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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지옥] ‘마음 지옥’에서 빛을 구하다

배남준 2018. 9. 29. 07:41
[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지옥] ‘마음 지옥’에서 빛을 구하다 기사의 사진
                    
인간은 누구나 죄를 안고 태어나 구원을 향해 나아간다. 단테는 ‘신곡’에서 천국은 지옥과 연옥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수정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인 하나님 선물로 묘사한다. 픽사베이

 인간은 천국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순례자들이다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신곡(神曲)’은 지옥, 연옥, 천국으로 이어지는 영혼의 순례를 담은 대서사시다. 단테가 19년에 걸쳐 완성한 ‘신곡’은 기독교 문학 중 최고봉으로 평가되는 신앙의 찬가이며 기독교적 세계관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인생의 중반기에 올바른 길을 벗어난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어두운 숲 속이었다”로 시작하는 신곡은 어두운 숲 속에서 방황하던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라는 인도자를 만나 지옥과 연옥을 여행하고 베아트리체에 이끌려 천국을 순례하는 내용이다.

‘지옥의 문’, 모든 희망을 버리라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웠던 이탈리아 피렌체. 그 도시 중심부에 있는 산타 마르게르타 거리에 ‘단테의 집’이 있다. 중세풍의 우뚝 솟은 3층 벽돌집은 현재 단테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외벽에 청동으로 만들어진 단테의 흉상이 인상적이다. 대서사시를 쓴 시인이 이지적인 눈빛으로 이곳을 지나는 이들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신곡’은 왜 천국이 아닌 지옥부터 이야기했을까. 단테는 ‘신곡’에서 천국만 보여주지도 않고 천국을 먼저 가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지옥은 천국에 이르는 길목, 천국은 지옥 없이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테가 구원만을 이야기하려 했다면 지옥은 보여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단테의 고뇌는 지옥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왜 죄를 지었을까, 죄짓지 않는 길은 없었을까. 죄에 대해 근원적 성찰을 했다. 단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높이 평가했지만 겸손도 강조했다. 인간은 겸손을 통해 죄를 멀리할 수 있고,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인간의 구원을 가로막는 것을 탐욕과 오만, 음욕으로 파악했다. 이런 것들이 지나치면 죄가 된다고 봤다.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절제하지 못하면 죄가 되는 것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단테는 인류 영혼의 대표자이다. 지옥과 연옥은 고뇌의 상징, 유혹의 세계이다. 단테가 이런 과정을 거쳐 천국에 이르게 되는 것은 인간은 고뇌를 통해 영혼을 정화할 수 있다는 작가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단테가 헤매던 어둠의 숲처럼 우리도 고통과 절망의 숲에 빠질 때가 있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은 천국보다 지옥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돈과 권위의 잣대로 무시당할 때, 내 감정과 상관없이 미소와 친절을 강요당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 후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떠들썩할 때, 퇴직금으로 시작한 자영업이 실패해 노후가 막막할 때…. 누구도 예외 없이 ‘마음 지옥’에 빠진다.

작품 속에 등장한 ‘지옥의 문’에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슬픔의 나라로 가고자 하는 자 있거든 나를 거쳐 가라. 영원의 가책을 만나고자 하는 자 나를 거쳐 가라. 파멸의 사람들에 끼고자 하는 자 나를 거쳐 가라. 정의는 지존하신 주를 움직여 주의 위력, 지상의 지혜, 그리고 사랑의 근본이 나를 만들었노라. 내 앞에 창조된 것이 오직 영원 말고는 없나니, 나는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니라. 나를 거쳐 가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리라.”(‘신곡’ 지옥 3곡 중에서)

어둠의 숲에서 길을 잃을 때

‘모든 희망을 버리라’라는 마지막 문장이 비장한 대못으로 가슴에 박힌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안고 태어나 구원을 향해 나아간다. 현실 속에 도사리는 마음 지옥에서 우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할까. 내 삶이 지옥 같을 때 주님은 어디에 계시냐고, 정말 살아계시긴 하시냐고 외칠 때 우리는 마음의 지옥에 갇히게 된다. 현실에서 느끼는 지옥은 주관적이고 개별적이다. 우리 마음에 원망 불평 불신 낙담 좌절 절망 등이 담기면 심령은 혼탁해진다. 탁해진 심령은 곧 주님을 볼 수 없는 고립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감사를 주셨다. 사소한 것에 감사를 시작으로 범사에 감사함에 이르면 선한 양심이 살아나고, 선한 양심이 살아나면 상황과 사람이 재해석된다. 재해석은 주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 감사가 넘치면 혼탁해진 우리의 심령이 정결한 심령으로 회복될 것이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행복하게 살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는 것보다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 부유하지만 형편이 나아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 사람보다 소박한 삶을 살지만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행복이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조건을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 인생의 소소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좌우된다. 지금의 삶이 어렵고 힘이 들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하고 산다면 두려움은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은 “과거에 내가 네게 했던 일을 기억하라”고 처방하신다.(시 56:8∼11) 지옥 같은 현실,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을 때 천국으로 바뀔 수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라.”(롬 10:10)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의 시각이 달라진다면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 가장 힘들 때 가장 위대한 일을 하기도 한다. 단테는 가장 힘든 시기에 걸작 ‘신곡’을 썼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나

