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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한 몽골인들을 섬기는 나섬공동체 -유해근 목사, 과로로 실명해도

배남준 2016. 12. 3. 17:29

  유해근 목사, 4회 태평양공익인권상 수상자 선정

                   -4회 태평양 공익인권상 수상자 유해근 목사-


유목사는 다문화 사역 초기, 열악한 환경에서 구로동 외국인 근로자 복음사역에 불철주야로 몰두, 당시 과로로 인한 육체적 피로, 과도한 스트레스에 영양 실조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결국 실명까지 당했다.

그러나 유목사는 참담한 비운과 불행과 좌절 속에서도 한국 내의 몽골 근로자에 대한 특별한 사랑의 열정과 외국 근로자 선교의 원대한 비전과 꿈을 무서운 집념과 사명감으로 하나 하나 성취해 나갔다.

유목사는 나섬공동체 서울외국인 선교회 설립, 몽골 울란바토르 문화진흥원 설립, 재한몽골 외국인학교 개설 및 몽골 외국인 학교 신축, 다문화사역연구소 및 다문화 선교학교, 다문화교실, 뉴라이프미션 동대문선교회 설립 등 온갖 역경과 힘들고 벅찬 과정 속에서도 거창한 나섬공동체 사역 프로젝트를 묵묵히 해낸 것이다.

[대몽골 칭기즈칸과 몽골의 약황]

몽골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대몽골 제국을 건설한 불세출의 영웅 칭기즈칸을 배출한 나라다. '칭기즈'는 '절대적인 힘'을 말하고 '칸'은 '군주'를 의미한다. 칭기즈칸은 몽골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뒤, 중국 정복을 단행, 만리장성을 넘어 황하 이북을 수중에 넣었다.1215년에는 금나라 수도 북경을 함락시켰다.

칭기즈칸은 중국에 이어서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호령하던 호라즘의 지배자인 투르크 족술탄 무함마드 2세가 자신이 보낸 사신을 죽이자 원정길에 나서 1220년 무함마드 2세를 제압, 호라즘을 수중에 넣었다.

이후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 · 페르시아 · 카프카스(코카사스) · 러시아 · 크림 반도 · 볼가 강 유역의 동유럽까지 진출, 몽골을 통일한 지 약 20년 만에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칭기즈칸의 사후에 손자인 쿠빌라이는 몽골에는 전통 도시 카라코룸을 두고, 제국의 근거지를 중국 영내로 옮겼다. 수도는 금의 수도였던 대도 북경으로 옮겨졌고, 1271년에는 국호를 '원(元)'으로 칭했다.

쿠빌라이는 남송 정벌의 대장정이 다시 결행되어 1279년에 남송을 멸망시킴으로써, 몽골족은 중국인을 송두리째 정복한 최초의 민족이 되었다.

원나라가 명나라에 망하고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한 이후 몽골은 청나라의 지배를 받아왔다.

몽골은 1911년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 1921년 7월 11일 소련군의 도움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고, 1924년 11월 26일에 몽골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후 몽골은 1988년 12월 인민공화국에서 자유 시장경제로의 개혁 및 민주화로 체제변경을 추진, 1992.1월에 신헌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에서 탈피했다.

이어서 몽골은 2000년 12월 헌법을 개정을 통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총리에게 이양하는 2원집정 내각제로 바꿨다.

현재의 몽골은 광활한 대지, 세계 10위의 무궁 무진한 자원 부국, 무한한 발전 잠재력이 있는 나라다.

몽골은 북으로는 러시아와 남으로는 중국을 사이에 둔 몽골은 156.7만㎢, 한반도의 7.4배이고 남한의 16배인 대국이지만 인구는 겨우 290만 명이다.


  
▲ 방몽 당시 몽골 엥크바야르 대통령(사진 좌측)으로 부터 훈장을 받고 기념 촬영하는 몽골울란바토르 문화원 유해근 원장( 사진 중앙)

[한국-몽골간 교류와 협력]

한국과 몽골은 역사적, 문화적, 인류학적, 언어학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매우 가깝고 밀접한 관계 속에 이어져 왔다. 고려조 충렬왕부터 공민왕때 까지 100년간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상중류 계급 사회에서 풍미했던 몽골풍이 많이 남아 있다.

