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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해야 그리스도가 흥하게 된다 -이 재훈 목사

배남준 2018. 7. 4. 11:33

파고다(탑골) 공원에서 만난 예수님 - 하늘소망


그렇습니다. 

기독교계에 용기있는 외침에 귀 기울여야합니다.

교회의 외형적인 모습은 쇠하여지고 교회의 본질인 예수그리스도만이 흥해야하겠습니다. 

교회의 건물이 커지고 성도수가 많음을 부흥이라고 자랑하는 교만, 착각에서 우리는 깨어나야합니다.

최근 우리나라 교계는 강대상에 예수님 진리는 작아지고 목사님의 철학이 커지고 있습니다.

영생의 진리가 실종되고 세상 논리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 나와서 건강해지고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안개와 같이 짧고 저 세상은 영원하므로

당연히 모든 설교의 주제는 구원, 부활, 영생의 축복 따라서 하나님 나라, 천국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향입니다.  

강대상에 말씀이 없고 예수님 모습대신 주의종, 사람들의 모습만 보여지는 昨今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육은 죽어야하고 영이 살아나야 합니다 - 

노아는 구원 방주 100여년 기간 자신의 가족 8명만이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12명 제자들을 양육하는데 집중하셨습니다.

Real 크리스천의 한 영혼을, 돌아온 탕자처럼 하나님은 기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이나라 모든 교회와 주의 종들, 성도들의 진정한 회개가

간절히 요구되는 험란한 시대임을 자각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늘소망  -   

      

[시온의 소리] 교회는 그리스도를 질투하고 있지 않은가

[시온의 소리] 교회는 그리스도를 질투하고 있지 않은가 기사의 사진
-온누리 교회 이재훈 목사-



교회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성도들에게 “교회가 그리스도를 질투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면 “그런 말이 어디 있느냐”며 손사래를 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께 경배드리며 순종하기를 고백하며 살아가는 교회가 어찌 자신의 주인 되시며 머리 되시는 분을 질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교회 역사는 교회가 능력과 영향력을 상실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질투였음을 증거한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를 질투해 빌라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도록 압박한 유대 지도자들의 악함은 역사를 관통해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손길을 뻗치고 있다. 오늘날 교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질투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어느 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세례요한이 증거하던 사람이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전부 그에게로 간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우리에게 와야 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비즈니스 대상이 사라지고 있다는 뜻과도 비슷하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보다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자신들 앞에 찾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더 컸던 것이다. 그들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며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요한 옆에서 숨은 권력욕을 즐기고 있었는지 모른다.

반면 요한의 대답은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고백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8∼30)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랑의 들러리다. 신랑의 들러리는 신랑을 안내하고 돋보이게 하기 위해 세워진 사람이다. 신랑의 들러리가 신부를 차지하려 든다면 도적이다. 신랑의 들러리는 신랑이 신부를 취함을 기뻐하는 것이 본연의 역할이다. 요한은 신랑의 들러리와 같이 그리스도를 기뻐했고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가 세례를 받고 있음으로 기쁨이 충만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고백이 요한의 고백만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성장할수록 이 고백을 붙잡아야 한다. 교회가 쇠해야 그리스도가 흥하게 된다. 이는 교회가 잘 모이지 않고 예배가 쇠약하며 재정적 능력이 약해 어떤 봉사도 할 수 없는 유약함에 머물러야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교회는 서로 모이기를 힘쓰고 복음 전파와 사회봉사에 크게 쓰임받을 수 있도록 흥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흥할수록 쇠해야 하는 역설적인 공동체이기도 하다. 성장할수록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교회는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쇠해야 그리스도가 흥하게 된다. 오직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 사람들이 나아가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분을 증거하는 사람들이다”는 고백 속에서 머물러야 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기뻐하고 있는가. 교회 지도자들은 어디서 기쁨을 찾고 있는가. 역사는 교회가 흥해 요한의 고백을 잊었을 때 진짜 쇠해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자신이 신랑이라고 착각할 때 들러리가 내침당할 수밖에 없는 이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그리스도의 친구로서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와 중매하는 공동체다. 바울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고린도 사람들을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중매하려 노력했다.(고후 11:2)

결국 교회는 두 종류로 구분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교회와 그리스도를 질투하는 교회다. 그리스도를 질투하는 교회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갈 것이요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든든할 것이다. 교회의 목표는 언제나 동일하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교회는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그리스도만을 기뻐할 정도로 충분히 쇠하고 있는가.

                                                                                                 이재훈 (온누리교회 담임목사) - 국민일보 7얼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