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결혼신학
그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서 수도사가 수녀를 아내로 삼아 결혼한다는 일은 엄청난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루터가 개혁을 요구하는 사항 중에 하나는 사회적 변화로서 성직자가 결혼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종신 독신 서약이 성경의 교훈에 위배된다는 확신 속에서 온갖 악과 타락을 발생시킨 성직자의 독신제도를 반대했다. 또한 그는 결혼하지 않는 거룩한 성직자와 결혼으로 자녀를 가지는 세속화된 일반 신도를 나누는 역할, 즉 중세 로마 교회가 말하는 결혼관을 비판했다. 루터는 실제 가정생활을 통하여 종교개혁 신학적 새로운 인간 실존의 모습을 선언한 것이다.수도원 건물에 살면서 복음이 주는 자유를 누려왔던 루터는 세계에 성직자들이나 기독교도들은 자유하다고 주장했다. 이제 루터는 결혼을 통해서 혈육의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교황을 괴롭히고, 마귀를 안달하게 만들고 싶었다. 또한 결혼에 대해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가정생활의 모범을 보여주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결혼에 대한 신학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오래 전에 세상에 제정해 주신 제도를 로마의 독재로부터 구출하고 싶었다. 성직자들도 이 제도의 유익을 얻을 권리가 있음을 몸소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이로써 복음적 성직자들의 가정생활이 세상에 다시 있게 되었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낙원에서 제정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기적으로 존중해 주신 결혼이라는 거룩한 상태에 대해서 감사를 드렸다. 그는 결혼을 하나님의 선물이라 불렀다. 루터는 결혼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거룩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결혼하고 살도록 지으셨다고 확신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결혼하라는 도덕적 의무를 주셨다고 했다. 루터는 결혼을 하나님의 선물이며 소중한 보물이라고 생각했다. 루터는 성경적인 결혼신학을 분명히 붙잡고 있었다. 루터는 하나님 말씀 다음으로 거룩한 결혼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결혼생활이 독신 생활보다 훨씬 따뜻하고 단정하다고 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지옥과 다름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결혼에 반대하는 자들은 인간으로 사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행복한 결혼 생활보다 더 감미로운 연합은 없다”고 말했다. 당시 상황과 루터의 결혼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으로 인해 독일 사회에 새로운 개혁의 물결이 파도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1524년부터 농민들은 세속적인 권세자들에 대해 항거했으며, 수도사와 수녀들은 수도원 담을 넘어 탈주하였다. 그들이 세상으로 나옴으로서 결국 수도원들은 도처에서 텅텅 비어 있었다. 신부들의 결혼이 금지되었지만 그들은 이미 1521년부터 결혼을 감행하였다. 1525년은 루터에게 어려운 일들이 매우 많았다. 농민 전쟁의 실패와 함께 농민들의 지지를 많이 잃었을 뿐만 아니라 신변의 위험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루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1499-1552년)와의 결혼이다. 사실 ‘범법자요 이단자’여서 언제 교수형을 당하게 될지 모르는 루터에게 결혼이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 무거운 짐을 가족에게 지우기를 원치 않았다. 나이도 불혹을 넘긴 42세였다. 또한 가톨릭의 수도사였기 때문에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다. 루터는 성직자의 서약을 엄격히 지키면서 독신으로 남을까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수도원으로부터 텅 빈 생선 통 안에 숨어서 탈출한 12명의 수녀들이 있었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그때가 1523년 4월 5일이었다. 수도원 탈출은 잡히면 바로 사형에 처하는 중한 죄였다. 거룩한 강도인 루터가 탈출을 도왔다. 그 중에 한 명이 카타리나이다. 그녀는 루터를 사랑했다. 루터를 설득시켜 결혼을 고집했다. 카타리나는 1499년 1월 29일에 작센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0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독일 수녀원에 들어갔다. 1509년 16살이 되었을 때 카타리나는 마리엔트론(Marienthrone) 수도원에서 공식적인 서원을 하여 수녀로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가난했던 카타리나는 항상 두 가닥의 댕기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외모나 교양이 특출하지는 않았지만 분별력이 있고 지적이었다. 루터보다 16살 연하였지만 그녀는 루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의 사랑은 점점 자라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 루터하우스 지하실에 전시된 카타리나의 일상생활 ©뉴스파워 김현배 |
