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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정트리오(명훈 경화 명화)를 키운 -어머니 이원숙 목사

배남준 2018. 9. 14. 21:28


-이원숙

  - 이원숙 여사 (가운데)-



안드레 명상 제 93 호 

정명훈을 세계적 지휘자로 만든 사람은 그의 어머니 이원숙 여사였다. 

<2008.10.1발행>


우리나라 양송이 수출이 활기를 띠던 1970년 중반 구미공단에 있는 <주식회사 원>이란 공장을 취재한 일이 있었다. 현장 취재가 끝나자 공장장은 서울 본사의 사장님께서 양송이 수출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 명동에 있는 사무실을 찾았는데 당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사장님은 매우 자상하고 인자한 모습이었다. 사장실 벽에는 당시 국내외에서 한창 명성을 떨치던 정경화, 정명화 연주 모습의 공연광고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여사장은 “제 딸들입니다”하고 자랑을 했다. 그때 비로서 이 여사장이 이들 자매의 어머니 이원숙 여사임을 알게 되었다. 특히 이원숙 여사의 기독교적인 자녀교육은 소문으로는 많이 들었지만 직접 만나보니 자상하고 인자함 그리고 신앙적 인상이 돋보였다.
이날 방송 인터뷰는 제쳐놓고 자식들의 음악공부와 뒷바라지 등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원숙 여사의 7남매 교육은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아버지 이가순(100인 독립유공자의 한 사람)은 이원숙을 원산에 있는 루시여고, 배화여고, 이화여전 등 기독교 계통 학교에서만 공부를 하게 했다.
한창 사춘기에 들어설 때까지 아버지는 딸에게 “내가 그동안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성경책 이상가는 책은 한 번도 못보았다. 성경을 계속 읽어야만 그 속에서 무한한 지혜를 찾을 수 있다.”…… 이 말은 이원숙의 학생시절 아버지로부터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다고 한다. 또한 9남매를 해산할 때마다 출산의 고통을 끝까지 참고 배가 아프다고 한 번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주위에 가깝게 지내는 분이 정말 그 진통을 참을수가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이원숙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이며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이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데 내가 기뻐서 환호성을 지르지는 못할지언정 어떻게 이를 갈고 괴성을 지룰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다.
이원숙 여사는 6.25전쟁 난리통에 5살과 1살짜리 두 아들을 병으로 잃게되고 얼마후 부산 피난지에서 다시 아이를 임신했다. 이때 남편 정준채씨는 “지금도 4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 다니기도 힘든데 또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당장 산부인과로 가서 아이를 떼라”고 요구했다. 이날밤 이원숙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뱃속에 있는 아이를 내손으로 죽여 놓고 앞으로 저 아이들이 몸이 아플 때 내가 하나님께 감히 어떻게 기도를 하겠느냐”는 생각이 정신을 번쩍 차리게 했다.
이 일로 세상을 못 볼뻔 했던 명철이가 태어났다.
그런데 명철이가 태어난지 100일만에 또 임신이 되었다. 이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고 이제는 남편에게 이 아이까지 낳아서 기르자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며칠을 고심하다 마침 신앙이 아주 돈독한 선배로부터 강렬한 어조로 훈계를 받았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생명 근원의 창조주가 결정하는 일을 당신의 경솔한 생각으로 뱃 속의 아이를 죽인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이원숙은 이 경고의 말에 감동을 받고 또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오늘날 세계적인 지휘자가 된 정명훈이다. 많은 사람들은 경화, 명화, 명훈 3남매 뿐일줄 알고 있지만 명근, 명철, 명규 등 모두 7남매가 된다. (얼마전 명철씨가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음.)
6.25때 사망한 두 아들을 합치면 모두 9남매를 낳은 셈이다. 6.25 전후만 해도 우리 어머니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야만 그 집안의 훌륭한 며느리로 대접을 받았으며 실제로 당시 서울시장은 아이를 많이 낳은 어머니에게『다산(多産) 표창장』을 주었다.


