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일 설교중 들은 이용도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어느날 그가 강대상에서 설교를 시작하기전 한 마디 말씀도 없이 그저 30분동안 울기만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한데, 당시 교회는 진리를 잃고 교인들은 세상적으로 심하게 타락하고 ,,,,,,
하나님 앞에서 그저 펑펑 울었다.
그날 집회는 회개의 역사속에서 뜨거운 성령의 불이 임했다.
그가 서는 곳마다 이와같은 성령의 역사와 부흥의 불길이 임했다.
“시무언(是無言) - 말하지 않는 것은 좋다. 이 세상은 말 많은 세상입니다. 하지 않아도 좋을 말, 남을 해하는 말이 얼마나 많은 세상입니까. 자기의 아름다운 뜻을 남에게 전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말을 가지고 얼마나 남을 해하고 세상을 망치는 것입니까. 이 인류 사회의 모든 악, 모든 싸움 모든 화근은 다 이 말에서 되는 것임에 나는 말이 없기를 바라며 또 벙어리가 되어지기 위하여 염원 하는 바이올시다.”(<이용도 목사전>, 변종호, 이용도 목사전집 제2권, 장안문화사, 1993, 77~78쪽)
1. 들어가는 말
시무언 이용도 목사가 한국 기독교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지대하다. 33년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리교 역사 안에 또 기독교 역사 안에 많은 흔적들을 남겼으며 오늘날 교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많은 가르침을 그에게서 배울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필자는 이러한 이용도 목사의 삶의 핵심을 감히 고난(苦難)의 영성이라 칭하여 본다. 이용도 목사, 그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고난의 길을 따라 걷기 원하였으며, 고난 가운데 기쁨을 진정으로 아는 이였다. 이제 그의 생애를 통하여 나타난 그의 고난(苦難)의 영성을 조명하며, 오늘날의 교회에 그리고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나누어보고자 한다.
2. 시대적 상황
1) 정치적 상황
1901~1933년, 33년 동안의 짧았던 그의 생애는 정치적 혼란기였다. 정치적으로는 1910년 8월 29일 조선은 국가를 일본에게 빼앗기게 되었고 일본은 한일합방 후 민족말살 정책을 시도하였다. 1919년 이에 반하여 민족의 독립과 주권회복을 염원하며 3·1운동이 일어났으나 이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그 상실감과 좌절감으로 민족적 비극의 상황은 더욱더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민족말살정책은 이 운동을 계기로 문화정치로 변하였다. 일제의 지배 하에서 고통을 받으며 일제의 지배를 극복하려는 많은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한국인들은 1926년 6·10만세 사건, 학생들의 동맹휴교(1926~1928),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1년 만주사변과 같은 일본 저항사건을 일으켰다. 사회는 날로 어지러워져갔고 경제적으로는 봉건주의의 착취와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하여 농민들은 땅을 버리고 도시로 들어가는 이농현상을 초래했다. 일본의 탄압은 농민과 노동자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정치·경제적 수탈을 하여, 국민의 자포자기의 성향을 가지게 했고, 민족적 좌절감과 허탈감 등으로 자신의 고통을 잊고자 하는 도피적 현상이 현저히 발생하게 되었다.
2) 종교적 상황
일본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많은 피해를 가져왔다. 합방을 시작하자마자 교회의 바탕을 제거하고 한국 민족의 정신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근절을 꾀하려고 노력하였다.
1920년대까지 개신교를 이끌어 나간 선교사들과 개신교 지도자들은 민족 비극의 역사 속에서 근본주의적 영적 심령 대 부흥회를 통해 민족의 아픈 현실을 치유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한국교회 역시 그 성격 자체가 탈사회적,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20년대 30년대 들어서 교회 공동체가 민중의 삶에 새 힘을 불어 넣어주지 못하자 일반 지식층은 교회 공동체의 무기력과 기성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 비판하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교회는 점차 영적인 세계만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일제의 압제에 대항한 3·1운동 이후 사회운동·민족운동·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망명·변절·순교·활동 정지라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민중들은 지도력과 구심점을 상실해버리고 말았으며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종말론 지향적, 신비주의적, 내세 지향적 색채가 강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교회 안에서 교파 신학에 근거한 교파 중심주의와 교권 의식으로 말미암아 교파간의 갈등과 마찰, 선교사의 우월주의와 한국인 사이의 갈등, 사회주의와 진보 계열의 교회 비판, 지방색이 가미된 교권 분열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점차로 외적인 제도와 조직에 매달려 내적 생명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과 함께 기독교는 지식인층에 번지고 있는 사회주의 운동에 의한 강렬한 도전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 사회주의 운동은 기독교가 초기 선교에서 지향한 교육과 계몽운동, 사회개혁 운동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민중을 동원하여 세속적 사회 구조를 혁명적으로 개혁하여 자본주의의 하수인으로서 교회가 아니라 민중이 주도하는 교회와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용도는 민중들의 아픔과 함께하며 고난의 길을 걸어 나갔다. 그는 영적 부흥운동을 이끌었으며 그의 부흥운동은 당시의 제도권 교회에서 배척을 받으면서도 새로운 차원의 소망을 제시하여 주는 민중적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이용도의 생애
그의 생애는 그가 고난(苦難)의 영성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그 뿌리를 형성하였다. 이제 그의 영성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 그의 생애로 들어가 보자.
