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에서 23년 섬기는 배정희 선교사-
큰소리 나는 싸움과 위협이 난무하고 폭력과 매춘이 판을 친다. 술주정뱅이와 구걸하는 아이들이 거리를 점령한다. 더러운 물이 흐르는 개천 옆에는 오물이 쌓여있고 화장터에서 뿜어내는 연기에는 죽음의 기운이 감돈다. 이곳 사람들은 인생의 마지막에 강에서 목욕하고 죽기를 바란다. 그리곤 화장돼 자신의 뼛가루가 강에 뿌려지기를 소망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 강에서 목욕하며 강물을 마시고 빨래를 한다. 세계 제2의 인구대국이자 힌두교의 나라인 인도 이야기다.
이곳에 23년째 살고 있는 한국인 여성이 있다. 배정희(58) 선교사. 그는 윤회의 굴레 속에 있는 인도인에게 십자가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3억3000개의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라 외친다. 지난 27일, 순복음세계선교대회 참가 차 잠시 귀국한 배 선교사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만났다. 그는 최근 인도 선교의 경험을 정리한 ‘인도하심’(국민북스)을 펴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한다=배 선교사는 1996년 12월 인도 북부 델리의 무카 지역 시장에 ‘선가티(연합)순복음교회’를 세웠다. 교회당은 시장통 건물 3층의 10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어 교실과 공부방을 열었고 ‘통성기도’를 드렸다. 사람들은 기도로 영혼과 몸이 치유될 수 있다고 믿었다. 시장통은 쓰레기 천지였다. 고양이만한 쥐들이 죽어 널브러져 있었고, 걸을 때마다 소똥을 피해 다녀야 했다.
“참 교만한 생각이지만 무카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교회를 참 좋아했어요. 저 역시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가 좋았구요.”
배 선교사는 지금도 아이들 이름을 기억한다. “요겐드라 모한 까말 라제쉬 아누 하렌드라…. 매일 아이들 이름 불러가며 기도했어요. 지금은 다 커서 교회의 주축이 됐습니다.”
교회 개척 8년 만에 미션센터를 열었고 유치원도 정식으로 개원하면서 ‘시장통 교회’는 무카의 소망이 됐다. 아이들은 배 선교사를 ‘시스터 드보라’로 불렀다.
인도의 종교는 힌두교가 80% 이상이고 이슬람교가 13%, 나머지는 기독교와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 등이다. 언어만 해도 힌디어 외에 14개가 공용어다. 전체 13억2200만 인구 중 1억명이 슬럼가에 산다. 슬럼가 주민들은 한 달에 10만원 미만의 수입으로 생활한다. 뿌리 깊은 카스트제도와 만연된 여성혐오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다.
배 선교사는 인도에서의 전도는 “예수 믿으세요”가 아니라 “나 예수 믿어요”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번은 시골에서 전도를 했는데 아주머니가 예수도 좋고 십자가도 좋은데 밥 먹여 주는 사람이 최고라고 했어요. 그분은 사흘이나 배를 곯았는데 맨손으로 소똥을 긁어 연료를 만드는 중이었어요. 그분에게 복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때부터 배 선교사는 복음 제시와 함께 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나 예수 믿어요”라고 말했고 ‘떡’을 준비해 도왔다.
◇울면서 씨를 뿌리다=어려운 일도 많이 겪었다. 사건 사고는 툭하면 겪었고 뎅기열과 장티푸스, 말라리아와 열병도 수없이 걸렸다. 죽음의 영이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영적인 도전도 많았다.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이 떠났고 사역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수많은 죽음도 목도해야 했다. 현지인 목회자 사모의 갑작스런 죽음과 성폭행에 시달리던 18세 모누의 자살은 잊혀지지 않는다.
배 선교사는 그래도 인도를 떠나지 않았다. 살아있는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울보’라 했다. “하나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해 울었고, 죽어가는 사람들 옆에서 울었어요. 몸과 마음이 아파 울었고 현지인 성도들 때문에 울었어요. 그런데 울면 시원했어요. 하나님이 ‘이제 시원하니?’ 하며 다독거려 주시는 것 같았어요”.
배 선교사는 울면서도 변함없이 복음의 씨를 뿌렸다. “저는 접속어 ‘그러나’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러나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고통은 견딜 만합니다.”
배 선교사는 한세대(목회학과)에서 공부하고 대학선교회(CAM)에서 활동했다. 93년 인도 단기선교에 참가했다가 선교사 소명을 받았다. 그해 12월 선교사 파송을 받아 94년 1월8일, 선교지에 첫발을 디뎠다. 인도의 명문 네루대학에서 사회학으로 석·박사학위도 받았다. 지금은 인도미션센터를 중심으로 차세대 지도자를 양육하고 있다. 주님과 인도를 사랑해 지금껏 독신으로 살고 있다.
그는 인도 선교사가 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를 따르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인도에 사는 목적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람이 노인이나 어린 아이일 수도 있고, 부자이거나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내 심장을 주고라도 그들을 주님의 집으로 인도하고 싶습니다.”
인도 선교를 위해선 낮은 마음을 주문했다. “인도 슬럼가의 집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생겼는데요, 문들도 낮아서 집으로 들어가려면 될 수 있는 대로 몸을 낮춰야 합니다. 집안에선 더 낮아져야 합니다. 세차게 돌아가는 선풍기를 피하려면 더 낮춰야 하고요.”
콜카타에 있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케리의 묘비명도 말해줬다. “가엾고 비천하며 연약한 벌레 같은 내가 주님의 온유한 팔에 안기다.”
-국민일보 2016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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