이원숙 여사의 자녀들 연주회 뒷바라지의 노하우

1980년 12월 23일 남편 정준채씨가 간경화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가는 것을 본 이원숙 여사는 자신의 여생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이원숙 여사는 그동안 하나님으로부터 한 없는 은혜를 받으며 살아왔는데 실제로 하나님의 사역에 크게 동참한 일이 없었음을 회개하고 1986년 미국 뉴욕주 미들타운에 한인교회를 개척하고 1988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원숙 여사가 정트리오를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공 시키기까지 동분서주했던 갖가지 일화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자녀들의 공연일자가 정해지면 이여사의 기도의 열기는 뜨거워진다. 당시 이화여고에서 연주회를 할 때마다 이원숙은 망치와 못을 핸드백에 넣고 연주전날 학교 강당에 가서 나무로 된 의자들을 하나 하나 점검하며 고치기 시작한다.
연주중에 나무의자가 삐걱 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겠끔 미리 못을 박는다. 또한 이화여대에서 연주를 할 때는 이화여대 앞에 있는 신촌역을 찾아서 연주시간에 신촌역을 지나가는 열차의 기관사를 은밀하게 만나 약속을 받는다.
즉 그 시간에 딸의 연주가 시작하고 있으니 열차가 역에 들어올 때 그리고 출발할 때 필수적으로 울리는 기적소리를 내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공연이 있을 때마다 이원숙 여사는 로얄좌석에 조용히 앉아서 관람하지 않는다. 항상 좌석 뒤쪽에서 혹시나 돌발적인 소음이 날까봐 긴장하고 있다. 지난 7월 30일 (2008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정명훈이 지휘하는 아시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공연이 있었다.
공연은 항상 정명훈의 묵상의 기도부터 시작된다.
지휘봉을 꼭 잡은채 보통 20초에서 길게는 30초 이상이 될 때도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 묵상의 기도를 당연하게 이해를 하지만 비 기독교인들에게는 다소 지루하게 보일수도 있다.
이날 묵상기도가 끝나는 순간 로얄석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몇차례 울렸다. 순간 관중들은 매우 안타까운 표정으로 정명훈 지휘자를 바라보았다.
정명훈은 즉시 핸드폰 소리가 난 관중쪽을 뒤돌아 보면서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정명훈씨는 마음 속으로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우리 어머님이 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기절초풍 했을 것이다.”……
 
『라 스칼라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가 된 정명훈
 
지난 9월 10일 (2008년)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에서는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인 이태리의 라 스칼라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공연이 있었다. 정명훈씨가 지휘하는 공연은 항상 표가 매진된다는 것을 이날 공연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입장표에는 “세계 거장들이 가장 사랑하는 오케스트라 라 스칼라”라고 인쇄가 되어 있다.
이미 잘 알려진데로 라 스칼라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1778년 이태리 밀라노에 있는 라 스칼라 극장의 오케스트라를 모체로하여 창단되었다.
1997년 필자는 밀라노 방문때 오페라의 성지라고 하는 이곳 라 스칼라 극장을 꼭 구경하려고 했으나 하필이면 이때 극장이 수리 중이어서 못본 것이 매우 섭섭했다.
『라 스칼라 필하오니 오케스트라』는 창단 227년만에 상임지휘자 제도가 없어지고 객원 지휘자 체제로 바뀌었다.
이때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거장 3명을 선정했는데 그 중에 정명훈씨가 선정된 것은 보통으로 생각할 수 없는 우리의 자랑이다. 정명훈씨는 2006년 라 스칼라 필하모니를 이끌고 바르샤바와 베를린 공연을 했고 2008년 금년은 아시아투어 그리고 2009년에는 북유럽과 독일 연주를 하게 된다. 올해로서(2008년) 창단 230년 전통의 세계적 명문인 이 오케스트라가 세계 각국의 거장들을 제쳐놓고 왜 한국의 정명훈씨를 선택했는지 처음에는 그 선정의 배경을 잘 몰랐지만 이번 서울 공연을 본 사람들 특히 오케스트라의 전문 지식인들이라면 과연 정명훈은 확실한 거장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이번 공연의 1부 순서에는 지난번 베이징올림픽 개막식때 피아노 연주를 했던 중국의 랑랑이 이번 공연에『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가지고 협연을 했다.
랑랑의 피아노 연주는 사람의 혼을 빼 갈 정도였다면 그 평이 너무 과했을까? 오케스트라의 천둥같은 소리가 갑자기 낮아지면서 피아노를 치는 랑랑의 손가락은 마치 꽃을 찾아온 호랑나비가 꽃잎에 앉을까 말까 하는 것처럼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그 황홀한 저음의 소리는 귀에 들릴까 말까 했다. 옆에 앉은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필자는 이때 무릎위에 계속 얹어 두었던 양복 상의를 의자의 등받이에 살포시 옮겼 놓았는데 앞좌석의 사람이 나를 힐껏 돌아보았다. 이유는 양복의 단추가 의자에 닿을 때 난 미세한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하필이면 이때 왜 단추소리를 들리게 했느냐는 무언의 항의였다. 앞에서 언급된 이원숙여사가 공연장 나무의자를 고치러 다녔던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마시모 안드레아 레째리> 주한 이태리 대사는 세계 음악 애호가들이 다 감탄하는 라 스칼라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피아노 재능이 뛰어난 중국의 랑랑과 그리고 거장 정명훈씨 지휘로 연주된 이번 공연을 서울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외교관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고 했다.

