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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기도회에서 시작된 루마니아 '촛불 혁명'- 라슬로 퇴케시 목사

배남준 2019. 10. 27. 08:59



1989년 12월 루마니아 혁명


루마니아혁명 (1989년12월)


차우셰스쿠 총살로 유명한 루마니아 혁명에 대해서 알아보자


'발칸의 김일성'이라고 불러졌던 독재자, 한 번 입은 양복은 다시는 입지 않는다는 사람, 그가 바로 루미니아의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cu)다. 그의 철권 통치가 막을 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한 교회와 목사가 있었다. 루마니아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인 장로교회 목사인 라슬로 퇴케시(Laszlo Tokes) 목사다.

루마니아 베가 강변에 있는 작은 도시 티미쇼아라에 작은 교회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교회도 공산 정권의 지시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체제 질서를 잘 따르던 목사가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게 된다. 그러자 1987년, 라슬로 퇴케시라는 젊은 목사가 부임한다. 교회의 무기력함, 전임 목사가 정권에 순응하는 모습에 실망한 교인들은 더 이상 의지할 가치를 못 찾고 교회를 떠나 겨우 50여 명이 남은 상황이었다.

새로 부임한 목사는 비교적 소탈하며 특이한 점은 없었다. 그런데 기도의 삶을 살았던 그가 목회하면서 불타오르는 교회와 조국의 처한 현실에 대한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작은 기도회를 통해 교인들과 지역사회, 조국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그는 교회의 예배에 믿음을 국한시키지 않고, 교회가 성경적으로 세상을 정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임을 전파했다. 그 결과 초기에 대부분 노인으로만 구성된 교회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찬송가와 성경을 더 주문하게 되었고,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억압받고 상처받은 교인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을 교인들의 마음에 심어 주었다.

작은 교회 목사, 변화를 일으키다


이 기도회에 청년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신앙에 힘입어 2년 만에 교인 수가 5,000명으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1989년 8월부터 사태가 악화되었다. 퇴케스 목사가 차우셰스쿠 정권을 비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비밀경찰은 기도회의 위험을 간파하고 박해를 시작했다. 퇴케스 목사에게는 배급표를 주지 않았고, 전화조차 자유롭게 쓸 수 없었다. 비밀경찰은 교회에 협박과 탄압을 가했다. 예배가 시작되면 기관총을 든 비밀경찰이 교회 입구를 지키고 있을 정도였다.

1989년 12월 15일, 비밀경찰은 퇴케스 목사를 위험한 집회 주동자로 규정하고 강제로 퇴거시키려 했다. 트럭을 배치했지만, 완강한 저항에 그 일은 불가능했다. 교인들이 교회로 몰려들어 인간 방패를 만들어 퇴케스 목사를 보호했기 때문.

"자유", "해방", "루마니아여 깨어나라!" 마침내 12월 16일 밤부터 자연스럽게 정권 타도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차우셰스쿠와 공산주의를 타도하자!"

12월 17일, 루마니아 비밀경찰이 잔인하게도 성경을 들고 가운을 입은 퇴케스 목사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퇴케스의 신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이들은 퇴케스 얼굴에 든 멍과 피가 흐르는 손을 보고 격분하게 된다. 경찰과 충돌하기에 이르렀고, 자극을 받은 학생들도 시위에 가세했다.

이 상황에서 비밀경찰은 목사 부부를 강제로 연행했다. 퇴케스 목사를 죽이면 오히려 위대한 순교자가 될 것이라 염려해 죽이지 않고 가두었다. 비참한 폭력 현장을 목격한 교인들과 주민들은 분연히 일어섰다.

어두운 밤, 이들은 촛불을 밝히고 항의 집회를 열었다. 교파를 초월해 수많은 교인이 몰려나왔다. 시민들도 합세했다. 시내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경찰들은 시민들에게 무참히 발포를 한다. 수백 명이 순식간에 쓰러진다. 시민들은 팔을 끼고 행진을 계속했다.

10대 소년 소녀들도 시위대에 참여해 쓰러져 갔다. 시위대는 시체들을 두고 계속 전진했다. 군중들은 계속 늘었고, 희생자도 점점 늘어났다. 시민들은 혁명가를 부르며 국기를 들고 총탄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진했다. 이 소식은 즉각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고 전 국민적 저항운동으로 번져 갔다.

한 명의 독재자를 몰락시킨 루마니아 혁명은 1989년 12월 17일 티미쇼아라에서 시작됐다. 정권의 인권 탄압과 소수민족 차별에 반대하고, 민주화 운동을 이끈 라슬로 퇴케시 목사를 체포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헝가리계 개신교 신자들이 전격적으로 펼치게 되었다. 여기에 루마니아 청년들이 가세했고, 중무장한 군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전 세계로 소식이 전해지고 독재자 차우셰스쿠 타도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총과 무기를 들고 무차별적으로 무력을 행사하던 군인들이 사격을 거부하고, 마침내 시민의 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사건 당시에 이란을 방문 중이던 차우셰스쿠는 급히 귀국했다.

이를 계기로 12월 20일에는 부쿠레슈티(Bucharest)에서 10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격화되자 군인은 반기를 들었다. 시민 측과 대통령 친위대가 교전했고, 루마니아는 내전 상태에 빠졌다.

티미쇼아라 집회, 성난 민심의 저항


탈냉전 시기 동유럽에서 벌어진 자유화 바람이 루마니아에도 불었다. 1989년을 기점으로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많은 사회주의국가가 체제를 버리고 민주화 길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루마니아에서도 만성적인 식량 부족과 독재정치로 민주화 열망이 높아져 가는 실정이었다.

