려왔다. 한번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내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뒤쪽에 계시던 아주머니들이 '데었나봐, 어쩌면 좋아' 하시더라.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리려고 내가 '덴 게 아니고 홀랑 탔어요, 홀랑' 하면서 히죽 웃어드렸다. 신체에 장애가 있으면 그 사람의 지능이나 능력까지 낮춰보는 시선들이 속상했다."

―지난해 6월 한국 보건복지부(장애인 권익지원과)에서 한 달간 인턴생활을 했다.

"우리나라 장애인 정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싶었다. 복지부에 편지를 썼는데 한 달 만에 답장이 왔다. 이지선이라 '특혜'를 주신 것 같다. 이런저런 회의에도 들어가고 국회에도 가봤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공무원 분들이 열심히 일하시더라. 다들 야근하시는데, '집에 가도 돼요?' 하려니 민망했다. 아, 아저씨들이 사주신 밥도 정말 맛있었다."

―인턴 할 때 이슈가 되었던 정책을 기억하고 있나.

"2008년 시행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둘러싼 개정안이 이슈였다. 국회도 그래서 따라갔고. 그때 참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법보다 중요한 것이 사회 인식인데, 우리는 정책만 앞서지 사람들 인식이 따라가지 않는다는 생각에. 장애인이 자비와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비장애인과 동일한 존엄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인식이 우선한다면 장애인차별금지법은 필요도 없는 법이다."

고난이 아니면 절대 가질 수 없는 보물

―본업은 학생인데, 강연 다니느라 더 바쁜 것 같더라.

"방학 때 수술하러 한번 한국에 나오면 강연을 한 50번 하고 들어가는 것 같다. 하루에 3번 할 때도 있다. 교회, 그리고 중·고등학교에서 요청이 많이 온다."

―강연도, 인터뷰도 지겹지 않나?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가끔은. 하지만 아직도 내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 분들, 거기서 희망을 얻는 분들이 있다는 생각에 감사하며 거절하지 않는다. 어떤 분들은 내 책을 읽으셨을 때의 마음이 되살아나시는지 손을 잡고 막 우신다. 그럴 땐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한다."

―중·고등학생들 반응은 어떤가. 까칠하지 않나?

"아니다. 강연 끝나면 여자아이들은 '안아주세요' 하며 다가온다. 남자애들은 고개 숙이고 눈도 안 마주쳐서 잘 안 듣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중에 보니 다 듣고 있더라. 외모 때문에 고민하고 성적 때문에 죽고 싶었던 자신이 부끄럽다나, 뭐 이런 편지도 보내면서. 귀엽고 사랑스럽다."

―실의에 빠진 성인들에게서도 인생 상담 요청을 많이 받을 것 같다.

"어릴 때 팔꿈치 아래를 절단하고 의수를 차고 사는데 사람들이 알게 될까 봐 두렵다면서 미국으로 가고 싶다는 남자가 있었다. 그래서 답해줬다. 남의 시선을 이기는 길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국에서 이기지 못하면 미국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라고."

―미국에서도 강연하러 다니나?

"한인교회에서 요청이 많다.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조국을 떠나왔고 나름 성공한 삶을 살지만 그 안에 서글픔이 많더라. 강연 끝나고 나면 내 손을 꼭 잡으며 고마워하신다. 실은 내가 더 감사한데. 강연하면서 나 스스로 치유가 많이 된다."

―타지에서 성치 않은 몸으로 혼자 견뎌내는 유학생활인데 향수는 어떻게 달래나.

"공부하기 싫고 가족들 보고 싶으면 음식을 만든다. 찜닭, 쌀국수, 샤부샤부…. 사고로 마디가 짧아진 이 손으로 큰 불편 없이 요리할 수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밥 한 그릇이 주는 따뜻한 위안에 기분이 좋아진다."

―지금도 그렇고, 다른 인터뷰에서도 그랬고, '감사'라는 말을 아주 많이 사용한다. 감사의 표현이 지나치면 의심이 간다.

"맞다. 조심해야 하는데. '연기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더라.(웃음) 아까도 말했지만 나처럼 밑바닥,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서 하게 됐다. 그렇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지 않나. 진짜 감사한 일들뿐인데. 땅만 보고 걸어야 했던 내가 등을 꼿꼿이 펴고 사람들과 눈 마주치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고개를 들면 하늘을 볼 수 있는 여유를 누리게 되었다. 눈을 감고 잘 수 있고, 말할 때 침을 흘리지도 않는다. 10년 전 사고 직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하지만 사람은 욕망의 동물이다. 하나에 만족하면 더 좋고 큰 것을 원한다. 작은 것에 대한 감사도 하루 이틀 아닐까.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별것 아닌 일들에 감사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일상이 되어서 그런 것 같다. 습관이란 게 원래 무섭지 않나. 하나씩 감사할 때마다 신기한 힘이 마음에서부터 퐁퐁 솟아난다. 가족들, 그리고 내 친구들도 큰 힘이 됐다. 엄마, 아빠, 오빠는 병실에 있을 때부터 내가 슬퍼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농담 따먹기가 우리의 일과였으니까. 친구들도 틈만 나면 병원에 와서 머리 감겨주고 귀 파주며 사랑을 쏟아주었다."

―그토록 감사해하는 하나님이 당신을 정말로 사랑했다면 애초 이런 사고를 피하게 해줬어야 하지 않나.

"당연히 원망했다. 통증이 심할 땐 나를 살려주셨다는 하나님이고 뭐고 다 싫었다. 그때 엄마가 하루 한가지씩 감사할 거리를 찾자고 제안하셨다. 내 발로 걸어서 화장실 간 날, 내 손가락으로 환자복 단춧구멍 하나를 채우게 된 날,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겨우 닿아 오빠를 '오까'라고 부르게 된 날 등등 '감사 찾기'를 했더니 진통제가 결코 줄 수 없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더라. 그러면서 고난 자체가 가장 큰 축복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평생 가질 수 없었던 보물들이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사랑이 얼마나 따뜻한지, 절망이 얼마만큼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기쁨과 감사는 얼마나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되는지, 내가 앞으로 마음을 쏟고 시간을 바쳐야 할 영원한 가치는 무엇인지 지난 10년의 시간이 내게 알려주었다."                                                             한미 상담 연구원 카페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