합창단석에서 바라본 지휘자 정명훈의 변화 무상한 모습
 
정명훈씨의 지휘하는 모습을 항상 뒤에서만 보다가 이번에는 합창단 석에서 마주 보았을 때 그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특히 지휘자가 지휘봉과 눈짓으로 전체 단원들을 지휘하는 모습은 마치 입체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이날 지휘를 한 말러의 교향곡 1번 D장조『타이탄』의 끝부분이 서서히 가까워 오면서 정명훈씨의 지휘봉은 전광석화처럼 상하 종횡무진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얼굴 모습은 환희와 슬픔이 교차되고 어깨에서부터 몸 전체가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인간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 것은 그 곡에 함축된 내용과 작곡가 말러의 감정을 완전히 통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55분간 지휘중 단 한 장의 악보도 보지 않고 100여명 단원들 한사람 한사람의 악기 연주 소리를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 어떤 단원을 향해 순간적 윙크와 미소를 보이는데 그 것은 그 단원의 연주 소리가 너무 좋아서 인지? 반대로 그 단원 연주 소리가 조금 아쉬어서 인지? 그 해답은 지휘자와 그 단원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세세한 상황까지 볼 수 있는 자리가 합창단 석이다. 그래서 로얄석보다 합창단 석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 젊은 층이 이 자리를 선호하고 있다.
연주의 끝부분이 가까워 지면서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마치 폭풍우에 천둥소리가 가미된 것처럼 공연장 전체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부친다.
이때부터 성급한 관중들은 이미 기립박수와 환호성 준비를 한다. 드디어 정명훈씨 지휘봉이 번쩍하면서 멈추는 순간 수많은 관중들은 마치 일어서기 경쟁을 하는 것처럼 벌떡 일어나 박수와 환호성을 지른다.
평소 음악회에 가서 기립박수치고 환호성 지르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이 날은 도대체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나도 모르게 나의 몸이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앵콜앵콜하며 괴성을 질렀다.
이 기상천외한 내 모습을 본 아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이때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영국 국왕 조지 2세가 음악회에서 감격을 억제하지 못해 벌떡 일어난 사건이 생각났다.
한편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관중들의 폭팔 같은 환호성과 계속되는 박수소리에 자기들끼리 서로 놀란 표정을 짖는다. 사실 오늘날 유럽 등지의 연주회 관람객의 주류는 평균나이 60세라고 한다. 이들은 연주가 끝나면 예의상 한 번 정도 박수를 쳐주고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관중의 연령대는 20대에서 40대가 주류를 형성하기 때문에 연주회의 열기는 유럽 각지의 연주회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 음악이 앞으로 세계 무대를 향한 무한한 발전의 동력이 될 것이라고 정명훈씨는 크게 강조한다.
토스카나디, 푸르트뱅걸리, 카라얀, 줄리니, 클라이버 등 당대 최고 지휘자들이 지휘했던 라 스카라 오케스트라는 지금도 세계적으로 이름난 거장들이라면 자기 음악생에에 단 한 번이라도 이 악단의 무대에서 지휘봉을 잡고 싶어하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오케스트라 임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명훈씨는 왜 지휘자가 되었을까?
 
