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칼럼(하늘소망)

역대 대통령 영부인들 실화 / 공덕귀 전도사

배남준 2021. 12. 27. 08:10

 

                               -육영수 여사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 방문 -

 

*요즘 대선을 앞 두고 세간에 대통령 영부인들에 관심이 쏠려있다. 공덕귀 영부인(윤보선 대통령)께서 5개국어를 구사했다는 정보는 새롭고 놀랍다. 특별히 여사께서 일제에 항거한 훌륭한 기독인, 전도사님이라는 사실은 이제 세상에 널리 알려져야합니다.       

 

 

                                                        -공 덕귀 영부인(전도사)- 

 

공덕귀는 4·19혁명 직후 취임한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로 기억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여사는 생전 교회여성연합운동, 순교자기념사업운동, 인권운동, 통일운동, 피폭자 지원과 기생관광반대운동 등에 한평생을 바쳤다.

일제 시대 공 여사의 어머니 공마리아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였다. 주일이면 어머니는 절대 일을 안 했다. 새벽기도에서부터 주일이 시작됐다. 일찌기 국문을 깨쳐 마을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기도 했다. 어린 덕귀는 어머니의 새벽기도를  따라다니며 교회 맨 뒤에 앉아 열심히 기도했다.

어머니 공마리아는 삯바느질로 덕귀 등 6남매를 키웠다. 대한제국 마지막 군인이었던 남편 공도빈은 덕귀가 열다섯 무렵 죽었다. 평생 교회 나간 일이 없는 공도빈은 어느 날 밤 자다 말고 깨어나 “하나님 이 공도빈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한 것을 끝으로 세상과 작별했다. 어머니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다. 훗날 공마리아는 재건교회 장로가 됐다.

공덕귀는 일신여학교 시절 인도 선교사가 꿈이었다. 코틀 등 호주 선교사 등과 함께 경남 진주 거창 등지로 전도여행을 다니며. 교회에서 독립적인 독창을 불렀다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수감이된다.  

공덕귀가 두 번째로 옥살이를 한 것은 어느 날 부흥집회가 끝나자 대구의 도경찰서에서 여사를 잡아들였다.

하야시라는 서장은 ‘김천 황금동교회 독립운동사’라고 적힌 서류철을 내밀고 정대위(독립유공자) 목사 등의 설교를 문제 삼았다. “전쟁을 위해 교회 종을 바칠 때 집사들이 울었다는데 그게 누구냐”고 겁을 주었다. ‘

하야시와 일경은 그가 말을 듣지 않자 고춧가루 탄 물로 고문을 가했다. 

그렇게 교회를 섬기고 신학을 가르치다 보니 어느덧 30대 후반이 됐다. 그는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학 준비를 하던중 .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한 내 기도가 나를 결혼으로 몰고 갔는지 나는 결국 결혼하게 됐다”고 했다.

1949년 1월 6일. 서른아홉의 공덕귀는 신앙의 명가 윤보선의 안국동 자택에서 함태영(독립운동가·부통령) 목사 주례로 혼인예식을 치른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한 지혜와 믿음의 여인 미리암과 같은 삶을 살게 되는 전환점이 되는 결혼식이었다.

1970년대 초 한국에 원폭 피해자가 2만여명이나 있었다. 실태 파악도 안 된 때였다. 그때 공덕귀 한국교회여성연합회장은 경남 합천 등으로 피폭자를 찾아다니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 일본 한국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던 때였다. 그와 교회 여성들은 일본교회협의회와 세계 기독여성들에게 이 비참한 상황을 알리고 일본 정부에 배상을 요구했다.

 공여사는  조선신학교(한신대 전신) 교수였고,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을 이끈 여성운동가였으며,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모금한 평화헌금을 한국원폭피해자 가족을 위해 쓴 기독NGO 활동가였다. 또 기독교여성단체 리더로 버스안내양, 여성 방직노동자, 도시빈민을 보살핀 우리 시대의 어머니였다.

공덕귀 여사 를 추모는 기념석이 통영 여사의 삶의 터에 남아있다 (성경환  목사님 글 중에서 발췌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