1) 소년시대
이용도는 1901년 4월 6일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 아버지 이덕흥 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에 특별히 뛰어난 사실이 없었고 그의 어린 시절 또한 특별히 기록할 만한 사실이 없다. 그의 아버지는 장터의 거간꾼으로 난폭한 성격에 대주가였고, 어머니는 시변리 교회의 전도부인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들은 몹시 가난하였으며, 부친으로 인해 언제나 불안하고 불화한 분위기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이용도에게 어려서부터 교회 생활을 하게 한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삶을 이어갔다. 그는 훗날 그의 일기에서 “나의 오늘의 있음은 오로지 나의 어머니의 기도에 인함이로다.”(일기 1930. 5. 17)라고 했다.
이용도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어려서 잔병을 많이 앓고 신경이 과민한 편이었고 울기 잘하는 점으로 보아 보통 이하의 변변치 않은 아이였다. 그래서 부형들은 그를 초저녁에 죽을 아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다니며 몸도 건강하여지고 두뇌도 발달하여 선생님의 총애를 받고 여러 친구들을 거느리고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가 신앙의 어머니를 항상 박해하고 압제하는 가운데 용도는 어려서부터 기도생활을 하는 아이가 되었다.
부형들의 말과 용도의 간증에 의하면 13세 때부터 예배당 종각에 올라 여러 시간 혹은 밤새도록 기도를 올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늘 기도로 살았던 용도는 한밤중 백부님 심부름을 하다가 처음으로 환상을 보는 경험도 하게 된다. 14~15세가 되자 그의 재질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는 말재주가 비상하여 15~16세 때 이미 윤치호, 이상재, 양주삼 씨 등에 비상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2) 중학시대
1915년 개성 한영서원(후에 송도고등 보통학교가 됨)에 입학한 그는 남들이 4년이면 다닐 학교를 9년 동안이나 다녔다. 가난했던 이용도는 학교 부설 직조공장에서 일하는 등 고학을 하였으며 1919년부터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만세시위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그는 이로 인해 2개월간 유치장 생활을 하였고 그 후 12월에는 조선 수비단 사건으로 신계 경찰서에 검거되었으며 다음해 2월 11일 기원절 사건으로 들어가 6개월간 투옥되었다.
1921년 성탄절에는 불온문서 사건으로 또다시 6개월간 투옥되었고 1922년 가을에는 태평양회의 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 징역을 선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923년 8월에 석방되었다. 5번의 투옥과 3년여의 감옥살이를 겪으면서도 이용도는 굴하지 않고 열성적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1923년 8월에 출옥한 이용도는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복교를 시도하였으나 여의치 않고 교장이었던 왓슨은 비공식적으로 졸업의 자격을 주어 1924년 2월 협성신학교 영문과에 입학하도록 돕는다.
3) 신학시대
신학교에 입학한 이용도는 아직도 민족독립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신학공부보다는 정치·사회·신문·잡지·문학·소설·법률 등에 관한 책을 탐독하여 이론싸움이나 논쟁을 즐겼고, 강의 시간에는 괴상한 질문으로 교수들에게는 이론가·논쟁가·말썽꾼·경우꾼·싸움꾼·과격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시·노래·연극 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가극과 동화와 동요와 아동설교에 취미를 붙여 주일학교사업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이호빈과 이환신을 만나게 되었고 1926년 그는 폐병 3기로 판명이 되어 이환신의 고향인 평남 강동에 휴양을 가게 되었다. 강동에서 함께 간 이환신과 부흥회 인도를 부탁받게 되었고 첫날 사회를 보던 그는 찬송 149장(오늘날 163장)을 부르며 울기 시작하였다. 둘째 날 그는 감격과 감동의 울음바다를 이루는 설교를 하였고 계속된 부흥회로 한 달간을 지내며 몸의 원기도 회복되고 기분도 상쾌하게 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강동을 다녀온 이후 그는 “바치라, 그저 완전히 바치라. 주님께 완전치 바치기만 하면 내 모든 문제는 주님께서 맡아 주관하시고 내 몸 전체도 주님께서 뜻대로 잘 맡아 사용하신다”라며 주님이 모든 문제를 주관하심에 확신을 얻고 중생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4) 목회시대
신학교 4학년 2학기, 그는 강원도 통천으로 파송되었다. 1928년 1월 28일 졸업을 한 그는 부임초기 약 반년동안 인본주의 신앙에로 전락하여 중심(重心)을 잃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0일간의 금식 산 기도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신앙혁명을 이루어냈다.