정명훈씨가 지휘자가된 배경에는 훌륭한 스승이요, 거장인 줄리니를 만난 인연도 중요한 배경이다. 그러나 가장 큰 배경과 후원자는 어머니 이원숙 여사였다.
7남매의 교육을 위해 특히 3남매의 비싼 음악공부 뒷 바라지를 위해 그는 미국 워싱턴대학 앞에서 식당 경영을 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한국 학생으로서는 절대 받아주지 않았던 명문 사립학교에 정명훈을 입학 시키기 위해 여러차례의 거절을 무릎쓰고 계속 밀어붙여 입학 허락을 받아 냈다. 이원숙 여사의 자기만의 소위 한국적 어머니 어거지 전략법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정명훈을 장학금까지 타게 했다.
주위의 한국 어머니들이 “누구 빽으로 입학시켰느냐”고 정보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여사는 “우리 아들이 누구 빽으로 그 학교에 들어 갔는지 그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소! 나는 미국 대통령보다 더 큰 빽을 가지고 있소!”…… 한편 정명훈은 음악공부를 하는 동안 항상 앞으로 진로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이원숙 여사는 아들이 지휘자가 될 것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사실 정명훈은 어머니의 요청으로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이원숙 여사는 오랜 기도 끝에 지휘자가 될 것을 당부했다.
이원숙 여사가 원산의 루시여고를 간 것도 또 서울로 유학와서 배화여고를 거쳐 이화여전 등 모두 크리스찬 계통에서 공부한 것도 다 친정아버지 이가원씨의 강권적인 권유때문이었다.
집안에 한 가장의 중요한 결정이 그 자손 대대로 그들의 운명과 직결되고 있음을 그는 친정아버지를 통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영국 국왕을 일어서게 했던 1743년 음악회 사건

