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고아의 아버지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1867~1962)-문화훈장 추서
그가 추운 겨울 길바닥에 홀로 쓰러져 있을때 모두가 그를 스쳐 지나가기만 할뿐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소다의 맥박이 아직 뛰고 있음을 확인하고 여관으로 그를 옮겨 숙박비를 지불한뒤 사라졌다
소다는 깨어난뒤 여관주인에게 자신을 도와준 사람에 대해 물었으나 주인은 그저 조선말을 쓰는 사람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6년후 조선으로 간 소다 가이치.
일본 야마구치에서 태어나 교사,선원,사무원 등 방랑 생활을 하던 도중,대만에서 추운 겨울 술에 취해 길가에 쓰러져
얼어 죽을 뻔한 그를 지나가던 한 조선인이 여관으로 옮겨줬던 인연으로 조선에 간 소다 가이치.
그는 조선에서 감리교회 전도사겸 일본어 교사로 일하다가 월남 이상재 선생의 영향으로 아내 우에노와 가마쿠라보육원
(영락보린원)에서 천여명의 불쌍한 조선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소다는 길가에 버려진 갓난 아기들을 안고 다니며
이집 저집 젓동냥을 다니고 그 와중에 같은 일본인들의 질타를 받으면서 독립운동에도 관여하였다.
(105인 사건,이상재선생 관련으로 총독부에 찾아가서 독립운동가 석방 요구 등)
소다 가이치는 본인이 길러낸 고아가 독립운동에 관여하는 바람에 일경에 체포 되는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다른 일본인들이 조선을 떠날때도,부인 우에노가 세상을 떠났을때도 홀로 그 자리에 남아 묵묵히 조선 고아들을 돌봤다.
23년간 조선땅에서 고아들을 돌보다 일본으로 돌아갔을때 조차도 그는 한국에 대한 국민 참회,회개를 순회 연설했고
귀국후에도 늘 한국으로 가고 싶어했던 그의 사정을 안 일본 아사히 신문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주선으로 소다는
61년 조선으로 다시 되돌아왔다.그후 영락보린원에서 지내다 1962년 95세를 일기로 아내 우에노 옆에 묻혔다....
(우에노 여사도 1896년 조선으로 온 뒤,광복후에도 귀국하지 아니하고 고아들을 돌보다 1950년 74세로 서울에서 별세)
[출처] 조선 고아의 아버지 - 소다 가이치|작성자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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