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간증

[펌]운보의 수녀딸 김영 - 아름다운 사연 감동입니다

배남준 2016. 2. 17. 06:36

'운보 김기창 미수 기념 특별전'에서 만난

운보의 수녀딸 김영

지난 7월 열린 ‘바보산수’의 대가 운보 김기창 화백의 미수 기념 특별전에는 특별한 손님이 참석했다. 속세를 떠나 수녀로서 지내오던 그의 막내딸 김영씨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 투병 중인 운보가 평소 가장 아끼는 딸이라는 그에게서 들어보는 ‘내 아버지 운보’.

●글·정지연 기자 ●사진·김녕만 기자, 조선일보 사진팀


    ‘바보 예술 88년 - 운보 김기창 미수기념 특별전’이 열린 7월 4일 조선일보미술관은 특별한 손님들의 방문으로 웅성거렸다. 운보 김기창(88)에게 세례를 준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운보의 수녀딸인 김영씨(44)가 모처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운보의 1남 3녀 중 막내인 김영씨의 수도명은 아나빔. 히브리어로 ‘가난한 자’라는 뜻이다. 김영 아니, 아나빔은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사랑의 선교회 수녀원장으로 소외되고 병들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돌보고있다.

 

사랑의 선교 수녀회는 1979년 노벨상을 수상한 인도의 테레사 수녀가 세운 사랑의 선교회 한국 분원이다. 1950년 인도 본원을 세운 이래 세계 각국으로 퍼져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와 헌신을 해오고 있는 단체다.

“대학생 때 집 인근의 성북동 성당으로 자주 봉사활동을 나가곤 했었어요. 마더 테레사의 전기를 읽고 그 분의 삶에 감화를 받기도 했고…. 청각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버지의 불우함을 어려서부터 지켜봤던 것도 아마 영향을 주었겠지요.”

김씨가 간략하게 밝힌 동기다.

 

 그러나 꽃다운 나이의 대학생, 그것도 아버지와 어머니 우향 박내현씨의 재능을 이어받아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가 종교계로 입문하게 된 데는 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오랫동안 운보를 지켜봐온 최병식 교수가 쓴 <천연기념물이 된 바보>에는 김씨가 수녀가 되겠다는 결심을 밝힌 그날의 풍경을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날 막내 영이가 성당에서 자원봉사를 간다고 하더니 며칠 만에야 돌아왔다. 그리고는 유자차 한잔을 들고 아버지 곁으로 다가와 앉는 것이다. 영이 먼저 운을 뗐다. “아빠 저는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운보는 놀란 표정을 짓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중략) “아버지, 이 세상에는 아빠와 같이 장애자로 살고 있는 사람이 많아요. 전 하나의 아빠보다는 수많은 장애자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제 일생을 바치고 싶어요. 허락해주세요.”’

운보는 딸의 결심이 굳음을 알고 반대하지 않고 따뜻하게 그 결심을 축복해주었다. 당시 운보의 뇌리에는 아마도 영을 가졌을 때의 일화가 선명하게 떠올랐을 것이다.

 

셋째 딸 영을 잉태했을 때 운보는 꿈을 꿨다. 수녀와 성당이 나오는 꿈이 너무나 생생했던지라 운보는 그 영상을 잊지 못하고 이듬해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라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 작품은 나중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에게 기증했다. 그리고 그 그림속의 수녀와 꼭 닮은 막내딸은 자라서 실제로 수녀가 된 것이다. 마치 예언처럼 이루어진 이 일을 두고 운보는 평소 ‘하느님의 계시’라 말했다.

막내딸 잉태했을 때 수녀가 나온 꿈꿔
그 딸이 자라 수녀가 되었다

 

사실 김씨의 어린 시절은 외로웠다. 김씨가 중학생일 때 화가로서의 포부를 떨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어머니. 따뜻한 어머니의 편지가 날아들었지만 편지에서밖에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사춘기의 예민한 소녀에게는 결핍감으로 남았으리라. 게다가 큰언니마저 엄마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렇게 가족이 떨어져 있으면서 그는 자주 교회를 찾았다.

 

1976년 어머니 우향의 죽음 이후 믿고 의지했던 스승 이당 김은호마저 79년 타계하자 아버지 운보의 타격은 컸다. 그림을 그리다말고 멍하니 앉아있는 버릇이 생긴 것도 그 즈음. 고독병을 앓는 아버지를 옆에서 돌보던 김씨는 당시 삼선교에 있던 사랑의 선교회에 드나들고 있었다. 이 곳은 중증 지체 장애자 중 남자만 모여있는 곳으로 장애인 수사들이 자신보다 정도가 심한 장애자들을 위해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는 곳. 아마도 김씨는 이곳에서 봉사하면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고민했던 것 같다. 이때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이는 운보에게 사숙하던 화가 김정자씨였다. 실제로 수녀 생활을 했었던 김정자씨와 가톨릭의 희생과 봉사정신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김씨는 마음을 정한다.

