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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는 결국 비참애집니다 - 김유복씨 증언

배남준 2016. 8. 10. 10:03


         [이요나 칼럼] 죽음 앞둔 김유복 형제 앞에서

40여년간 동성애자로 살다 동성애를 극복한 김유복씨가 지난 6일 새벽 순천향대 서울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사경을 헤매고 있다. 김씨는 2004년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동성애를 극복하고 동성애의 폐해를 생생하게 증언해 왔다. 이요나 목사 제공


“동성애자 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불행의 씨앗입니다.”


 
탈(脫)동성애의 ‘산증인’ 김유복(75)씨가 순천향대 서울병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 김씨는 2004년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누워 지내다 패혈증이 겹치면서 건강이 악화돼 지난 6일 새벽 입원했다.
 
김씨는 국내 초기 트랜스젠더다. 트랜스젠더라는 말이 쓰이지 않던 1960년대에도 여장남자나 남장여자는 있었다. 하지만 이태원에 동성애자들을 위한 게이클럽이 생긴 뒤 김씨는 커밍아웃을 하고 활동한 국내 최초의 트랜스젠더로 알려져 있다. 성전환 수술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 사랑의 의미도 알지 못한 채 욕정에 끌려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고백했다.
 
김씨는 1960년부터 2004년까지 ‘김마리네’라는 이름으로 게이클럽을 전전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에게 노래는 인생이었고 삶의 전부였다. 화려한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2004년 척추측만증으로 수술을 받았다. 김씨는 “디스크 수술을 한 뒤 일본에 있는 후배를 따라 일본의 밤업소에서 일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수술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수술을 받은 김씨는 다시는 걸을 수 없게 됐다. 불구가 되자 찾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김씨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정부에서 나오는 생활비로 한 평 남짓 쪽방에서 지옥 같은 생활을 이어갔다. 봉사자들이 대소변을 받아내며 그를 돌봤다. 

외로운 김씨 옆에는 이요나(66·홀리라이프 대표) 목사가 있었다. 이 목사도 40세가 넘도록 이태원에서 게이클럽을 운영하며 동성애자로 살았다. 김씨는 이 목사가 운영하던 게이클럽에서 가수로 활동했다.

이 목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목숨을 끊었다. 이 목사는 어머니 죽음을 계기로 동성애를 벗어나려 애썼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 공부를 하며 동성애를 극복하고 돌아왔다.

김씨와 이 목사는 2015년 홀리라이프(탈동성애인권포럼)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나는 더 이상 게이가 아니다’에 같이 출연했다. 동성애자들과 그 가족의 아픔과 삶의 고통을 알리고 ‘동성애는 치유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1시간8분 분량의 이 다큐멘터리는 유튜브에 올린 지 9일 만에 조회수가 9만5000여건을 넘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김씨는 처참한 말로를 직접 증언했다. 그는 “동성애자들을 보면 정말 애처롭다”면서 “육체적인 즐거움을 잠깐 느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동성애의 말로는 비참하다. 결혼도 못하고 늙고 추해진다. 주변 친구들도 에이즈와 자살로 죽음을 맞았다. 동성애의 끝은 아무도 없는 외로움뿐이다.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몰랐다”고 고백했다.

순천향대 중환자실 간호사들은 9일 “(김씨는) 의식이 없다가도 이 목사가 병원에 올 때면 눈을 깜빡인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제 길고 고달픈 인생을 정리하려는 순간이다. 동성애는 핍박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의 대상”이라며 “트랜스젠더 친구들을 불러 임종예배를 드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