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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5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와 함께 교회개척- 인도 배정희

배남준 2016. 12. 1. 15:14


[역경의 열매] 배정희 <5>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와 함께 교회 개척 기사의 사진

1993년 월드미션 단기팀으로 인도를 찾아 현지 아이들과 함께 한 배정희 선교사.




난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구하며 기도했다. 기도하면서 마음에 주신 감동은 북인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라는 것이었다. 일단 과거 여의도순복음교회 대학선교회에서 강의했던 경험을 살려 인도 신학생들에게 필요한 강의를 시작하면 될 것 같았다. 계속 기도하자 성령님께서 분명하게 북인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북인도 신학교의 이사장인 싱 목사님은 한국 장로회신학대에서 신학을 전공하셨다. 한국인 이명희 사모님과 결혼하신 후에 인도로 돌아와 북인도 신학교를 세우셨다. 이미 친분이 있었던 싱 목사님께 강의 자리를 부탁하면 허락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왔다. 그러나 싱 목사님께 전화하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싶었다. 그저 기도만 했다. 놀랍게도 다음날, 싱 목사님이 내게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배 선교사님, 시간이 되시면 우리 신학교에서 강의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정확히 일하셨다. 나는 하나님의 도구란 사실을 새삼 느꼈다. 하나님은 내게 북인도 신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이제 인도 선교 사역의 첫 걸음을 떼게 됐다. 강의하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했다. 지난 2년간은 힌디어(hindi language) 공부에 집중했기에 학생들을 가르치며 먼저 나 스스로가 배울 수 있었다. 가르치기 위해선 기도하고 준비해야 했다. 북인도 신학교 학생들은 모두 장차 인도 교계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영광스런 일이었다. 

하루는 한 신학생이 기도제목을 나누고 싶다며 찾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갑자기 실명이 됐고 생활고로 병원에 갈 수 없어 기도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의 이름은 바반 쿠마르. 나의 첫 제자였다. “한 사람의 제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쿠마르가 첫 번째의 그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바반 외에 악발과 아닐, 비젠드라, 프렘 등도 나의 제자였다.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 한 뒤에 나와 동역했다.  

난 신학교 이사장이신 싱 목사님에게 다섯 명의 신학생이 졸업하면 함께 사역해도 좋은지 의논했다. 목사님은 쾌히 승낙하셨다. 선교지에서 이미 다른 선교사와 사역을 하고 있는 현지 사역자들에게 더 좋은 사례비를 제시하며 일종의 ‘빼내기’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런 일들을 통해 현지 선교사들끼리 관계가 악화되기도 한다. 모든 일에는 질서가 중요했다.  

난 바울이 고백한대로 사역하고 싶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함이라.”(롬 15:20) 바울의 고백이 나의 선교 원칙이다. 그 원칙대로 난 절대로 남의 터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저 크건, 작건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바반 쿠마르는 신학교를 졸업한 뒤 싱 목사님의 축복 속에 나와 함께 교회를 개척키로 했다. 우린 델리에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장소를 물색했다.  

1994년 델리에 왔을 때부터 주셨던 소원이 교회 개척이었다. 인도에서 초대교회 같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꿈을 가졌다. 힌디어 공부가 끝날 즈음, 96년을 넘기기 전에 교회를 개척하고자 결단했다. 당시 교회 개척을 위한 기도를 하기만 하면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가까운 시장통인 무카(Muka) 지역이 마음 가운데 떠올랐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난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구하며 기도했다. 기도하면서 마음에 주신 감동은 북인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라는 것이었다. 일단 과거 여의도순복음교회 대학선교회에서 강의했던 경험을 살려 인도 신학생들에게 필요한 강의를 시작하면 될 것 같았다. 계속 기도하자 성령님께서 분명하게 북인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북인도 신학교의 이사장인 싱 목사님은 한국 장로회신학대에서 신학을 전공하셨다. 한국인 이명희 사모님과 결혼하신 후에 인도로 돌아와 북인도 신학교를 세우셨다. 이미 친분이 있었던 싱 목사님께 강의 자리를 부탁하면 허락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왔다. 그러나 싱 목사님께 전화하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싶었다. 그저 기도만 했다. 놀랍게도 다음날, 싱 목사님이 내게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배 선교사님, 시간이 되시면 우리 신학교에서 강의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정확히 일하셨다. 나는 하나님의 도구란 사실을 새삼 느꼈다. 하나님은 내게 북인도 신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이제 인도 선교 사역의 첫 걸음을 떼게 됐다. 강의하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했다. 지난 2년간은 힌디어(hindi language) 공부에 집중했기에 학생들을 가르치며 먼저 나 스스로가 배울 수 있었다. 가르치기 위해선 기도하고 준비해야 했다. 북인도 신학교 학생들은 모두 장차 인도 교계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영광스런 일이었다. 

