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6월 25일 인도 뉴델리에 다시 들어갔다. 뉴델리는 수도인데도 첸나이보다 훨씬 더 삭막하게 느껴졌다. 7월부터 뉴델리의 언어학교에 등록해 본격적으로 힌두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뉴델리의 여름은 상상을 초월할만큼 높은 기온으로 악명 높다. 연일 42도를 넘는 게 기본이다. 어떤 날은 체감온도가 47도, 심지어 50도를 넘기기도 한다. 그런 날엔 지칠 힘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인도생활에 적응돼 가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점점 인도 생활에 길들여져 갔다. 이곳의 환경이 어떠하든, 아무리 덥든, 수십 마리의 도마뱀이 한꺼번에 떨어지든, 온 몸이 벌레에 물리든 나는 이곳에서 견뎌야 한다. ‘부름 받아 나선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힌두어는 영어와 함께 1965년부터 인도의 공용어가 됐다. 인도와 네팔, 파키스탄, 피지 등에서 5억여 명이 힌두어를 사용한다. 인도에선 특히 북인도 지역에서 많이 통용된다. 남인도에서는 힌두어를 몰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난 북인도에서 주로 사역할 계획이라 힌두어를 반드시 배워야 했다.
뉴델리의 힌두어 중앙연구소에서 언어를 배웠다. 한 반에 아시아, 유럽, 미주 등에서 온 15명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다. 학생 가운데는 한국 선교사님들도 있었다. 나름 열심히 공부해 힌두어로 작문을 할 수 있게 됐다. 2년 동안 정말 열심히 언어 공부를 했다. 졸업식이 다가왔다. 샤르마 교장 선생님은 졸업식 때 인도 교육부차관이 참석할 거라면서 내게 힌두어로 5분 연설을 하라고 했다.
처음엔 힌두어 회화를 못해 교장 선생님 앞에서 대성통곡했던 내가 교육부차관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인도에서의 나의 삶은 깊어져 갔다.
94년 10월에 뉴델리는 페스트로 초비상 상태가 됐다. 언론은 연일 페스트 창궐을 톱뉴스로 다뤘다. 페스트가 발병한 환자 숫자가 400명을 넘어서 대재앙이 우려된다는 보도였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 대사관 직원 및 주재원들은 전세 비행기로 뉴델리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페스트가 인도를 넘어 인근 네팔과 파키스탄, 중국의 사천성 등지로 확산된다는 보도가 이어지자, 한국 정부에서도 주재원 및 현지 한인들을 위해 전세 항공기를 준비했다. 뉴델리의 한인들도 외출하지 않고 집에만 머물렀다.
선교사는 선교지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페스트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페스트와 같은 죽음의 기운은 사역 내내 쫓아 다녔다. 보이는 페스트만이 죽음의 병이 아니었다. 죽음을 부르는 수많은 영들과 담대히 싸워야 했다. 이 담대함과 평강이 지금까지 인도 선교를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자주 묻는다. “선교사님, 어떻게 인도에서 혼자 지내실 수 있었어요. 무섭지 않았나요. 두려움과 외로움을 어떻게 견디셨나요.” 비결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생명의 영을 받는 것이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강의 영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
96년 2월 어느 정도 힌두어를 배워서 기본적인 말을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사역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역을,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해야 할 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는 가장 강력한 일은 기도하는 것이었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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