여자 족두리(族頭里), 옷고름에 차는 장도(粧刀), 신부의 연지, 여자 귀를 뚫고 다는 귀고리, 장사치 등 어미에 붙이는 치(赤), 왕의 진지상인 수라, 여자들 머리 땋는 풍속 등이 유풍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또한 몽골반점, 우랄알타이어계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 외에도 다양한 문화적 공통점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은 민주국가로 전환한 몽골과 1990년 3월 공식 외교를 수립하였으며, 같은 해 6월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 한국대사관을 개설했고, 이듬해 2월에 주한 몽골대사관을 서울 한남동에 개설하였다.

1991년 오치르바트 몽골대통령의 방한을 시작으로,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몽, 2001년 바가반디 몽골대통령 방한, 2006년 노무현 대통령 방몽, 2007년 엥흐바야르 대통령의 방한, 2011년 이명박 대통령 방몽 등 양국 수반의 교류가 있어왔다.

지금 몽골은 한국과 협력관계를 중요한 외교적 목표로 설정하였고, 한국의 경제발전을 몽골 경제발전의 모델로 삼고 있다.

한-몽 양국의 교역은 2012년 4.92억불(수출 4.8억불, 수입 12백만불)로써 한국은 몽골의 제5위 교역상대국이다.

한국의 대 몽골투자(2012년말 누계)는 총 2.9억불, 무상원조(2013년말 누계) 총 1.34억불, EDCF지원(2013년말 누계)은 총 1.15억불에 달한다.

양국간의 인적교류(2013년)는 방한 65,446명, 방몽 44,615명이며 체한 몽골인은 등록 기준 24,175명이나 불법체류자를 포함하면 4만명에 육박한다.
체몽 한국인은 2,500여명이다.

또한 한반도의 안정은 곧 몽골의 안보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한국의 대북평화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있으며, 한국을 동북아시아의 중요한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 또한 동북아 국가로서 몽골의 정치적인 중요성과 협력 잠재력이 크다는 점을 중시하여 몽골의 개혁과 개방 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있으며, 유무상의 경제 원조를 매년 제공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한국은 몽골이 세계 4대 에너지 보유국이라는 점과 몽골 경제 발전에 참여할 인적, 기술적 자원의 수출시장이라는 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한국과 몽골은 경제, 외교, 문화, 사회 등 여러 방면에서 점점 더 긴밀한 협력이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

특히 몽골의 풍부한 자원과 한국의 선진기술의 성공적인 결합을 위하여, 양국 관계는 점점 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다문화 사역의 나섬공동체 유해근 목사]

  
▲ 몽골 대통령 영부인과 몽골 대표단이 몽골외국인학교를 방문하여 유해근 운영이사장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다.

나섬공동체를 이끄는 유해근 목사는 한국이 다문화사회로 정착되기 훨씬 이전인 1990년대 초에 외국인노동자 사역을 개척한 ‘다문화사역 1세대’ 목회자다.
유해근 목사는 1990년대 초 구로공단의 외국인노동자들과 몸을 부대끼며 이주민사역을 시작했다.

유 목사는 국내 ‘최초’의 이주민선교단체인 나섬공동체를 설립해 20여 년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로부터 20년, 그가 홀로 고단한 사역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한국은 이주민의 수가 150만에 육박하는 다문화사회로 급속하게 변화했다.

이에 유해근 목사는 자신의 20년 사역 노하우를 한국교회에 모두 내놓겠다는 각오로, 지난해 말 ‘한국다문화사역연구소’를 설립했다.

그 첫 번째 프로젝트로 ‘다문화선교학교’다.

유 목사는 “사회는 급속도로 다문화사회화 되고 있고 복지와 법제도 상황도 나아지고 있는데, 정작 교회의 대응 속도는 너무나 느리다”며 “아직도 다문화사역에 별 관심이 없는 목회자와 교회들이 많다. 한국교회 다문화사역은 현재 굉장히 미약한 수준의 초보적인 단계”라고 지적했다.

외국인노동자들이 밀집해 있는 도시빈민 지역이나 결혼이주여성들이 많은 농어촌 지역 목회자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사례가 많다는 이야기다.
< 유해근 목사의 한국다문화연구소>
유해근 목사가 설립한 한국다문화 사역연구소는 거창하게 현판을 달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여타 학문연구소처럼 신학을 공부하는 개념도 아니다.