하루는 한 신학생이 기도제목을 나누고 싶다며 찾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갑자기 실명이 됐고 생활고로 병원에 갈 수 없어 기도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의 이름은 바반 쿠마르. 나의 첫 제자였다. “한 사람의 제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쿠마르가 첫 번째의 그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바반 외에 악발과 아닐, 비젠드라, 프렘 등도 나의 제자였다.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 한 뒤에 나와 동역했다.  

난 신학교 이사장이신 싱 목사님에게 다섯 명의 신학생이 졸업하면 함께 사역해도 좋은지 의논했다. 목사님은 쾌히 승낙하셨다. 선교지에서 이미 다른 선교사와 사역을 하고 있는 현지 사역자들에게 더 좋은 사례비를 제시하며 일종의 ‘빼내기’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런 일들을 통해 현지 선교사들끼리 관계가 악화되기도 한다. 모든 일에는 질서가 중요했다.  

난 바울이 고백한대로 사역하고 싶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함이라.”(롬 15:20) 바울의 고백이 나의 선교 원칙이다. 그 원칙대로 난 절대로 남의 터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저 크건, 작건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바반 쿠마르는 신학교를 졸업한 뒤 싱 목사님의 축복 속에 나와 함께 교회를 개척키로 했다. 우린 델리에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장소를 물색했다.  

1994년 델리에 왔을 때부터 주셨던 소원이 교회 개척이었다. 인도에서 초대교회 같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꿈을 가졌다. 힌디어 공부가 끝날 즈음, 96년을 넘기기 전에 교회를 개척하고자 결단했다. 당시 교회 개척을 위한 기도를 하기만 하면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가까운 시장통인 무카(Muka) 지역이 마음 가운데 떠올랐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난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구하며 기도했다. 기도하면서 마음에 주신 감동은 북인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라는 것이었다. 일단 과거 여의도순복음교회 대학선교회에서 강의했던 경험을 살려 인도 신학생들에게 필요한 강의를 시작하면 될 것 같았다. 계속 기도하자 성령님께서 분명하게 북인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북인도 신학교의 이사장인 싱 목사님은 한국 장로회신학대에서 신학을 전공하셨다. 한국인 이명희 사모님과 결혼하신 후에 인도로 돌아와 북인도 신학교를 세우셨다. 이미 친분이 있었던 싱 목사님께 강의 자리를 부탁하면 허락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왔다. 그러나 싱 목사님께 전화하지 않





았다. 이 일에 대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싶었다. 그저 기도만 했다. 놀랍게도 다음날, 싱 목사님이 내게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배 선교사님, 시간이 되시면 우리 신학교에서 강의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정확히 일하셨다. 나는 하나님의 도구란 사실을 새삼 느꼈다. 하나님은 내게 북인도 신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이제 인도 선교 사역의 첫 걸음을 떼게 됐다. 강의하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했다. 지난 2년간은 힌디어(hindi language) 공부에 집중했기에 학생들을 가르치며 먼저 나 스스로가 배울 수 있었다. 가르치기 위해선 기도하고 준비해야 했다. 북인도 신학교 학생들은 모두 장차 인도 교계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영광스런 일이었다. 

하루는 한 신학생이 기도제목을 나누고 싶다며 찾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갑자기 실명이 됐고 생활고로 병원에 갈 수 없어 기도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의 이름은 바반 쿠마르. 나의 첫 제자였다. “한 사람의 제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쿠마르가 첫 번째의 그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바반 외에 악발과 아닐, 비젠드라, 프렘 등도 나의 제자였다.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 한 뒤에 나와 동역했다.  

난 신학교 이사장이신 싱 목사님에게 다섯 명의 신학생이 졸업하면 함께 사역해도 좋은지 의논했다. 목사님은 쾌히 승낙하셨다. 선교지에서 이미 다른 선교사와 사역을 하고 있는 현지 사역자들에게 더 좋은 사례비를 제시하며 일종의 ‘빼내기’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런 일들을 통해 현지 선교사들끼리 관계가 악화되기도 한다. 모든 일에는 질서가 중요했다.  

난 바울이 고백한대로 사역하고 싶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함이라.”(롬 15:20) 바울의 고백이 나의 선교 원칙이다. 그 원칙대로 난 절대로 남의 터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저 크건, 작건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바반 쿠마르는 신학교를 졸업한 뒤 싱 목사님의 축복 속에 나와 함께 교회를 개척키로 했다. 우린 델리에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장소를 물색했다.  

1994년 델리에 왔을 때부터 주셨던 소원이 교회 개척이었다. 인도에서 초대교회 같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꿈을 가졌다. 힌디어 공부가 끝날 즈음, 96년을 넘기기 전에 교회를 개척하고자 결단했다. 당시 교회 개척을 위한 기도를 하기만 하면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가까운 시장통인 무카(Muka) 지역이 마음 가운데 떠올랐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