영국 국왕 죠지 2세가 음악회에서 벌떡 일어났던 것은 <메시아> 공연 때문이었다. <메시아>를 작곡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는 바흐와 함께 1685년 같은해 탄생했으며, 두사람은 금년(2008년)이 탄생 323주년을 맞이했다. 바흐와 헨델은 각자 출생지가 그리 멀지 않는 곳에서 태어났지만 두사람은 일생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특이한 일이었다.
그것은 바흐는 자신의 고향의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헨델은 18세때 고향을 떠나 27년간 독일에서 살았고 나머지 47년은 영국에서 살다가 결국 영국 국민으로 귀화했다. 헨델은 오페라 작곡에만 몰두했지만 결국 오페라로는 큰 성공을 못하고 <메시아>를 비롯한 오라토리오로 성공하여 악성(樂聖)의 영광을 받게 되었다.
참고로 오라토리오란 독창, 합창, 관현악에 의해 공연되는 기독교적 성악곡의 형식을 말한다.
특히 헨델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오라토리오<메시아>를 작곡할 때의 그 간증이 유명하다.
헨델은 이 곡을 작곡할 때 화장실 출입을 제외하고는 일체 외부출입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식사도 하인을 시켜 자신의 작곡실에서 먹었다.
한참 작곡에 몰두하다가 작곡이 막혀지면 그는 즉시 하나님께 기도로 메달린다. 그리고 기도 중에 순식간에 떠오르는 영감을 단 1초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방 밖을 나갈수가 없었다. 작곡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을 수도 없이 흘렸다.
특히 제2부 23곡의 유명한 알토의 감동적 아리아『그는 수모를 당하고 사람에게 버려지고』이 대목을 작곡할 때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작곡 5선지가 눈물에 젖어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서곡과 3부 53곡으로 된 오라토리오<메시아>는 잘 알려진대로 제1부는 예수님의 강림 2부는 수난과 속죄, 그리고 3부는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의 존재를 힘차게 호소하는 승리의 감격으로 작곡되었다.
작곡 24일만에 이 위대한 음악이 완성되었다.
헨델의 이 <메시아>는 1742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자선음악회로 첫 공연이 되었는데 이 <메시아>가 보통 작곡이 아니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영국 왕실에까지 알려졌다. 그후 1년뒤인 1743년 런던의 코벤드 가든 왕립 가극장에서 헨델의 <메시아>가 영국에서 첫 번째 막이 올랐다. 이날 왕립극장에는 국왕 죠지 2세와 그리고 로얄석에는 외교관, 고관대작 그야말로 영국의 문무백관이 다 참석해서 마치 영국 국왕의 공식 행사장을 방불케 했다. 특히 이날 음악회 순서 중에 제2부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합창 할렐루야 코러스가 중후한 화성으로 울려나가자 국왕의 얼굴에는 희열이 넘치기 시작했다.
죠지 2세는 선왕 죠지 1세보다 성격이 급하다는 소문이 당시 국민들에게도 알려진 사실이다.
영국 왕실의 시종차관이었던 Hervey경이 집필한 죠지 2세의 회고록을 보면 조지 2세는 1735년경 일종의 치질과 같은 질병에 시달리면서 그의 성격이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한 번은 그의 아버지 죠지 1세가 왕이 되기전 선제후로 있었던 독일 하노버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후 그의 성격이 더 날카로워졌다.
이유는 여러 가지 였다. 하노버 여행중에 왕의 행차에 대한 어전 의식과 특히 독일 하노버 사람들의 밝은 성품을 왜 영국 국민들은 따라가지 못 하느냐고 불평을 털어 놓았다.
이상과 같이 매사에 불만 스러웠던 국왕이 이날 음악회에서 얼굴에 환희가 넘쳐나는 것을 본 시종은 마음이 흐뭇했다. 드디어 <메시아> 재2부 마지막 부활승천의 우렁찬 대 합창 할렐루야 코러스가 왕립극장을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하자 이때 국왕에게도 분명 그 무엇이 (성령) 휘몰아친 모양이었다.
감동과 흥분을 더 이상 참지 못했던 죠지 2세는 국왕의 체통을 무시하고 용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뜨거운 감동의 대 합창의 장엄한 모습을 아무리 자신이 왕이지만 편안히 앉아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지금 국왕이 기립해서 관람을 하는데 로얄석에 앉아 있던 외교관과 고관대작 그리고 명사들은 자기들만 계속 편안히 앉아 있다는 것은 대영제국 국왕 폐하에 대한 불경죄라고 생각했던지 이들도 덩달아 전부 일어났다.
역사는 이날의 상황을 하나의 음악회 사건 또는 영국 왕실의 잊을 수 없는 비화로 기록했다. 이렇게
 해서 헨델의 <메시아>는 세계 음악계에 널리 퍼져나갔고 또한 이때부터 <메시아> 합창이 공연되는 곳마다 특히 교회에서 성탄절이나 부활절 칸타타에서 <메시아> 2부 할렐루야 코러스가 울려 퍼질 때는 모든 성도 들이 다 기립한다.
한편 헨델은 <메시아>를 초연한지 16년만에 다시 런던 코벤트 왕립 극장에서 그의 생애 마지막 지휘봉을 들었다. 74세의 노 음악가는 백발을 휘날리며 <메시아>의 마지막 코러스 <아멘>을 우렁차게 지휘를 마치고 무대에서 졸도를 하고 말았다.
그의 얼굴에는 눈물과 그리고 약간의 미소를 띠었고 그의 손에는 마지막 최후가된 지휘봉을 꼭 쥐고 있었다. 그로부터 1주일후 성금요일밤 헨델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 나라로 갔다. 영국 국왕은 헨델의 묘지를 위인예우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詩人) 묘역으로 정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영국 국민들의 최대의 소망은 나도 죽어서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 묻치고 싶다고 했다. 그만큼 웨스트 민스트 사원은 영국 역사의 요람이며 자랑이다.
왼손을 든체 지휘하는 모습으로 서 있는 헨델의 기념상은 대리석의 정교한 조각으로 마치 실물을 보는 것 같았고 양손 가운데 <메시아>의 제 3부 제45곡의 악보가 놓여 있었다.
헨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오라토리오 <메시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축북과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성탄절과 부활절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헨델의 <메시아>는 인류역사와 더불어 음악의 금자탑으로 영원히 불러질 것이다.

                          글 김수호 (안드레명상 집필, 주님의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