1928년 12월 24일 새벽에 마귀들과의 싸움 후 그는 엄청난 영적 능력과 권세를 갖게 되었으며, 1929년 20여 곳의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불이 떨어지고 그가 나서기만 하면 교회가 통회하고 갱생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부흥회가 계속되었으나 교단에서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겨 교역자의 이동시기도 아닌 1930년 10월 16일에 주일학교연합회 간사로 그를 파송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되고 인기가 높아지자 교단은 그에게 1931년 가을, 유학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그는 미국 사람들의 인본주의적 사고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유학을 준비하였으나 교단은 다른 마음으로 그를 내쫓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성사되지 않았고 1931년 그는 지방순회 목사로 파송되었다. 이 무렵 그는 주님의 섭리를 말로 다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오직 주님과만 연락하면서 그 지시에 의해서 주님의 역사에 복종만 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용도 목사는 자신의 호를 ‘시무언’(是無言)이라고 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복음을 증거하고 많은 이들을 눈물로 회개하도록 인도하였다. 이러한 이용도 목사의 부흥사역을 살펴보기 위해서 그가 인도한 집회를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다음의 몇몇 집회 사례들을 살펴보면 그 사역에 대해 쉽사리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 평양중앙교회 부흥회(1931년 2월 14일부터 3일간)
첫 날밤의 설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이날 밤의 모든 광경과 상황은 벌써 땅의 것이나 땅에서의 것은 아니었다. 부르는 찬송소리도 사람의 노래가 아니요, 천군 천사의 것이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음성 모두가 사람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설명은 사람의 벨을 갈래갈래 끊어내는 것이었다. ‘빌라도의 심판’을 설명하실 때 내 곁에 앉은 변호사가 너무도 울고 있으매 내 가슴이 아픔을 느꼈다. 1000여 명의 군중은 그저 울음이다. 수천 개의 눈은 그저 눈물이다. 목석도 이 자리에서는 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목사님의 설교는 사람의 심중을 찌르고 갈라놓는 고로 그 설교 앞에서는 죄를 두고는 참을 수 없고 흐린 마음은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회당이 정말 터지도록 사람이 모였다. 그 예배당이 500명 수용하는 집인데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안에 사람이 어찌나 모여들어 복작거렸는지 담벼락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회당이 무너진다는 소동까지 있었다. 사람이 겹겹이 몰려 무릎도 사람에게 눌리고 등도 또한 사람에게 눌리어 무릎을 움직여볼 수도 없고 등을 펴볼 수도 없었다. 이렇게 전신에 고랑을 채워 놓고는 몇 분 동안도 참기 어려울 텐데 괴로움을 모르고 그의 말에 취하였다.
설교를 한 시간이나 두 시간만은 안한다. 대개 세 시간 네 시간이요, 어떤 때는 선 자리에서 다섯 시간 여섯 시간 일곱 시간까지 해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긴 시간을 그렇게 쭈그리고 있어도 졸음이 오거나 아픔을 느끼는 자가 없고 죄를 회개하고 주를 만나는 기쁨에 그저 찬송이요, 그저 춤이 나올 뿐이었다.
(2) 산정현교회 집회 (1931년 12월 중순 5일간)
산정현의 5일간은 더욱 열변이었고 더욱 신적(新的)인 활동이었다. 그 넓은 예배당이 빽빽 들어차고 마당까지 가득 가득 들어찬 것을 보아도 알 것이다. 산정현교회 집회 중 가장 힘 있게 외치고 가장 많은 사람에게 가장 큰 충격과 감동을 준 때는 마지막 날 저녁일 것이다.
예수께서 일생동안 조소·멸시·구박을 받으며 살던 정경의 묘사를 두 시간 동안이나 하고서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는 광경을 눈물로 설명하더니 운명하실 때에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그 바짝 마른 몸으로, 땀에 번쩍이는 얼굴과 두 손을 하늘로 향하여 울음 섞인 떨리는 목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심장을 꿰뚫고 사람의 뼛속에 깊이 박히고, 사람의 두뇌에 깊이 뿌리박고 잠긴 이 천성 천경에 모인 무리 수천 명은 너무 기가 막히고 너무 끔찍하여 참아볼 수 없이 머리를 숙이거나 얼굴을 뒤로 돌리고 흐득 흐득 우는 것이었다.