 

1985년 김씨는 세례명인 아네스를 버리고 수녀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을 돌보면서 가장 힘든 곳으로 가고 싶다’는 바람대로 그가 택한 곳은 안산 사랑의 선교회. 이 곳은 신발도 신지 않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철저히 자신을 희생했던 테레사 수녀를 모범 삼아 실천적 봉사를 중시하는 곳이다. 이 수녀회의 교육은 인도, 필리핀, 홍콩 등지에서 이뤄지는데, 아나빔이 첫 허원식을 가진 곳은 필리핀 마닐라였다. 허원식에는 큰오빠 부부가 참석, 이제 아나빔이라는 수녀로서 살아가게 될 동생을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아나빔은 그곳에서 뜻밖의 인연을 만나게 된다.

“당시 성 라자로 마을을 운영하시던 고 이경재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신부님과 대화중에 아버지께서 영세를 받으시면 어떤가 라는 말이 오갔고, 저 역시 그랬으면 했지요. 신부님은 귀국하자마자 아버지를 만나 즉각 날짜를 잡았고 덕분에 김수환 추기경님과도 인연이 닿았어요.”

 

이 신부의 주선으로 운보는 수원 성 라자로 성당에서 추기경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는데, 그 까닭이 재밌다. 그날은 성 라자로 성당에서 많은 예비 신부들이 피정(8일간 금식 금언 기도를 드리는 것)을 끝내고 추기경 미사를 보던 날이었던 것.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장엄한 미사 속에 영세를 받게 된 운보는 “성미가 급한 것이 꼭 베드로를 닮았다”는 추기경님의 농담을 들으며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전에 운보는 장로교였다. 그러나 개종을 하면서 그는 큰 고뇌를 겪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작년에 가톨릭으로 바꾸었지요. 특별한 뜻은 없고 이사를 한번 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내 생각에는 신교의 하느님이나 구교의 하느님이나 똑같은 하느님이라서… 별 문제가 없는 거 아니겠어요?”라는 그의 말에서 짐작된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인 운보는 첩의 자식이라는 가정적인 어려움과 8살 때 앓은 장티푸스의 영향으로 청각을 잃은 비극을 예술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그와 그의 평생의 반려였던 우향 박내현의 아름다운 만남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운보가 아내 우향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우향의 타계와 때를 같이해 그의 걸작 ‘바보 산수’가 완성됐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불과 2개월만에 신들린 듯 80여점을 쏟아낸 그는 조선 시대 민화라는 형식을 빌려 아무 것도 취하지 않는 무소유의 정신 세계를 붓 끝에 담아낸 것이다. 이 ‘바보 산수’는 사물의 크고 작음, 혹은 높고 낮음, 멀고 가까움을 넘나드는, 어린이의 마음 그 자체가 도(道)임을 보여주었다.

 

장애를 딛고 한국 현대미술의 거인으로
우뚝 선 자랑스런 아버지 운보

속세를 떠나 있지만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추억까지 잊을 수는 없는 일. 아나빔이 떠올리는 아버지는 ‘어린아이 같으신 분’이다.

“보통 예술을 하는 분이라고 하면 가정을 등한히 할 거라는 편견이 있지만, 우리 아버지는 참 모범적인 가장이셨어요. 단순히 아버지라기보다는 친구 같았죠. 늘 대화하고 장난도 치고…. 막내인데다가 어머니가 안 계신 자리를 제가 메워서인지, 아버지와는 유난히 각별했어요.”

또한 그는 아버지가 아닌 예술인 운보에 대해서도 애정을 보였다.

 

“저도 미술을 전공했지만, 존경스럽지요. 아버지는 일체의 물질적 집착이 없이 작품에만 몰입하셨어요. 자식이라 이런 말 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정말로 필력이 인간의 최대치에 다다랐구나 라는 생각을 해요. 아버지의 단순한 마음, 어린아이 같은 그 마음과 놀라운 집중력…. 하느님이 도구로 쓰시기에 충분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어머니 우향에 대해서는 미국 유학 가기 전까지의 기억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오래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어서일 것이다.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예술가로서 1인 3역을 살면서 어머니는 참으로 균형있게 그 모든 일을 해내시지 않았나 생각돼요.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어머니는 그 바쁜 와중에도 저희 남매들에게 옷을 손수 지어서 입히셨다는 거…. 세 자매에게 똑같은 천을 끊어 원피스를 해 입히고, 머리까지 똑같이 땋아줬답니다. 겨울이면 털실로 곱게 옷을 짜 입히고요. 그 외에 기억나는 것은 어머니 혼자 그림을 그리시던 모습이에요.”

