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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중 들은 김철훈 목사 - 주기철 목사 후임

배남준 2018. 10. 28. 16:42



애국자이며 목사이며 학자인 순교자 김철훈 목사 (19)

 

 

예상된 위기는 현실로 나타났다 (1)

 

한번 결심한 그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었다. 때는 19482월 중순이었다. 이삿짐을 옮긴 김 목사는 역사가 깊은 산정현교회 예배당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그 교회가 참 아름답고 웅장하기도 하거니와 우아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 제단에 우뚝 선 김 목사 앞엔 몇 사람의 성도들만 달랑 나와 앉아 있었다. 찬바람이 날 정도였다. 김 목사는 우선 동평양교회에 기도 열심히 하며 신앙 좋은 10여명의 성도들에게 서신(書信)을 띄웠다.

 

능력이 있는 성도님들의 기도 지원이 아쉽습니다. 부디 산정현교회에 성령의 불이 내리도록 기도해 주십시오.’편지를 부치고 난 후 김 목사는 각오를 단단히 하였고, 교회가 본궤도에 오르기 전에는 절대로 집에서 자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성가대석 옆에 작은 방을 치우고는 거기에다 임시 기도의 제단을 쌓았다. 저녁이면 이곳에서 밤새도록 기도하고 성경 읽고 말씀을 준비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새벽 기도회에 많은 교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기도 소리가 높아져갔다. 회개의 눈물로 새벽의 어두움을 밝히었다.

 

새벽 기도가 이처럼 뜨거워지자 온 교회가 뜨거워져 갔다. 낮에는 심방에 밤에는 철야기도로 이어가니 교회가 하루하루 다르게 과거의 영광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김철훈 목사는 이 무렵 평양신학교 강의를 나가는 등 대외 활동에도 열심을 다 하였다.

 

 

예상된 위기는 현실로 나타났다

 

이렇게 지내오는 중 한 가지 근심 걱정이 되는 것은 공산당의 행패였다. 하루가 다르게 교회를 괴롭히고 교역자를 납치해 갔다. 살벌한 사회 분위기였다. 유계준 장로는 혹시나 해서 백인숙(白寅淑) 전도사(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 39년 졸업)에게 항상 김철훈 목사는 밖에 혼자 다니지 않도록 수행하라는 당부하기까지 하였었다.

 

1948625일에 유계준 장로의 염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이 날은 금요일이었는데 연화동교회에 평소 친하게 지냈던 전도사의 장례식이 있었다. 김 목사는 장례시간에 앞당겨 이순경(李順璟) 목사(전 동숭교회 담임목사, 평신 40)를 모()교회의 집사와 만나게 해주겠다 하며 혼자 연화동교회(連花洞敎會)를 향해 걸어갔다.

 

이순경 목사는 김철훈 목사가 전에 용강읍교회에서 시무할 때에 새벽마다 일찍 나와 기도하던 청년이었는데 당시 그의 부모님은 안 계셨었고 누님 댁인 양복점에서 일 배우던 젊은이로, 목회에 뜻을 가지고 가끔씩 여러 가지 의논을 하러 왔었다. 그가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방학 때면 김 목사의 집에 와서 한 가족처럼 지냈었다. 그는 김 목사의 서재에 있는 그 많은 책을 모두 읽었을 정도로 책을 즐겼고 그 속에 파묻혀 살았었다. 그가 결혼할 때에도 교회를 옮길 때에도 늘 김철훈 목사에게 의논을 했었다.

 

그 후에 그는 목사로 임직하여 안주노회 순안읍교회(順安邑敎會) 담임목사로 있었는데 진남포 고등성경학교에서 선생으로 오라는 요청이 있어서 김철훈 목사가 이를 자문하기를, 이순경 목사는 학교보다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면서, 평양에 있는 교회에 가도록 주선하여 함께 평양성을 지키자고 했었다. 김철훈 목사는 그 후 624일 평양신학교 방학식에 참석했다가 귀가하더니 그 다음 날은 첫차로 찾아오는 이순경 목사를 만나러 갈 예정이라고 사모에게 말하였었다.

