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칼럼(하늘소망)

콘스탄티누스대제 일화와 천주교의 탄생

배남준 2018. 9. 26. 15:51


천주교는 기독교의 뿌리가 아니다



다시 시작하는 종교개혁 – 기독교와 천주교의 역사 | 기독교회의 역사

   -로마의 경기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사자의 밥이 되다 -



우리가 현재 행복하게 믿는 그리스도교(기독교)는 사도행전후 초대교회가 세상(로마제국)의 핍박과 모진 탄압을 받는 것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카타콤 동굴속에서 수백년을 살아오며 그들의 신앙을 목숨바쳐 지켜온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을 생각할 때마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나의 초라한 신앙이 너무나 부끄럽기만합니다.
네로가 음탕한 시선으로 즐기던 로마 그 원형 경기장에서 우리의 선배들은 사자밥이되고 화형을 당하여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을 찬양하며 천국을 사모했습니다.
위대한 카타콤의 승리자들에 의해 맥맥히 흐르던 신앙이 어땋게 동굴속에서 세상밖으로 나와 인정을 받게 되었는지 우리 기독인들은 그 역사를 간략히나마 반드시 알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쿼바디스란 영화가 있습니다. 벤허나 십계처럼 유명한 오래전의 종교영화입니다.
줄거리는 로마시대 네로황제시절 리지아란 이국공주 그리스도인과 전쟁에서 승리해 돌아오는 로마 사령관 마커스 장군, 두남녀의 사랑을 통해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순교하는 모습과 당시의 화려한 로마생활상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웅장하고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로는 시의 자극적인 소재를 찾다가 화재로 불타오르는 로마를 바라보며
흥분에겨워 시를 읊습니다. 격분한 시민들이 궁궐로 쳐들어 오니 네로황제는 화재의 원인을 그리스도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그들을 붙잡아 원형경기장에서 야수들의 밥이 되게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지도자 베드로는 난을 피하여 로마를 벗어나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앞에 나무위에 한줄기 밝은 빛이 나타나니 베드로가 주님임을 알아보고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 양들이 로마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 네가 내양을 버리니 내가 다시 십자가에 달리러 로마로 가고 있다." 베드로는 크게 뉘우치고 오던 길을 되돌려 로마로 다시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 무렵 사도바울도 함께 순교를 히게 됩니다

그당시 방대한 로마를 다스리는데 군대의 힘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군대의 권력은 쉽게 황실과 결탁하고 제위를 노리는 정치적 암투가 치열하던 시대였습니다.
클라우디스황제를 독살한 후비 소 아그립피나는 정치적 야망이 매우 큰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불과 17세의 소년, 아들 네로를 황제에 앉히고 자신이 섭정을 하여 정치에 깊이 간여하였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잔인한 네로는 어머니를 끝내 살해하고 맙니다.
네로는 간신들에 둘러싸여 사치와 낭비를 즐기며 법을 어기며 백성과 귀족들에게 까지도 비열하고 포악한 정치를 일삼으니 나라가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AD64년에는 수도 로마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로마시의 태반을 페허로 만들어버린 대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네로는 미워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민들의 온갖 비난을 돌리고 그리스도인들을 혹독히 탄압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하고 끝내는 히스파니아의 총독 갈바가 황제에 추대되고 네로는 측근에게 자결을 강요당하게 됩니다. 그는 목숨에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중얼거렸습니다.
"애석하게도 내가 죽고나면 예술가는 다 사라지는게 아닌가? 빠르게 달리는 군마의 발굽소리가 내 귀를 때리도다." 유명한 호메로스의 싯귀를 읊으며 칼로 자신의 목을 찔렀습니다.

한편 유대인은 AD66년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로마 장군 티투스에의해 AD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맙니다. 네로이후 새로운 왕조의 대를 이어 티투스도 황제가 제위에오르나 불과 2년만에 열병으로 죽고 그의 동생 도미티아우스가 제위를 이어 받아 폭군으로서 네로 이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후 AD303년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도 로마의 고대종교를 부흥시키고 외래종교를 엄하게 단속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심히 탄압하였는데 모든 그리스도교의 집회는 금지되고 교회당은 파괴되었으며 신자들은 체포되어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증가되었고 나라의 권력으로도 어찌할수 없는 상황에 이르니 계속되던 박해는 수그러들기 시작했습니다. 