이때의 이 충격과 음성이 길이 길이 산정현교회원 일동의 신앙지침이 되고 생활원리가 된 것이라고 믿는다. 이때에 이렇게 산정현교회에 뿌린 이용도 목사의 피땀의 씨가 옥토에 떨어져 잘 자라났다. 그 후로 산정현교회는 평양에서 가장 은혜롭고 건실하고 굳센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3) 간도 용정촌 교회 집회(1931년 4월 18일부터 보름간)
그 설교가 어찌도 열렬하고 권위가 있으며 생명의 불길이 뿜어 나왔는지 구경꾼이나 불신자까지도 사람의 말이 아니라고 놀래고, 실로 성령에 끌리어 불타는 애곡의 간증이었다. 천군(天軍)이 호령하는 뇌성과도 같았다. 청중은 울다가 무서워서 떨었고 무서워 떨다가 다시 울면서도 남이 알지 못하는 시원한 맛을 가슴에 맛보게 되었다. 폐회를 선언하나 헤어질 줄을 몰랐고 언제든지 집회 정각 전에 사람들은 만원으로 문밖까지 메웠다.
(4) 안주읍 교회 집회(1932년 10월 3일부터 8일간)
안주에서의 집회 광경에는 누구나 다 놀랐다. 밤 7시부터 예배를 시작하여 설교를 3~4시간씩 하고, 그리고는 밤이 깊도록 수백 명의 신자에게 안수기도를 하고 그리고 나서는 강대상 아래 엎드려서, 기도로서 밤을 완전히 세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오전 공부, 또 계속하여 오후 공부 이리하여 안주집회 8일간은 문자 그대로의 불면·불휴이었다. 그렇게 약해 보이는 몸이 그렇게 철석보다 더 강하고 단단함에는 누구나 다 놀랐다.
어느 날 밤에는 요한복음 5장에서 끝장까지 성경낭독만 하였는데 그 성경낭독이 어찌도 사람을 감동시키고 울리는지 참 그런 역사는 처음 보았다.
5) 핍박과 박해의 시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
이처럼 영적으로 풍성했던 이용도 목사의 사역의 이면에는 메마른 현실이 있었다. 그는 위의 말씀처럼 수많은 영적싸움과 또 많은 반대세력들과도 부딪치며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이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그에게 어떤 핍박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⑴ 1931년도 황해노회에서는 이용도매장 결의가 가결되었다. 지난 봄 재령 교회의 집회에서 너무도 굉장한 역사가 일어나고 은혜가 크게 내릴 때 일각에서는 시기의 눈으로 보았었다. 그들은 교회에 충실치 못한 무능한 교직자들이었다. 이어서 그들은 이용도 매장 결의를 가결하였으며 그 결의 사항은 6개 조항이었다.
① 이용도는 재령교회를 훼방한다.
② 여신도들과 서신 거래를 자주한다.
③ 불을 끄고 기도를 한다.
④ 교역자를 공격한다.
⑤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선전한다. (<성서조선>은 1927년 7월에 발간된 기독교 계간지로 조선 성서연구회의 중심인물인 김교신, 함석헌 등의 노력으로 창간된 무교회주의 계열의 신앙잡지다. 일본의 무교회주의 신앙과 우찌무라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은 학국 유학생 정상운·김교신·함석헌·양인성·유석동·송두용 등은 일본에서부터 별도의 성서연구모임을 가진 바 있고 귀국 후에 동인지로서의 신앙 잡지를 발간하기로 합의하여 만든 것이다.-필자 주)
⑥ 그는 무교회주의자요,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자이니 황해노회지경 안에서는 그를 청하지 말자.
⑵ 평양노회 또한 이용도에 관하여 금족령을 통과시켰다. 이용도 목사의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은 평양의 신도들이 신앙의 내용과 생활태도에 변동을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가 무능한 교역자들에게는 공포와 위협으로 나타났으며, 자기의 지위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평양노회에서는 한 개의 법안을 통과 시켰는데, 그 결의 사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이용도는 거짓말쟁이다.
② 이용도는 대접받기를 좋아한다.
③ 이용도는 파괴주의자다.
④ 이용도는 질서를 혼란케 하는 자다.
⑤ 이용도를 세우면 본 교회 담당목사가 푸대접을 받아 살 길이 막연해진다. 그러므로 이용도를 우리 노회지경 안에 들이지 말자.
6)임종
1933년 10월 2일 그는 가족이 둘러앉은 가운데 환하게 얼굴에 광채를 띠며 하나님나라로 입성하였다. 그는 33세의 나이로 그가 그토록 흠모하고 열애하던 예수님이 운명하시던 때와 같은 나이에 열정적이었던 그의 복음의 꽃은 시들었던 것이다. 비록 그의 육적 꽃은 눈에서 멀어져 갔으나 그의 열정적 복음 선포는 많은 이들의 영혼 가운데 활짝 핀 꽃으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된다.(계속)
함은규/ 협성대학교 M.A 3/4학기 역사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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