 

그 다음날 새벽예배를 마친 김철훈 목사는 평양역으로 나가 이순경 목사를 만나 약속한 모()교회의 집사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나갔다가 도중에 공산당에게 납치당한 것으로 주변 사람들은 모두 생각하고 있다.

 

김철훈 목사는 성격이 강직한데다 1946113일인 주일에 선거하는 것을 김일성 면전에서 반대한 일이 있었고,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여 공산당에 충성하라는 것을 거절한 것 등으로 인하여 늘 당국의 감시를 받아오던 터이며, 이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무도 모르게 증발되는 때인지라 김철훈 목사를 붙들어 간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은 하였으나 아무도 그 현장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날 만나기로 했던 그 집사는 예감이 이상해서 김 목사가 혹시 연화동교회로 먼저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던 길을 멈추고 그 교회 현장에 가 보았었으나 거기에는 없었다. 실망한 그는 바로 산정현교회 사택으로 찾아가 봤지만 거기에도 김철훈 목사는 안 계셨다. ‘그렇다면 어디로 갔을까?’ 그는 걱정이 되어 백방으로 찾아보았으나 행방이 묘연하였다. 저녁에는 귀가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이틀, 사흘이 흘러가도 영영 소식이 두절되어 산정현교회 교우들과 가족들의 안타까움만 더해 갔다. 그는 그렇게 납치되어 꽃다운 44세로 희생의 제물이 되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김철훈 목사는 어려움에 처해있는 평양 산정현교회를 일으키기 위하여 섬겨 오던 평안한 동평양교회를 떠나왔었다. 이는 그가 안일한 길을 버리고 험난한 순교의 길을 택하여 하나님의 의의를 위하여 끝까지 악령들과 싸우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평양 산정현교회는 소양 주기철(朱基徹) 목사가 일사각오정신으로 목회하시다 순교하였고 그 후임 김철훈 목사는 항일 학생만세 운동과 반 우상숭배인 신사참배 반대와 공산당에 항거하다 순교하였다. 그분의 후임 목사로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정일선(丁一善) 목사, 평양 산정현교회를 대들보처럼 굳건히 지키던 유계준(劉啓俊) 장로, 청렴 전도인의 대명사인 백인숙(白寅淑) 전도사와 충성된 계희중 집사로 이어지는 순교자를 배출한 평양 산정현교회는 그 이름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큰 것으로 생각된다.

 

 

이 순교자에 대한 일반적인 부분에 대하여 잠시 돌이켜보면 초대교회 교부 가운데 터툴리안(Tertullian Carthage 160-220AD)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고 설파하였다.

 

이에 관련하여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면 많은 순교자들이 등장하여 하늘의 뜻을 이루어가는 모습을 알려주고 있다. 그 중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분인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하여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使徒) 외에 교인들은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소아시아를 포함한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세계 복음화의 밑거름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며 순교자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라는 분이다.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선교사는 18637월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상하이로 갔다. 그런데 토마스 선교사의 사모님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곧 병사하시고, 더욱이 그는 상해주재 선교사 책임자인 무어헤르 선교사와의 불화까지 겹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청나라 해상세관의 통역으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중국에 와 있던 김자평, 최선일이라는 천주교인을 지푸라는 곳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들과 대화 중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일로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18659월 서해안 백령도에 도착하여, 2개월 반 동안 인근 선진포, 석호정, 만경대 등을 돌며 한국말을 배우기도 하고 1백여 권의 성경을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선교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해상에서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18661월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 해인 18668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지푸지부의 후원을 받아 통역사 자격으로 미국 국적의 무장한 상선 제너럴셔먼호에 승선하여 대동강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금세 장로<영세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