성콘스탄티누스 대제

   - 서로마와 동로마의 전쟁을 통하여 통일되다 -


 
 AD30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즉위합니다. 그는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로마제국을 재통일시시켜 제국부흥의 기초를 더욱 굳건히하였습니다. 그는 변방지역의 국방도 튼튼히하였으며 군인으로서 통치자로서 입법자로서 커다란 업적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최대 공적은 그리스도교의 공인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대제는 원래 태양신을 숭배하였으나 그가 그리스도교로 깊이 경도하게된데는 재미난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AD312년 제위를 차지하기위해 로마로 진군하던 어느날, 해가질무렵 하늘 높이 걸린 십자가를 보게되었습니다. 그옆에는 또 '이것으로 승리하라'라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잠이들었는데 그날 밤 꿈에 예수님이 나타 나시더니, 십자가에 군기를 걸고 싸우라고 계시해 주었습니다. 대제는 이 말씀대로 행하였더니 과연 싸움에서 연전 연승하며 드디어 로마에 입성할 수가 있었습니다.
대제는 원로원과 시민의 지지를 업고 AD313년에 공동황제인 리키니우스와 밀라노에서 회견한 뒤 속주 총독들에게 보내는 서한의 형식으로 신앙의 자유원칙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밀라노 칙령'인 것입니l다. 박해중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도 반환되었고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그리스도교 탄압의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이고도 획기적인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 동방지역을 지배하던 리키니우스가 약속을 어기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분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의 표지를 단 승리의 군기를 앞장세우고 출정하여 리키니우스를 참패시키고 제국을 통일하여 실질적인 단독황제가되었고 그리스도교를 위해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정책을 펼쳐나갔습니다.

 
그는 성직자에게 공역을 면제해주고 연금을 주어 우대하였고 교회의 사교에게는 민사 소송을 재판하고 교회 내에서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교회가 유산을 상속할 권한도 갖게하였다. 그뿐아니라 그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세우기위하여 교회 내의 교리를 둘러싼 대립을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AD325년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열었습니다. 3백명의 성직자들이 모였고
황제 자신이 사회를 맡고 모든 경비를 국가에서 부담하는 적극적인 후원을 하였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는 성서의 교리에대해 각파간에 열띈 논쟁 끝에 하나님(聖父), 예수 그리스도(聖子), 성령(聖靈)은 하나라는 삼위일체설을 확고히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천년이 넘는 전통과 4백여 개의 이교(異敎)신전을 갖고 있는 로마에서 그리스도교를 국교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서 AD330년에 유럽쪽에 위치한 도시인 비잔티움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하고 콘스탄티노풀이라고 명하고 그곳에 여러개의 큰 교회를 세우고 광장의 개선문에는 성경속의 중요한 내용을 표현하여 그리스도의 전초적인 도시로서의 건설을 계획하여 로마시에손색이 없도록 시전체를 7개의 언덕과 14개의 구로 나누고 원로원까지도 세웠습니다.

로마의 중흥을 위해서 그리스도교를 위해서 위대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의힘이 있었습니다.
황태후의 이름은 헬레나. 성당에서는 성인의 칭호를 붙여 성(聖)헬레나라고 부르기도합니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성 헬레나는 곧 성지순례의 길에 오른다. 그녀가 고생을 무릅쓰고 성지를찾는 특별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당했던 십자가장소와 부활의 현장인 무덤을 확인하고자함이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황제의 어머니는 그 곳을 쉽게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말살하려고 그곳에 세워졌던 비너스 신전이 오히려 이들에게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황제의 명령으로 이방의 신전은 철거되고 그곳을 깊이 팠더니 세 개의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십자가가 발견되었고 그 옆

'유대의왕 예수'라는 죄패도 묻혀 있었습니다.
어느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인지 판별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 옆에 참석했던 마카리오스 주교는 영감의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환자를 데려오라하여 세개의 십자가를 각각 만지게 하였더니 놀랍게도 병이 낫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음후에도 놀라운 기적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그후 로마로 옮겨져 고위 성직자들에게 작은 십자가로 만들어져 귀하게 기증되었고 나머지 일부분이 지금도 '산타크로체인 예루살렘대성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AD336년 헬레나 황태후는 그곳 십자가 형장에 성묘교회를 세웠습니다.
황태후는 이외도 베들레헴에 있는 동굴 외양간에 '예수 탄생교회'를 세우시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감람산위에도 '주기도문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탄생교회는 그 높이가 불과 1m20cm밖에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이곳을 들어가려면 머리를 숙여야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하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야한다는 뜻의 겸손의 문입니다.
교회 동굴 바닥 아기예수 탄생지점은 은으로 만든 별모양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대제 사망후 로마의 정치는 흔들리고 잠시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다시 탄압을 받게되지만 그는 불과 2년만에 페르시아와의 전쟁중에 창을 맞아 전사하게 됩니다.
그후 AD392년 테오도시우스황제는 적극적인 종교정책을 펼쳐 그리스도교이외의 다른 종교는 배척하므로써 마침내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천주교의 탄생입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신화를 중심으로한 여신을 믿는 무속신앙이 만연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갑자기 국교로 믿게하는데는  女神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속에서 끌어낸 女神이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따라서 천주교에서는 모세의 십계명중 둘째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는 내용을 빼고 열번째 " 네 이웃집을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두개로 나누어서, 시내산에서 받은 모세의 십계명을  사람의 뜻으로 고쳐 넣었습니다. 非성경적인 愚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마리아 이콘

   -성모 마리아상-



 그후 루터의 종교 개혁을 통해 개신교(교회)가 탄생되고 원래의 초대교회 모습으로 환원된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성당)는 개신교(교회)의 뿌리가 결코 아니라는 역사적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