 

운보가 자신처럼 장애를 앓는 사람들을 위해서 70년대부터 장애자 복지 중심의 사회사업을 벌여온 데는 수녀 딸 아나빔의 영향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80년대 초부터 운보의 장애자 사업은 본격화되는데, 83년에는 복지 기금 마련 전시회를 개최한 데 이어 84년에는 청각장애인 전용 직업훈련시설인 운보 복지원을 남양주에 건립했다. 또 그의 숙원이었던 청음회관이 강남구 역삼동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85년 건립됐다. 이로써 남양주에서는 직업훈련을 주로 실시하고 역삼동에서는 청각장애자들을 대상으로 청능훈련, 구화, 수화강습, 보청기 훈련 등 각종 문화 학습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그는 복지원 기금 마련을 서두르다 보니 태작이 많이 나왔다는 비판을 들을 만큼 정열적으로 작품을 쏟아냈다. 시카고에 살던 장남 김완씨가 사업을 정리하고 복지사업에 뛰어든 것도 당시 그에게 기운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82년 예술원상을 수상하며 그가 남긴 수상 소감을 보면 그가 복지사업에 몸바친 정열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장애자를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해준 것도 개인적 영광인데, 상까지 받게 되니 여러분의 후의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개인의 영예에 그치지 말고 아직도 ‘병신’으로 사회의 냉대를 받고 있는 다른 장애자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신체의 일부가 잘못되었다 해도 본인의 의지와 사회의 보살핌만 있으면 얼마든지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신체보다는 정신의 병을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아나빔은 수녀가 된 후 신앙 이외의 일에 나서는 것을 극히 꺼려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종 아버지를 찾아 위로하고 봉사의 삶에 대해 들려주곤 했다고. 사실 이번 바깥 나들이도 아버지 운보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 그가 속해있는 사랑의 선교수녀회는 일절 외부에 대한 홍보를 금할 정도로, 청교도적인 원칙을 지켜나가는 곳이다. 현재 그곳에서는 거동이 불편한 무의탁 할머니 40명이 기거하고 있는데, 수녀 6명과 자원봉사자가 할머니들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그 흔한 세탁기조차 쓰지 않는다고 하니, 어느 정도의 엄격한 청빈함을 강조하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수녀회의 원장인 그가 언론의 대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각오하며 대중 앞에 섰으니 망설임이 오죽했으랴.

 

사실, 아나빔은 지난 93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린 ‘운보 회고전’에는 한국에 있으면서도 참석을 하지 않았다. ‘흰 고무신에 빨간 양말’을 신은 아버지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가 안산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매스컴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묵묵히 수녀의 본분에 충실하게 지체 부자유자들과 아이들을 거두다가, 다음 부임지인 홍콩으로 총총히 떠났던 것.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전시회라는 생각에 용기를 냈어요. 저는 천주교의 수녀 아나빔이지만 그 이전에는 운보의 딸 김영이기도 하니까요.”

 

96년 5월 쓰러진 이래 힘겹게 투병중인 운보에게는 죽기 전에 바람이 하나 있다. 북에 있는 친동생 기만씨를 만나는 것. 한국 전쟁 발발 후 좌우익의 사상적 차이로 헤어진 동생 기만씨는 북한의 공훈화가로 조선화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

 

남한의 한국화가와 북한의 조선화가로서 형제가 같이 그림을 그려온 이들이 합동전을 갖는다면 얼마나 보기 좋겠느냐는 것이 주변의 기대이지만, 현재 악화되고 있는 운보의 병세를 생각해볼 때 현실화 여부는 매우 불투명하여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늘 기도합니다. 제가 택한 수도자로서의 길을 후회없이 보낼 수 있게 해달라는 것과 가족을 위한 기도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의 삶이 후대에 빛과 희망으로 남게 해달라고, 그렇게 복되게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다가 거두어 주십사고 늘 기도드립니다.”

 

자세히 보면 크게 쌍커풀 진 눈매가 아버지 운보를 그대로 빼닮은 수녀 아나빔, 아니 김영씨는 조용히 손을 모았다. 듣지 못하는 장애를 극복하고 그림과 복지사업에 헌신했던 아버지 김기창과 어렵고 헐벗은 이들을 위해 온몸으로 헌신하는 수녀딸 아나빔의 이야기는 화가 운보와 우향의 아름다운 동지적 사랑 만큼이나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