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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독일은 온통'루터' -다시 신앙의 길을 묻다

배남준 2017. 6. 8. 07:17

[종교 개혁지 탐방 (上)]  지금 독일은 온통 ‘루터’… 다시 신앙의 길을 묻다 기사의 사진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 구시청 광장에 서 있는 루터의 동상.




2017년 독일에서 가장 자주 마주칠 수 있는 이름은 마르틴 루터(1483∼1546)다. 종교개혁가 루터와 인연이 닿는 도시마다 그를 그린 초상화와 ‘500JAHRE (500년)’라고 적힌 형형색색 현수막이 화려하게 펄럭이고 있다.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문에 95개조 논제를 내건 것은 500년 전 일이지만 그의 푸른 개혁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기독교한국루터회와 함께 ‘루터 루트’를 따라 그의 발자취를 쫓았다. 

개혁가 루터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독일 작센안할트주 비텐베르크. 멀리서부터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뾰족한 첨탑이 눈에 들어왔다. 비텐베르크는 종교개혁의 불꽃이 처음 타오른 도시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대문에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논제(95 theses)’를 붙였다. 종교개혁의 문이 열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비텐베르크 성 교회 대문에는 루터의 95개 논제가 청동으로 새겨져 있다. 대문 위 그림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루터, 오른쪽에는 루터의 동지였던 필립 멜란히톤(1497∼1560)이 앉아 있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루터가 직접 설교했던 설교단이 눈에 띄었다. 설교단 바로 아래에 루터의 무덤이 있다. 

비텐베르크 성 교회는 ‘95개 논제’ 외에도 찬송가 585장과 관계가 깊다. 루터가 직접 쓴 찬송가 가사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라는 문자가 성 교회 첨탑 둘레에 새겨져 있어서다. 비텐베르크에선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대형 행사들이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 온 5명을 포함, 전 세계에서 온 220명의 자원봉사자가 활동 중이다. 

‘기사’ 루터 

튀링겐주 아이제나흐 바르트부르크성(城). 해발 400미터 언덕을 걸어서 올라가자 아이제나흐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요새와 같은 이곳은 95개 논제를 내건 후 파문된 루터의 피난처였다. 루터는 여기서 ‘융커 외르크’라는 가명을 썼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길러 기사로 위장했다.

성 안에는 루터가 머물던 작은 방이 보존돼 있다. 루터는 이곳에서 1521년과 이듬해에 걸쳐 10개월가량 머물렀다. 그는 단 11주 만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9월에 번역돼 ‘9월 성서’로 불린 독일어 성경에 힘입어 종교개혁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바르트부르크성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마귀를 향해 잉크병을 집어 던지는 루터, 지친 표정으로 성에 도착하는 루터, 95개 논제를 못 박는 루터 등의 그림도 전시돼 있다. 

아이제나흐는 루터가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다. 그가 머물렀던 루터하우스는 당시 모습 그대로 재현돼 있다. 루터는 청소년 시절 루터하우스 근처에 있는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성가대로 활동했다.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도 이곳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이 교회 스테판 쿨러(50) 목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많은 사람이 찾아와 루터와 바흐, 교회에 대해 묻곤 한다”며 “50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 축제도 가톨릭과 함께 개최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삶과 죽음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 관광안내소에서는 루터가 태어난 집과 숨을 거둔 집을 나란히 소개한 안내지도를 받을 수 있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이튿날인 11일 성 베드로·바울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현재 교회 내에는 루터를 기념하기 위한 상징이 곳곳에 마련돼 있다. 교회 앞쪽에는 침례를 위한 둥근 형태의 인공 우물이 있고 천장에는 장미로 장식된 루터 문장(紋章)이 새겨져 있었다. 벽면에는 루터의 부모와 루터 부부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성 베드로·바울 교회를 나와 구시가 쪽으로 걸어가면 루터 생가가 나온다. 지난달 24일에도 한국인을 포함한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구시청 앞 광장을 지나면 루터가 사망한 집이 나온다. 이곳 벽면 곳곳에는 루터가 남긴 최후의 말이 독일어와 영어로 쓰여 있다. “주님, 너무나 아픕니다. 오, 나는 이곳 아이슬레벤에 남을 것입니다”(1546년 2월 18일). 루터는 이날 오전 눈을 감았다. 루터가 사망한 집 바로 앞에는 성 안드레아스 교회가 있다. 교회 내부에는 루터의 흉상이 있다. ‘오직 성서’를 강조했던 루터는 이 교회에서 생애 마지막 설교를 했다.  

기독교한국루터회 종교개혁500주년 기념사업국장 원종호 목사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힘이 있었던 이유는 치열한 성서연구를 통해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라며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종교개혁”이라고 말했다. 루터의 시신은 비텐베르크에 안장되기 전까지 성 안드레아스 교회에 머물렀다. 

                                                비텐베르크·아이제나흐·아이슬레벤=글·사진 임성수 기자 joylss@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