당시 작품을 쓸 때 단테 역시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신데 어떻게 악한 사람이 왜 선한 사람보다 더 잘 살고 있으며, 국가 간의 전쟁은 끊이지 않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바로잡을 힘이 있으면서도 쓰지 않는가”라고 절규했을 것이다. “주의 정의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의 깊은 뜻은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이런 화를 복으로 바꾸실 준비를 갖추고 계십니까?”(‘신곡’ 연옥 6곡 중에서)

단테는 ‘신곡’을 통해 자신이 평생 고민했던 종교 문제와 정치·윤리 문제들을 보여주며 문제의 해답을 상징적으로 제시했다. 지옥과 연옥 천국에 이르는 여행을 하면서 모순되고 불합리한 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복음이란 결론을 내렸다.

그의 대부분의 걸작들은 이 시기에 쓰였다.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말이다. 단테의 ‘신곡’은 아직까지도 천국으로 가는 길을 찾는 사람들의 소중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천국은 지옥과 연옥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수정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물로 묘사된다. 천국으로 가는 여정은 죄에서 회개로, 회개에서 구원으로 진보하는 연습의 과정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상의 행복은 도덕적인 덕을 실천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고, 천상의 행복은 믿음 소망 사랑의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삶을 영위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악을 계속 행할 때엔 현실이 지옥 될 수 있고, 영원한 행복과 평화란 것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고통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 보았다. 인생의 고통에 의해 오를 수 있는 천국은 복음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경공부와 봉사활동을 열심히 해도 구원에 대한 확신, 천국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선행 윤리 도덕의 잣대로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 예심교회 김예식 목사는 “선행은 구원의 열매이지 조건이 아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얻어내시고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자격이 없지만 구원을 선물로 받았으니 천국에 갈 자격이 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천국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순례자들이다. 지상의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윤리적, 지적 미덕에 따라 살아가야 하지만 영원의 행복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이 땅에 이미 이뤄진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 지옥에 하나 더
피렌체에서 쫓겨난 단테 소금처럼 짠 빵맛을 알았다


단테는 ‘신곡’ 지옥에서 동시대의 인물을 많이 넣어 묘사했다. 인간의 죄의식을 파헤치며 말하고자 한 것은 일종의 정치적인 것일 수도 있다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단테가 세상에 대항하는 방법은 글쓰기였다. 그가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역사적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1300년을 전후해 이탈리아는 정치적 혼란 속에 놓여 있었다. 피렌체는 ‘꽃의 도시’라는 뜻이다. 그러나 당시 피렌체는 평화와 사랑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피비린내 나는 정쟁(政爭)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끝없는 싸움이 전개되던 도시였다. 그는 중요한 사회문제의 해결책을 시로써 구체화한 사람이었다. 그가 만난 문제들은 성서의 가르침과 인간생활, 교회의 권위와 국가의 권위 사이의 갈등 등이다. 1295∼1302년 단테는 피렌체의 정치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1302년 정치적인 분쟁에 휘말려 반역죄와 공금횡령죄의 누명을 쓰고 영구 추방을 당하기에 이른다.

그는 “외지를 떠돌며 먹는 빵이 소금처럼 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남의 집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지도 알게 됐다. 그렇지만 나의 마음을 가장 괴롭힌 것은 사악하고 맹목적인 사회였다”라고 말했다. 단테는 역경 속에서도 인간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예리하게 관찰해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35세에 추방돼 이곳저곳 유랑생활을 하면서 피렌체 시민들이 자신을 계관시인으로 맞이해줄 것을 소원했지만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신곡의 천국 편을 겨우 끝낸 후 1321년 말리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단테는 그토록 사랑했던 고향 피렌체에 묻히지 못하고 라벤나의 성 프란체스코 사원에 잠들어 있다.

피렌체(이탈리아)=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