20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이주민사역 현장을 지키면서 쌓아 온 경험과 노하우를 전부 공개하고, 다문화사역을 하고 싶어하는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컨설팅을 해주려는 취지에서 설립되었다.

유 목사는 다문화사역자들의 네트워크를 활성화해 정보 수집과 제공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다문화사역 전략을 발전시키고,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사역자들의 역량 결집이 우선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다문화사역을 활성화시킬 방안으로 개강한 ‘다문화선교학교’는 한국다문화사역연구소가 진행하는 첫 번째 프로젝트로, 다문화사역의 모든 경험과 현장을 배울 수 있는 장(場)이 될 전망이다.

다문화선교학교는 7주간의 강의와 각 나라 이주민 신학생의 사례 발표 및 현장 탐방 등으로 진행되며, 평신도와 목회자 모두 참여할 수 있다. 또한 강좌 수료 시 현장에서 이주자 및 다문화 사역을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목회 컨설팅 및 인턴십을 제공한다.

유 목사는 지역의 외국인 현황을 파악하는 작업부터 외국인노동자, 결혼이주여성 등 외국인의 다양한 부류와 국적에 맞는 접근 방법 등 디테일한 전략들을 목회 컨설팅을 통해 일대일로 전수해 주겠다고 말했다.

유목사는 한국교회가 추구하는 해외 선교에 있어서 ‘땅끝’의 개념을 바꿀 때가 됐다고 주창한다. 먼 나라가 아닌, 우리가 서 있는 바로 한국, 바로 이곳이 외국인들에게는 ‘땅끝’이라고 강조한다.
< 한국교회의 선교 패러다임이 바꿔야>

유해근 목사는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150여 만 명의 외국인근로자들은 하나님께서 한국에 보내주신 귀한 선교 자원"이라며,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본국에 역 파송하여 그들 국가의 선교사로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기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문화사회에 직면한 한국교회가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숙제는 다문화사역에 대한 인식 전환이다.

유 목사는 다문화사역을 통해 한국교회의 패러다임이 바뀔 수 있다고 확신했다.

경제 위기가 심화될 때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계층은 사회적 약자들은 소위 극빈계층이다.

극빈층 외에 어려운 이들이 바로 외국인근로자들이다.

따라서 유목사는 한국교회가 더 이상 피해갈 수 없는 다문화사역은 선교적 열정만으로 달려들어선 안 되는, 지난한 인내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희생과 헌신을 각오해야 한다고 갈파했다.

[나섬공동체 서울외국인근로자 선교회]

  

▲ 열정적인 몽골인 사랑, 나섬공동체 서울외국근로자선교회 유해근 목사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소속 선교회로서 1996년 1월 28일 유해근 목사가 창설했다.
하나님께서 선교의 대상으로 보내주신 외국인근로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주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본 선교회 창립 이후 외국인근로자들을 위한 상담실 및 쉼터 운영, 의료봉사, 이미용봉사 활동과 더불어 보다 구체적이고 전략적으로 외국인근로자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외국인근로자 지원센타를 운영하게 되었다.

현재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에 의료진료를 위한 맴버쉽 카드 소지자는 2,500여명에 이르며, 연간활동인원은 10,000여명에 이른다. 매주 주일 200여명의 근로자들이 모여 국가별 공동체 모임을 가지고 있다.

또한 연중 지속적으로 소외된 이웃들인 무의탁 결식노인, 생활보호대상자를 위한 무료급식 및 경로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의 사역은 크게 ①몽골권, ②이란을 중심으로 한 무슬림권, ③필리핀과 아프리카를 중심으로한 영어권, ④인도를 중심으로한 서남아시아권 등 ⑤조선족, 한족을 중심으로 한 중국권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사역하고 있다.

또한 외국인근로자들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고 돕고자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 창립 이후 ①몽골/울란바타르 문화진흥원, ②외국인근로자 자녀교육을 위한 재한몽골학교, ③인터넷방송국 등의 협력기관들과 더불어 외국인근로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며, 이들을 지원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재한 몽골 외국인학교]

  
▲ 뭉골외국인학교(운영이사장 유해근 목사) 졸업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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