| 1525년 6월 13일 저녁에,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교회 부겐하겐(Bugenhagen) 목사의 주례로 26세인 카타리나와 블랙 수도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은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결혼은 루터에게 있어서 자신을 개혁해야 하는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루터의 사생활이 개혁된 것이다. 결국 루터는 독신을 청산하고 수녀 출신 카타리나를 아내로 맞이했다. 카타리나 역시 성직자 독신 생활의 굴레를 벗어나 진리의 자유 안에서 축복된 결혼이라는 진정한 삶을 시작한 그녀의 신학적 역할은 크고 위대했다. 루터가 결혼했다는 소식이 비텐베르크에 유포되면서 그 땅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결혼 소식을 믿지 않으려 했다. 또 적대자들은 결혼식이라는 그의 방종을 보면서 비방을 퍼부었다. 그가 정절 서약을 파기했다고 험담했다. 루터는 적대자들이 자신의 결혼을 터무니없이 비방하는 것을 명예로 간주했다. 가까운 친구들은 놀랬다. 친구 슈팔라틴은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라고 말하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곧 루터의 결혼 소식이 전 세계로 전광석처럼 날아갔다. 루터의 가정생활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의 지원으로 수도사를 위해 지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이 1522년에 해체되었다. 프리드리히는 40개의 방이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건물을 결혼한 루터 부부가 살도록 선물했다. 이곳에서 보금자리를 꾸렸던 루터와 카타리나는 총 6명, 3남 3녀의 자녀를 낳았다. 하지만 두 명의 딸을 잃게 되면서 루터는 자녀로 인한 부담감과 심적 고통을 느꼈다. 자식들의 죽음은 루터에게 있어서는 아마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는 두 명의 자녀를 잃는 아픔 속에서도 자기 일을 계속해 나갔다. 루터 부부는 자신의 아이들 외에도 다른 여섯 명의 조카들과 유럽 전역을 휩쓴 페스트로 고아 된 아이들 20여명도 같이 기르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아꼈다. 그는 자녀들 포함하여 모든 손님들까지 참석하는 가정 예배를 자주 드렸다. 루터는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개인 기도를 가졌으며, 그 후 가족들과 함께 십계명과 사도신경, 주기도문, 시편 한편을 암송했다. 루터는 정말 가정적인 사람이다. 저녁 식사 후에 루터 자신이 직접 류트(lute)와 플롯(flute) 같은 악기를 연주하며 찬송과 음악, 독일어 찬송과 라틴어 찬송을 가족과 함께 불렀다. 특히 절기들, 성탄절이 오면 아이들과 함께 기뻐하며 찬양했다. 루터는 음악을 사랑했다. 그는 음악이야말로 우울증을 몰아내고 마귀의 유혹들을 물리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생각했다. 루터는 처음에는 결혼 생활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가정생활 속에서 많은 기쁨을 누렸다. 루터는 강인하고 화를 잘 내는 반면에, 카타리나는 훨씬 더 매사에 온유했다. 그녀는 천부적으로 말을 잘했고, 남편에 대한 존경심이 많았지만 모든 일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모범적이었고, 그들은 서로 잘 어울리는 부부였고 행복했다. 교회사에서 가장 멋진 사랑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꽃을 피웠다. 루터는 결혼 생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결혼은 장난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상호 노력해야 하는 일이며, 기도해야 하는 일이다. 아내를 얻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아내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다. 결혼생활에서 조화보다 더 달콤한 것은 없으며, 불화보다 더 씁쓸한 것은 없다. 그리고 불화 다음으로 쓰라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을 잃는 일이다. 나도 그 아픔을 안다.” 루터는 아내를 존경했고 끔찍이 사랑했다. 그는 “나는 프랑스나 베니스를 다 준다 해도 카타리나와 바꾸지 않을 거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남편과 자녀들의 필요를 잘 보살피는 훌륭한 독일 주부였다. 비텐베르크의 새벽별, 카타리나 -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해 당신을 살리겠어요” ▲ 비텐베르크의 새벽별, 카타리나 © 뉴스파워 |