전체 국면을 파악하지 못한 독재자는 자신의 건재를 과시할 목적으로 12월 21일, 부쿠레슈티에서 관제 집회를 조직했다. 티미쇼아라 공개 집회였다. 역사적 대반격은 여기서 일어났다. 차우셰스쿠의 연설 도중, 각성한 일부 시민이 그동안 억눌리고 숨죽였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반정부 구호를 외친 것이다.

방송국에서는 생생하게 전국에 중계하던 중이었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심각성을 알고 방송을 제지하고, 통제하려 시도했지만 다시 재개되었다. 이미 때는 늦었다. 걷잡을 수 없는 저항이 계속됐다. 비밀경찰 세쿠리타테가 시위대를 유혈 진압했다. 차우셰스쿠는 경찰로는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해 군대를 동원했다.

12월 22일 아침 9시 30분, 국방장관 바실리 밀레아(Vasile Milea)가 시체로 발견되었다. 차우셰스쿠는 그가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시민과 군인들은 이 사실을 의심했다. 그가 발포 명령을 거부하여 총살당했다고 믿은 것이다. 2005년 있었던 조사에서 바실리 밀레아는 자살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군대가 시민 편으로 돌아섰다.

결국 차우셰스쿠는 헬리콥터로 궁을 탈출했지만, 12월 23일 체포되었고 12월 25일 아내와 함께 총살당했다. 독재의 비극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헬기를 타고 도주하려는 차우셰스쿠 부부는 헬기 조종사의 변심으로 체포되었다. 헬기 조종사의 증언에 따르면 "차우셰스쿠는 북한으로 도주할 생각이었다"고 전해졌다.

혁명 이후 새로운 임시정부, '구국전선(National Salvation Front)'이 구성되었다. 국가정책 전반적인 개혁 조치로 공산당 해체, 다당제 도입, 토지 분배 및 종교의자유 인정 등이 발표됐다.

우연찮게 진행된 혁명 과정을 살펴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 그는 10대 소년 시절 루마니아 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했다.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1974년에 차우세스쿠는 자신의 직책에 대통령직을 추가해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집권 초기 소련의 공산권 간섭에 당당히 맞서는 독자 노선으로 서방국가와 대중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차우세스쿠는 외교 정책으로 중소 분쟁 때, 중화인민공화국과 옛 소비에트연방 중 어느 한편에 가담하지 않는 독자 노선을 걸었다. 그렇지만 그는 민주화 요구에는 저항했다. 그는 표현의자유와 언론을 통제하고 반대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 독재 정치를 했다.

'촛불 몇 개'로 시작된 위대한 혁명


차우셰스쿠는 1970년대 초 편집증(Paranoia) 환자라고 진단받은 적이 있다. 그는 모택동의 문화대혁명과 북한 김일성을 흉내 낸 독재 체제를 구축, 루마니아를 철권 통치했다.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의 통치술에 감명받고 그와 의형제를 맺었다. 김일성을 본받아 스스로를 '카르파디아산맥의 천재(geniul din Carpati)'로 포장해 개인숭배를 시작했다.

수백만 지식인과 학생, 종교인을 투옥시켰고, 그중 많은 인사가 옥중에서 죽어 나갔다. 차우셰스쿠는 비밀경찰 총책임자, 국가경제기획원 부원장 등, 주요 국가기구 수장 자리를 모두 친인척으로 채웠다. 차우셰스쿠는 족벌 정치 외에 비밀경찰 세쿠리타테를 앞세운 공포정치를 펼쳤다. 빈틈없는 감시로 루마니아 국민은 집안에서도 자유롭게 말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어린이들의 동심(童心)을 국민 감시에 악용했다. 초등학교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학부모 이야기'를 하게 해 정보를 취득했다. 담임선생을 통해 각 가정을 철저하게 감시하기도 했다. 거미줄 같은 조직망으로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네 가정 중 한 명이 비밀경찰이었다.

2,000만 인구 가운데 도청기가 300만 대가 넘었다. 도처에 1,000여 개의 도청 센터가 배치돼 있었다. 종교도 금지시켰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에 충실하게 따른 것이다. 스스로 신이 되려 했다.

국민을 탄압하고 억압했던 철권 통치자의 마지막은 비참했다. 그의 조종사 바실레 말루찬 중령은 기체가 요동치게 조종하면서 비행기를 향해 대공사격이 올라온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이에 차우셰스쿠 일행이 위험을 느끼자 도로가에 비상착륙을 한다.

도로가에서 차량을 징발해 타고 가던 도중 운전기사는 대통령 일행을 속인다. 안전하다고 속인 뒤 대통령 일행을 농가에 숨긴 것. 이 사실은 곧바로 혁명군에게 전달됐고, 대통령 일행은 체포되었다. 그 후 재판 절차를 거쳐, 살인죄와 경제 파탄죄를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라슬로 퇴케스 목사는 나중에 무사히 살아 돌아온다. 그는 시민들을 위로하고자 병원을 찾았다. 한 학생은 그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목사님 저는 다리가 잘려 나갔어도 실망하지 않아요. 첫 번째 촛불을 밝힌 사람이 저였으니까요. 한쪽 다리만으로도 평생을 자랑스레 살아가겠습니다."

루마니아 혁명은 교회에서 밝힌 몇 개의 촛불로 시작되었다. 1989년 12월 성탄절을 앞두고, 차우셰스쿠 정권은 종언을 고했다. 지금도 그 역사 현장에 있던 루마니아 티미쇼아라시 중앙광장 가까운 곳에 라슬로 퇴케스 목사가 섬겼던 개혁교회 건물이 있다. 그 돌로 된 건물 벽에는 푯말이 붙어 있다. 4개 국어로 새겨진 글귀가 있다고 한다.

"바로 이곳에서 한 독재자를 쓰러뜨린 위대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황준배 / <카리스마적 리더십>, <통일과 크리스천 리더십>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