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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명 수용 천막 교회 - 죽음 문턱에서 세번 구원 받은 송재식 목사

배남준 2016. 11. 5. 06:56

  죽음 문턱에서 구원 받은 송재식 목사, 왜 세번씩이나 살리셨을까 기사의 사진

송재식 목사가 목양실에서 액자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재활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위)과 건강을 돌보지 않고 목회에 매달렸던 때(아래). 송 목사는 자신을 진흙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저는 걸어 다니는 진흙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오늘 내가 살아 있음도 모두 그분의 간섭과 섭리 아래 놓여 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죽음 직전까지 갔다 온 송재식(63) 목사의 고백록이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난달 28일 오전 11시 광주 북구 경양로 서림교회(옛 전방교회)를 찾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광주노회 소속으로 올해 창립 70주년을 맞았다. 숭실대 이사장을 지낸 고 김형남 장로가 전남방직(전방) 여종업원 10여명과 1946년에 창립한 일터(직장선교)교회다. 

어머니 생각만 해도 눈물 홍수  

목양실은 어느 초등학교 교장실 같았다. 벽엔 정용규 화백 등 교인 10여명이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송 목사는 1953년 영산강 상류 전남 장성군 서삼면 송현리 푸실(풀이 많은 동네)이라는 초가집 두 채가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솔로몬’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어머니가 일찍 하늘나라로 가시는 바람에 더 이상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장년의 목사는 금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에는 신경쇠약과 영양실조에 걸려 죽음의 골짜기를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했다고 간증했다.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내팽개쳐 두십니까.” 그러던 초겨울 어느 날 서삼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청년은 식음을 전폐하고 철야를 하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런데 너무나 뜨거워 가슴을 쥐어뜯었다. 앞엔 빨간 십자가가 나타났고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내가 너를 택했다. 내가 너를 택했다. 너는 나의 길을 가라.”  

순종하라는 메시지였다. 주경야독(검정고시)으로 고교 졸업장을 받고 1973년 호남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생 시절은 누구나 그러했듯이 비참했다. 기숙사에서 나오는 밥 한 끼가 전부였다. 마치고 복학해 신학교 졸업반이던 1979년 나주 영광교회 교육전도사로 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일찍 목사가 되지 말고 공부 더 하라”는 권면을 해줬다.

마침내 일반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전주대 불어교육과에 합격한 것이었다. 84년 전주대를 졸업한 그는 서울 장로회신학대학원에 들어가 신학석사(역사신학) 학위를 받았다.

마피아 일당에 총 15발 맞고도 살아나  

87년 봄엔 믿음이 좋은 집안의 귀한 딸(조영선 사모)을 만나 결혼을 하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호사다마였다. 1991년 5월 초 마피아로 추정되는 괴한에게 총을 맞고 쓰러졌다.

횡단보도 앞에 정지하는 순간, 총을 든 괴한들이 송 목사의 차 앞 유리창을 깨뜨리고 난사한 것이었다. 마약을 투여한 괴한들이 자신들을 추격하는 줄 알고 오인사격을 가한 것이었다. 실탄은 복부를 뚫었고 갈비뼈 사이로 지나갔다. 1주일간 의식을 잃었던 송 목사는 살아나도 불구자가 될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에도 다시 일어나 의료진을 놀라게 했다.  

사고 후 1년 만에 송 목사는 박사학위도 무사히 마치고 93년에 귀국해 꿈에도 그리던 모교 호남신대 강단에 섰다. 2년 뒤엔 서림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목숨 건 목회에 나섰다.  

10년 가까이 쉬지 않고 달려온 결과는 참담했다. 2003년 12월 19일이었다. 갑자기 소변에 피가 섞여 나와 광주기독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급성 간염이었다.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입원절차를 밟았지만 ‘치료 불가능’이라는 사실상의 사망선고를 받았다.  

암흑, 그 자체였다. 새해 들어 송 목사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제주도 서귀포로 요양을 떠났다. 그곳에서 송 목사는 신학동기생인 경기도 안산제일교회 고훈 목사를 만났다. 그도 죽을병을 앓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갯바위에 올라가 같이 3개월 동안 기도했다고 했다.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아직은 할 일이 너무 많거든요.” 두 목사는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시간을 공유했다. 새 봄을 맞아 새싹이 돋아나듯이 두 목회자의 몸에도 새 삶의 기운이 돌았다.

4월 부활주일에 광주로 돌아온 송 목사는 배고픈 아기에게 젖을 먹이듯 영감 있는 설교를 했다. ‘잘나가는 목회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2011년 어느 날 송 목사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았다. 이번엔 뇌졸중이었다.  

이번엔 정말이지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목사님, 억지로라도 감사를 드리자고요. 살려만 주신 것에 감사하고, 좋은 성도님들 주심을 감사하고….” 사모의 말대로 송 목사는 무조건 하루에 세 가지 감사를 드리는 감사노트를 쓰기 시작했다.  

왼손으로 비뚤비뚤한 글씨로 101번째 감사편지를 쓰던 날 거짓말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오른손을 들고 축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도를 하는 순간, 손이 슬쩍 올라가는 것이었다.

말문도 터졌다. “에…어…아…우∼와… 가아암∼사아∼암∼니다….” 2년 만이었다. 이후 송 목사는 한 편의 설교를 위해 초등학생이 큰 소리로 국어책을 읽듯이 100번이나 반복했다.  


     죽음 문턱에서 구원 받은 송재식 목사, 왜 세번씩이나 살리셨을까 기사의 사진

스케치는 청년을 위한 광주 수완지구 '텐트 처지'.



청년 5000여명 수용 ‘텐트 처치’ 건축 

생애 세 번째 사지에서 돌아온 송 목사는 올해 교회 표어를 ‘근원(본질·本質)으로 돌아가자’로 정했다. 마지막 끝나는 날까지 이 표어를 잡고 죽을 각오로 본질을 찾아 나서겠다는 각오다.

그의 꿈은 15년 전에 이루지 못한 다음세대를 위한 새 성전을 짓는 것이다. 현재 예배당을 헐고 다시 짓는 것이 아니다. 건축비도 절반밖에 들어가지 않고 6개월 정도면 완공할 수 있는 ‘텐트 처치(Tent church)’를 세우는 것이다.

내년 봄 광주 수완지구에 명소로 떠오를 텐트 처치는 아동부와 청소년, 청년 등 젊은 세대의 교인 5000명이 맘 놓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예배당이다. 지금의 예배당은 팔거나 허물지 않고 리모델링해서 역사박물관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교회 앞 교인이 운영하는 국수집에는 이현숙(83) 권사 등 3명의 열성 전도대가 병원선교에 나서기 전 국수 한 그릇을 놓고 기도들 하고 있었다. 식사를 하러 송 목사가 들어오자 노 권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담임목사를 끌어안고 애원하듯 말했다. “목사님!∼ 지발 아프지 마시랑게요.” 

광주=글·사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