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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르포: 하나님의 땅 예루살렘/ 성묘교회, 크리스천들로 인산인해

배남준 2017. 4. 1. 11:36



지난 14일(현지시간) 아침 우리 일행이 탄 버스가 예루살렘 올드시티(구시가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3000여년전 이스라엘 왕 다윗에 의해 건설됐던 성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스라엘 관광청 초청으로 이곳을 찾은 세계 각국 기자단 20여명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스라엘인에게 이 성벽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건 너무나 많은 의미가 담겨진 일입니다.” 안내를 맡은 관광청 직원은 4000년에 달하는 유대의 역사를 기다란 실처럼 풀어가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지내졌다 부활하신 무덤. 이곳에 세워진 성묘교회의 돔 맨 윗부분에서 찬란한 햇빛이 예수님 무덤 쪽을 비추고 있다.



‘평화의 도시’, 금처럼 그어진 장벽들 
예루살렘은 고대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란 뜻이다. 그런데 이곳엔 ‘보이는’ 장벽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장벽과 경계도 한없이 많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경계는 ‘뉴시티’와 올드시티 사이의 성벽이다. 회백색 돌벽을 경계로 안과 밖의 풍경은 너무도 달랐다. 뉴시티는 1948년 이후 건설된, 비교적 현대적 풍모의 도심이다. 유대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곳으로 돌아와, 옛 예루살렘 서쪽 성벽 바깥쪽에 자리를 잡고 건설한 지역이다. 그때까지 예루살렘 동편은 요르단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수차례의 중동전쟁을 통해서야 이스라엘이 이 도시 전체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올드시티의 동쪽은 국제법상 어느 국가의 소유도 아니다. 기독교와 유대교 뿐 아니라 이슬람교까지 자신들의 성지(聖地)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성역(聖域)도 잘 지켜지고 있다. 

바깥쪽 광장 쪽에서 바라본 성묘교회 입구


올드시티 중앙에는 일명 ‘템플 마운드(Temple Mount)’가 자리잡고 있다. 거의 1㎞에 달할 정도의 광장이 수천년을 버텨온 성벽 위에 펼쳐진 지역이다. 한 가운데는 황금돔 이슬람사원이 차지하고 있고, 왼쪽 옆에는 바위사원이 있다. 바위사원 서쪽에는 길지 않은 돌벽이 있다. 일명 ‘통곡의 벽.’ 이슬람과 유대교의 성지가 벽 하나를 두고 공존하는 셈이다. 

템플마운트의 중앙광장에는 고위 성직자를 비롯한 이슬람교도만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이곳이 마호메트가 하늘로 승천한 장소라고 믿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내려져 어머니 마리아에 의해 올리브기름 부어졌던 대리석


반면 유대인들은 템플마운트가 다윗왕이 하나님께 예배할 성전을 지은 장소이자 솔로몬왕의 궁전이 있던 곳이라 주장한다. 이슬람이 야만적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다윗 성전과 솔로문 궁전을 부순 뒤 황금돔 사원과 바위사원을 지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예루살렘에 도착한 걸 기념해 아셀나무를 심었다는 장소


템플마운트 바로 아래편에 놓은 통곡의 벽에서 유대인들은 기도하고 있었다. 벽을 두드리는 이, 얼굴을 대고 간절하게 하늘을 쳐다보는 이, 몸을 흔들며 구약성경을 외우는 이…. 기도하기 위해선 반드시 유대인을 나타내는 둥근 빵모양 모자를 써야 한다. 어떤 기도를 할까. 2000여년 전 헤롯왕을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망한 뒤 세계 도처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슬픔, 자신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된 템플마운트를 올라가보지도 못하는 서러움을 통성(痛聲)하는 것처럼 보였다. 

간혹 통곡의 벽 건너편으로 이슬람교도 남성과 히잡을 쓴 여인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인처럼 보였다. 이쪽에서 템플마운트로 들어가는 통로는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 기다란 나무통로! 관리권을 가진 이슬람 측으로부터 사전에 통행허가를 받은 사람만 하루에 단 한 번 출입할 수 있다고 한다.


평화의 도시에 깃든 평화는 푸근하고 안온한 종류가 아니었다. 팽팽하게 긴장된,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기 위해 절묘하게 만들어진 평화 같았다. 

골고다 언덕 아래 예수의 성묘 
통곡의 벽을 끼고 계단을 따라 동쪽 아래로 내려가면 기독교 성지가 차례로 나타난다. 2000년 전 본시오 빌라도 로마총독 앞에 끌려가 단죄된 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까지 로마병사들의 회초리를 맞으며 걸어야했던 예수님의 고행길! 넓지 않은 돌바닥 길 양편으로 개혁교회와 자선병원, 가톨릭교회 수녀원 등이 이어졌다.

‘통곡의 벽’과 벽 뒤로 보이는 ‘황금 돔’ 이슬람사원.


10여분을 걸었을까, 이내 평평한 곳이 나타났다. 문 안쪽으로 들어가니 ‘성묘(聖墓)교회’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던 장소,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십자가 아래로 예수님을 옮겨 온몸에 올리브기름을 발랐던 대리석, 장사 지내진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무덤 등이 있던 장소. 그곳에 지어진 교회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하나님께 올라가신 직후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초기교회가 시라아정교회 가톨릭 이집트콥트교회 그리스정교회 등으로 분열된 뒤 이들은 서로 이곳을 자신들 소유라 주장해왔다. 서로 치열하게 싸우다 20세기 들어 서로 기간을 나눠 관리권을 갖는 형태로 평화의 타협을 했다고 한다. 


성묘 근처에는 세계 도처에서 예수님의 흔적을 찾아온 크리스천들로 인산인해였다. 통곡의 벽에 기도하는 유대인보다, 아무도 없는 템플마운트 이슬람사원보다도, 이곳은 훨씬 더 열렬했다. 예수님의 몸이 놓였던 대리석에는 성도들이 줄을 이었다. 영어를 쓰는 미국인, 푸른 눈의 러시아인,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인,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체득하게 됐을까, 이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세상의 어떤 예배보다도 뜨거운 성령의 강림이었다. 바로 뒤편 예수님의 무덤 위 천장이 뚫린 돔 위로는 눈부신 햇빛이 깃들고 있었다. 

                                                                                             예루살렘=글·사진 신창호 종교기획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