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들이 별 어려움 없이 만날 수 있는 평화통일을 앞당기는데 밀알이 되고자 온누리사랑나눔 총재에 취임하게 됐습니다.”
김의중(70) 인천 작전동교회 목사는 22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통일부에 등록된 ㈔온누리사랑나눔 총재 취임 소감을 이같이 밝혔다. 취임식은 전날 이북5도민회 등 보수진영과 남북평화재단 등 진보진영 인사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됐다.
김 목사는 “북한 주민들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농촌 지원사업 및 장애인·어린이 돕기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온누리사랑나눔 총재를 맡게 됐다”며 “중국 허베이성 당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교회교류에도 적극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내년 4월 은퇴 이후 고향 강화도에 ‘나그네의 집’을 설립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김 목사는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당시 남북교류분과위원장을 맡아 북한의 지도자들이 대거 인천을 찾도록 견인차 역할을 하는 등 대회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김 목사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당시 부역자집안으로 죽음의 위기를 만난 어머니가 강화도에서 형(당시 17세)과 나(당시 4세)를 살리기 위해 북한으로 피난을 갔다가 형까지 잃어버린 아픈 가족사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연좌제 때문에 오랜 세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북한으로 간 아버지와 형을 그리워하며 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회고했다.
김 목사의 부친 용백(1909년 강화 출생)씨는 경성전기학교 7회 졸업생으로 1945년 해방 당시 중국에서 귀국해 전국을 다니면서 정치활동을 하다 북한으로 월북해 장군으로 활약하다 1950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직후 북한으로 진격한 국군에 의해 전사했다.
김 목사가 아버지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2006년 100세가 된 어머니 한상임씨(104세 작고)와 동행해 12차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린 금강산 상봉행사에서였다.
김 목사는 “어머니를 모시고 금강산에 갔다가 형수와 조카 4명을 만났다”며 “당시 주변에 기자들이 많아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6.25 당시 전사한 장군의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취재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김 목사는 1981년 3월 해제된 연좌제 속에서도 1977년 인천 작전동에 근로자 8명과 함께 작전동교회를 개척해 중견 교회로 키웠다. 김 목사가 사재를 털어 설립한 중선소학교는 현재 베이징에서도 유명한 발해진소학교로 성장했다.
인천=정창교 기자 jcgyo@kmib.co.kr, 사진=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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