| 당시 루터는 대학교수였지만 개인적인 봉급은 없었다. 그는 수 많은 책을 저술했지만 인세 하나 받지 않았다. 출판업자들이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거부했다. 시 교회 설교자로서도 급여를 받지 않았다. 그는 당시 사치스런 삶을 구가하던 주교들과 추기경들과 같지 않았다. 그는 정말 가난하게 살았다. 당시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다 가난했으며, 재물을 탐하는데서 거리가 멀었다. 결혼 후 선제후 요한의 배려로 약간의 봉급은 받았지만, 그의 결혼생활을 위한 물질적인 여건은 매우 열악했다. 하지만 루터 부부는 친절하고 항상 남을 잘 대접하는 사람이어서 그의 넓은 집에는 항상 전 유럽에서 몰려온 가난한 학생들, 친구들, 개혁자들, 방문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카타리나는 대가족을 경제적으로 보살피고자 새벽부터 일어나서 가정 사역에 정성을 다 쏟았다. 그녀는 가사를 돕기 위해 수도원 건물 지하에서 맥주를 양조하면서 생활했으며, 양봉을 하고 밭을 열심히 가꿔 채소를 길렀다. 그녀는 작은 양어장도 만들고 가축 사육과 동물들을 키웠다. 특히 그녀는 돼지치기에서 많은 소득을 얻기도 했다. 그래서 루터는 아내를 친애하는 ‘돼지를 파는 여주인“이라고 칭했다. 카타리나는 고된 노동을 즐기는 여성이었고 경제에 있어서 자신의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했다. 또한 카타리나는 남편이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편안하게 해 주었다. 잔병치레가 많았던 남편을 그녀는 지극 정성으로 시중을 들었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루터가 죽을 정도로 심하게 앓았다. 카타리나는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해 당신을 살리겠어요”라며 밤잠을 가리지 않고 극진하게 간호했다. 그 덕에 루터는 다시 건강을 회복했다. 아내의 아름다운 내조 덕분에 루터는 다시 설교하고, 강의하고, 책을 쓰고, 서신을 쓸 수 있었다. 카타리나는 루터의 육적 건강뿐 아니라 그가 영적으로 낙심하고 괴로워할 때에도 그를 돕고 위로했다. 수많은 사상적 대적들을 늘 곁에 두어야 했던 종교개혁자 남편 루터에게 그녀의 따뜻하며 예리한 조언은 정금같이 귀한 것이었다. 카타리나의 상복이야기는 유명하다. 루터가 낙심하며 좌절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루터 앞에 카타리나는 상복을 입고 나타났다. 루터는 “누가 돌아가셨느냐?”고 물었다. 남편의 질문에 그녀는 “하나님이 죽으셨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루터가 화를 내면서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고 소리를 쳤다. 그때 아내가 말하기를 “만약에 하나님이 죽지 않고 살아계신다면 당신이 이렇게 좌절하고 낙심할 이유가 무엇이냐?”며 루터에게 용기를 주었다. 루터는 다시 일어나 일하기 시작했다. 카타리나는 종교개혁 이후 첫 번째 개신교 목사 부인이다. 그녀는 위대한 종교개혁자 남편을 위해 부름 받은 신실한 여종이었다. 아내로서 카타리나는 놀라운 지혜와 따뜻함, 용기, 큰 사랑을 소유하였다. 그녀는 경건하고 신실하고 헌신적인 아내였다. 의지력도 강했다. 그녀는 종교개혁자 루터의 지혜로운 조언자였다. 종교 개혁은 이 지혜로운 아내 숨은 동역자 카타리나와 함께 이루어진 신적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루터는 개신교의 아버지로서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불사조와 같은 개혁자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종교개혁이라는 전쟁터에서 아내를 통해 받은 힘과 위로를 루터는 “지상에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고 고백했다. 또한 루터는 아내 카타리나를 ‘나의 사랑하는 케테, 내 갈빗대, 비텐베르크의 새벽별’이라고 불렀다. 카타리나의 모범적인 가정생활의 모습은 여러 세기 동안 독일 가정의 모본이 되고 있다. 또한 카타리나를 통해서 제시되는 개신교 첫 번째 사모의 모습은 오늘 이 시대 개신교 목사 사모들에게 많은 감동과 도전을 던져 주고 있다. ▲ 루터부부가 살았던 루터하우스 ©뉴스파워 김현배 |
| 오늘날 이 시대에 많은 가정이 무너져가고 있다. 서부전선 이상 없지만 부부 전선에 이상이 많다. 사랑이 식어져가는 가정과 부부가 많다. 루터 부부처럼 서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수님께서 허물 많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사랑하는 부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요 13:1) .글 : 김현배 목사 (베를린 비전교회,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 뉴스파워 유럽본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