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년, 루터의 길을 가다] [3] 아이제나흐
法外者 낙인에 도망다니던 시절… 벼랑 위 城에서 11주 만에 번역
루터 "잉크로 마귀와 싸웠다"
산 아래 마을엔 성 게오르크교회
소년 루터가 성가대원 활동하고 음악가 바흐 유아 세례 받은 곳
독일 동부 아이제나흐(Eisenach). 인구 4만2000명의 이 소도시는 도심 거리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루터 어록을 쓴 현수막이 빼곡히 걸려 있다. 그 현수막 너머로 도시 어디에서나 보이는 성(城)이 있다. 도시 남쪽 바위산 위에 우뚝 솟은 바르트부르크성(城)이다.
1521년 루터는 '도망자' 신세였다.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법외자(法外者)'로 낙인 찍힌 그를 구해준 것은 프리드리히 제후였다. 보름스에서 비텐베르크로 가면서 도중의 마을마다 들러 설교하던 루터를 납치하는 형식으로 이 성에 데려왔다. 해발 400m 높이 깎아지른 벼랑 위에 지어진 성은 천혜의 요새. 성문을 닫으면 세상과 단절되는 이곳은 '루터의 밧모섬'이었다. 사도 요한이 에게해의 작은 섬 파트모스(밧모)의 산꼭대기 동굴에서 계시록을 쓴 것에 빗대 붙은 별칭이다. 루터는 이 성에서 정수리를 동그랗게 미는 수도자의 헤어스타일을 버렸고 수도복을 벗고 수염을 길렀다.
이 성의 북향(北向) 작은 방에 10개월간 머무르면서 11주 만에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완역했다. 1521년 9월에 완성됐다 해서 '9월 성서'로 불리는 책이다. 쫓기는 몸, 고립된 상황, 루터는 이 방에서 마귀(사탄)의 환영(幻影)을 봤고 잉크병을 던져 쫓아냈다고 한다. 당시 그는 "나는 잉크로 마귀와 싸웠다"고 했다. 그렇게 완성된 '9월 성서'는 루터의 필생의 무기였다. 문맹률이 95%에 이르던 시절, 사제들이 읽어주는 라틴어 성서는 일반 신자들에겐 이해 불가능한 외계어나 같았다. 루터는 그들에게 모국어 성서를 선물했다. 당시 소 한 마리 값에 육박했다는 '9월 성서'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종교개혁의 불길도 확산했다. 성서를 읽은 독자들은 루터의 강력한 우군(友軍)이 됐다.
지난 23일 찾은 바르트부르크성은 전체가 '루터와 독일인(Luther and The Germans)'이라는 주제의 특별전 전시장으로 탈바꿈한 상태다. 루터가 당시 교황에게서 받았던 파문 예고 칙서를 비롯한 고문서들이 전시돼 있었다. 루터와 당시 교황이 줄다리기하는 모습을 그린 풍자화도 전시되고 있었다. 전시 코스 마지막은 '루터의 방'이었다. 신약을 번역한 책상 하나에 벽난로가 재현된 단출한 구조였다. 안내원은 "관람객들은 '루터가 마귀에게 잉크병을 던진 자국이 어디냐'고 묻는다"며 웃었다.
지난 23일 찾은 바르트부르크성은 전체가 '루터와 독일인(Luther and The Germans)'이라는 주제의 특별전 전시장으로 탈바꿈한 상태다. 루터가 당시 교황에게서 받았던 파문 예고 칙서를 비롯한 고문서들이 전시돼 있었다. 루터와 당시 교황이 줄다리기하는 모습을 그린 풍자화도 전시되고 있었다. 전시 코스 마지막은 '루터의 방'이었다. 신약을 번역한 책상 하나에 벽난로가 재현된 단출한 구조였다. 안내원은 "관람객들은 '루터가 마귀에게 잉크병을 던진 자국이 어디냐'고 묻는다"며 웃었다.
성문을 나서 시내로 내려오자 종소리가 들린다. 도시 중심에 자리한 성(聖) 게오르크 교회 종탑의 정오 종소리가 5분간 이어졌다. 어린 학생들이 인솔교사를 따라 교회로 줄지어 들어간다. 교회 안에는 신자 10여 명이 정오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1498년 15세 루터는 고향인 광산도시 아이슬레벤을 떠나 이 도시의 외가 친척집에 머물며 게오르크 교회 부속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의 뜻을 좇아 법률가가 되기 위해 라틴어를 배웠고, 성가대원으로도 활동했다. 교회 현관 옆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의 동상도 서있다. 이곳은 바흐의 고향이기도 하다. 바흐는 이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게오르크 교회 부속 학교에서 공부했다. 루터와는 게오르크 교회 학교 '동문'인 셈이다. 칼뱅 등 다른 종교개혁가들과 달리 루터는 교회음악을 중시했다. 직접 찬송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루터가 뿌려놓은 종교음악의 토양에서 바흐라는 열매가 탄생한 셈이다.
교회 인근엔 루터가 살았다는 집을 개조한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서는 지금 '신앙의 교사: 가톨릭의 시선으로 본 루터' 전시가 열리고 있다. 입구에선 각각 빨강과 파랑색 셀로판테이프가 끼워진 종이안경을 나눠준다. 벽면에 루터와 교황의 그림이 겹쳐 그려져 있다. 안경을 쓰고 양쪽 눈을 번갈아 뜨면 '사탄의 사도'와 '적그리스도'라는 글자가 보인다. 당시 루터파와 가톨릭이 상대를 그렇게 봤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시 기법이다. 박물관 기념품점엔 온통 루터의 이름으로 도배된 기념품들이 쌓여있다. 눈에 띄는 것은 '루터잉크'. 진짜 잉크가 아니라 에너지 드링크다. '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Hi er Stehe Ich)'는 글귀를 새긴 양말도 보인다.
게오르크 교회 스테판 쿨러(50) 목사는 "500년 전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교회 인근엔 루터가 살았다는 집을 개조한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서는 지금 '신앙의 교사: 가톨릭의 시선으로 본 루터' 전시가 열리고 있다. 입구에선 각각 빨강과 파랑색 셀로판테이프가 끼워진 종이안경을 나눠준다. 벽면에 루터와 교황의 그림이 겹쳐 그려져 있다. 안경을 쓰고 양쪽 눈을 번갈아 뜨면 '사탄의 사도'와 '적그리스도'라는 글자가 보인다. 당시 루터파와 가톨릭이 상대를 그렇게 봤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시 기법이다. 박물관 기념품점엔 온통 루터의 이름으로 도배된 기념품들이 쌓여있다. 눈에 띄는 것은 '루터잉크'. 진짜 잉크가 아니라 에너지 드링크다. '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Hi er Stehe Ich)'는 글귀를 새긴 양말도 보인다.
게오르크 교회 스테판 쿨러(50) 목사는 "500년 전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최근 100년 사이, 특히 제2차 대전 후 이 지역이 동독에 편입됐을 때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소수자였기 때문에 협력이 잘되고 있다"며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축제도 함께 열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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