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스미스는 기독교와 다른 전통의 만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텍스트는 신약성서 중에서 누가의 아레오바고 법정 이야기(사도행전 17:16-34)와 고린도전서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19세기 선교사들의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나는 그 지적이 타당한 것임을 여러 번 느끼고 있다. 오늘 음미하고 싶은 것은 사도행전 17장이다.(고린도전서에 대한 스미스의 글에 대해서는 이글을 참고할 것)
바울은 아테네에 선교 여행을 갔을 때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지만, 아레오바고 법정에 서서는 다음과 같이 차분히 연설을 시작한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17:22-24, 새번역)
이 대목에는 오랜 기독교사에 걸쳐 선교사들이 반복해온 구조가 농축되어 있다. 비록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아테네 인들에게는 ‘종교심’이 존재하며, 비록 자신들은 인지하지 못하지만 ‘알지 못하는 신’의 존재도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후대의 선교사들이 낯선 선교지에서 찾으려고 애쓴 것이 바로 그 종교심이며 알지 못하는 신이었다. 타문화에 대한 동정적인 이해를 가진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러한 인식을 근저에 깔고 있었다.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사이자 대표적인 동양학자인 제임스 레게를 연구한 노먼 지라르도는 이러한 인식을 “바울 패러다임”(the Pauline Paradigm)이라고 부르며 의미 있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19세기의 비교연구자들, 그러니까 막스 뮐러로 대표되는 초기 종교학자들의 ‘비교 작업’이 이 바울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뼈아픈 지적을 한다.
Norman J. Girardot, <<The Victorian Translation of China: James Legge’s Oriental Pilgrimag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284-85.
Norman J. Girardot, <<The Victorian Translation of China: James Legge’s Oriental Pilgrimag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284-85.
이런 비교연구가들의 교의는 세계 문명과 언어를 번역하고 분류하고 이해한다는 새로운 학문적 사명을 뚜렷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원칙은 바울이 고대 아테네에서 사용한 문화간의 소통 방법을 오직 표면적으로만 세속화시켜 재진술한 것이기도 하다. 신약성서에서 이야기된 대로, 바울은 이방 도시 아레오바고 법정 위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을 부수지” 않는 동정적 이해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아테네인들 자신보다도 그리스 종교의 진정한, 혹은 숨은 의미를 더 잘 아노라고 당당한 위대함을 보였다.(284)
흔히 바울 이야기는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동정적 이해의 예로 인용된다. 그러나 지라르도가 지적하듯이 바울의 태도에는 이중성이 있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동정적 태도보다 중요한 것은 속에 깔려 있는 자만심, “너희가 모르는 진실을 알려주마”가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선교의 경우에 이 원칙은 중국 전통을 다루는 데 적용된다. 한글 성서 번역자인 존 로스는 중국 선교에 관한 글에서 “유교의 현명한 사용”을 주장한다. 바울의 경우에서처럼 뱀과 같은 능숙함과 현명함을 갖고 중국 전통을 무작정 내치기보다는 보듬어 사용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보유론(補儒論)의 유산은 가톨릭의 것만이 아니라 개신교 선교사들도 공유한 것임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좀더 이야기하자면, 메드허스트가 중국 성서를 개정할 때 신이 아니라 상제(上帝)를 ‘God’의 번역어로 사용하자고 했을 때, 제임스 레게가 중국 고전을 영역할 때 상제를 ‘God’으로 옮겼을 때, 그리고 존 로스가 만주 선교에 대한 논문에서 중국의 축첩제나 전족 풍습을 일시적이나마 용인하자고 했을 때, 이러한 정신이 적용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지라르도트는 당대에 바울 패러다임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선교사들(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이나 비교학자들(동양학자, 역사가, 혹은 인류학자들)이 옹호했던 것은, 바로 그런 종류의 뱀과 같은 간교함, 전략적인 감내, 그리고 바울의 패러다임의 핵심에 새겨진, 숨어있는 해석의 당당함이다. 바울의 이야기는 단순히 비밀스레 공유된 보편적 가치의 문제에 관한 것이기를 넘어서, 흔히 종교의 그리고 해석의 주도권이라는 강철 주먹을 감싸고 있는 외적인 동정이라는 벨벳 글러브에 관한 이야기이다. 바울의 이야기는 문화간의 관계를 말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담론에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전통적인 선교사업의 신학적 절대주의로부터 사회복음의 자유주의적, 세속적 가치에 이르는 적응주의와 성취론적인 접근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동양학자들의 엄정하고 과학적인 접근으로 이르도록 해주고 공인하는, 감추어진 통로였기 때문이다.(285)
다소 장황하기는 하지만 핵심적인 지적이다. 그리고 이 지적은 빅토리아 시대 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유효하다. 바울 패러다임을 넘는 비교를 이루려는 노력, 그것은 아직도 종교학계에서 진행 중인 작업이다.
추가)
한국 개신교 선교사 자료에서 바울 텍스트가 중요하게 작용한 사례는 많지만, 대표적인 것 하나만 인용해 놓는다. 다음은 이덕주의 <존스의 한국역사와 토착종교 이해>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한국인은 종교적인 인간이다. 한국인은 무신론자가 아니다. 바울이 고대 아테네 사람들에 대해 말한 것과 같이 한국인은 대단히 종교적이다. 그는 어디서든 신을 찾는다. 모든 자연물에 신이 내재해 있다. 분명치는 않지만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한 관념이 있어 죽은 자를 숭배하는 분명한 의식이 있다. 한국인은 도덕적 가치관을 갖고 있다. 그래서 대대로 의식자 계층은 윤리 규범을 철학화하는 데 전념해왔다. 한국에는 종교 현상이 풍부하다. 그 결과 우리는 고도로 발전되어 국가종교 형태가 된 유교로부터 자연의 힘이나 유령의 공포 같은 원시 신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교 현상들을 목격할 수 있다.G.H. Jones, "The Native Religions", KMF, Jan., 1908, 11쪽; G.H. Jones, Korea The Land, People, and Customs, 49쪽.
추가 2)
막스 뮐러는 종교학을 통해서 선교사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주 주장하곤 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치는 제단, 뮐러가 종교의 공통 기반을 지칭하기 위해서 애용했던 표현이다.
나는 종교학이 야만적인 모습의 신앙과 예배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 있어서 [언어학이 했던 것과] 비슷한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희망한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기독교와 이방 종교들 사이에서] 단순히 차이점들을 보는 대신에 공통된 기반을, 여전히 되살아날 수 있는 진리의 빛의 번득임을, 그리고 진실된 하느님에게 새로이 봉헌된 제단을 더 열렬하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Friedrich Max Muller, "Preface," <<Chips from a German Workshop>> (London: Longmans Green, 1867), xxi-xx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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