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지난 5월 13일(수) 정감새벽나무에서 인권변호사, 감사원장을 역임한 한승헌 변호사(법무법인 광장 고문변호사, 양평감리교회 명예권사)가 ‘내가 체험한 기독교’(약2:14~17)라는 제목으로 신앙고백을 전했다. 한 변호사는 정직한 삶의 표본으로 후배들에게는 존경받는 법조인이자, 생활 속에서도 항상 유머를 잃지 않는 삶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전해주었다. 신앙간증을 시작하면서 한 변호사는 “인권변호사로 뛰면서 목회자를 비롯해 좋은 기독교인들을 만나면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며 참석자들에게 고백했다. 한 변호사의 간증을 요약 정리했다.
"민주화 투쟁에 용감하게 나서는 목회자들을 옆에서 변호하면서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크리스천과 기독교가 우리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
인권변호사로 일하면서 훌륭한 목회자들을 변호하면서 기독교를 알게 되고 계속적인 우연 아닌 우연의 연속으로 그때 당시 종로5가(기독교연합회관을 지칭) 사람들을 변호하면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의심도 많았고 주변에 목회자들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들을 들어서였는지 신앙인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첫 번째 사건이 이름 있는 목사와 장로 간에 맞고소 사건을 맡으면서 난 많은 상처를 받고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 사건을 맡아 변호하면서 조금씩만 양보하면 합의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두 사람은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화해하는 데 실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인들도 다를 게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한 가지 내가 가진 의문은 기도할 때 고함을 지르며 목이 터져라 하나님을 찾는 신도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귀머거리가 아니실 텐데 왜 저렇게 기도하지 하는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과정들이 내 믿음을 강하게 하는 하나님의 연단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후에도 나는 1973년 부활절 남산 야외음악당 연합예배 시위 사건으로 보안사령부에 연행되어 내란 예비 음모 혐의를 받아 구속재판을 받는 목회자들을 또 변호하면서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계속해서 기독교인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지금이야 대통령이나 정부 욕을 맘놓고 하지만 그때만 해도 유신체제라서 함부로 군사정권과 대통령에 대해 욕을 할수 없었다. 지금처럼 했다가는 모두 법정행이었다. 그때 재판을 받았던 기독교계 인사들로는 함석헌 선생님, 안병무 선생님 등과 교인들이 있었다. 물론 이 사건은 정부가 기독교계의 반발을 우려해서 종로5가와 사전협의 하에 형 구형 후 이틀 뒤 보석으로 풀려나면서 일단락 되긴 했다.
기뻐하는 삶
이런 시대를 거치면서 내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는 민주화 투쟁에 용감하게 나서는 목회자들을 옆에서 변호하면서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 긴급조치 법령으로 국민들이 자유를 억압당하고 국가권력에 무참히 끌려다닐 때 자유와 민주화 투쟁을 하는 목회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신앙이 조금씩 성장했던 것이다. 또한, 용감하게 민주화를 염원하는 신앙적인 결단과 실천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던 중 나도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더욱 하나님을 만났다. 그 때의 어려움들을 극복해낸 시간들이 훗날 변호사 등 공직생활을 하며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행동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기독교야말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소외되고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크리스천과 기독교가 우리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중요한 만큼 내 삶의 자리와 이웃, 세상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할 때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정리: 윤장한 기자(yousimja@sarang.org) 사랑의 교회 카페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