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에게 있어 ‘어머니’의 존재는 단순한 양육자의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어려서부터 ‘선비 같은’ 아버지 보다 ‘장부 같은’ 어머니에게 각별한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그 자신 기독교 신앙을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았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선이 굵은 여장부’형의 어머니의 결단으로 그의 집안 전체가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그런 어머니에게서 결단력 있는 ‘여장부’의 기질을 전수 받았던 것이다.
김동길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박또라 할머니는 보통 어른이 아니었다. 부산 피난 가 있을 때와 서울에 환도한 직후 한동안 집에 모셨던 일이 있는데 그 철저한 신앙생활은 그래도 열심이었다고 자처하던 우리 집 식구들을 모두 무색케 하였다. 90이 다 되신 노령에도 불구하고 성경 읽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그 일과를 쉬는 일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그 할머니 속에서 큰 바윗돌 같이 든든하고 장엄한 신앙의 용사의 모습을 발견하군 했다. 총장 선생이 아침에 기도서를 들고 나오거나 또는 번번이 ‘기도하고 시작합시다’ 할 때에는 두 분이 흡사하다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김동길 『김활란박사 소묘』 157-158.
어머니 쪽에서도 김활란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어머니는 이따금 나를 가슴에 안고 기도하셨다. ‘나의 자식 헬렌을 하나님께 바치겠나이다.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의 뜻대로 쓰시는 그릇을 만들겠나이다.’ 어머니는 일편단심, 나를 기독교 속에서 키우고 기독교를 내 정신의 전부로 만들고 싶어 하셨다. 나는 종교라는 정신생활을 통하여 서양의 문명을 흡수하게 된 선택된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서전』 34.
서양인에 대한 호기심은 동경으로 바뀌었고 영화소학교를 거쳐 이화학당 중등과와 대학과를 거치는 동안 선교사들은 그에게 ‘고등 교육’의 혜택을 준 ‘은인’(恩人)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1914년 이화학당 대학과 1회 졸업생이 되면서 “그렇게 오래 동안 무시되어 온 여성 교육의 성취와 한국 여성들에게 이러한 기회를 준 미쓰 프라이 선생과 그 동료들에 대한 감사의 눈물” 을 흘렸고 계속해서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두 차례 미국 유학을 하였고 ‘한국 최초의 여성 박사’라는 명예를 얻었다. 『자서전』 60.
을 흘렸고 계속해서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두 차례 미국 유학을 하였고 ‘한국 최초의 여성 박사’라는 명예를 얻었다.
김활란의 종교 체험도 어머니에게 끌려 교회에 나가는 첫 주일에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린 후, 교회 목사와 전도부인을 비롯한 교인들이 그의 집으로 와서 대대로 섬겨 오던 우상 섬기던 것들을 모아 불에 태웠다.
이같은 어린 시절의 종교 체험이 보다 분명한 단계로 발전한 것은 1913년 이화학당 졸업반 때였다. 그는 ‘공주회’ 종교 모임에 참석하여, “죄를 회개하라”는 목사들의 설교를 듣고 처음엔 반감을 느끼던 중,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의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십시오. 또 우리가 모두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야만 할 죄인들인가 가르쳐 주십시요”하고 기도실에서 철야 기도를 시작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이마를 드는 순간, 나는 희미한 광선을 의식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얼굴이 보였다. 그 예수의 모습에서 원광이 번져 내 가슴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았다. 사방은 어두웠다. 사면은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득히 먼 곳에서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처절한 부르짖음은 아득히 먼 것도 같았고 바로 귀 밑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울부짖고 호소해 오는 처절한 울음소리, 그 소리를 헤치고 문득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소리가 들리느냐?’
‘네 들립니다.’
‘저것은 한국 여성의 아우성이다. 어째서 네가 저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느냐? 건져야 한다. 그것만이 너의 일이다.’
그 목소리는 분명했다. 두 손을 모아 쥔 나는 어느 틈에 흐느껴 울고 있었다. 갑자기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나의 전신은 땀으로 함빡 젖어 있었다. 나는 다시 꿇어 엎드린 채 오래오래 흐느껴 울었다. 감사의 눈물이었다. 나에게 뚜렸한 목표를 주신 예수님께 드리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자서전』 58-59.
한국 여성의 고등교육 - 그것이 김활란의 삶을 지배하는 소명 의식이 되었으며 그것은 그의 종교적인 신념이었다.
1913년 기도실 체험에서 이같은 소명 의식과 함께 교만과 오만과 증오에 대한 ‘죄 의식’(Sin consciousness)도 형성되었다.
김활란은 “만일 누가 나에게, ‘너의 평생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느냐?’고 묻는 다면 나는 서슴없이, ‘나는 나의 평생을 믿음으로 전진시켰다’고 조용한 자세로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서전』 427.
1961년 해방 이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이화여자대학 졸업생들을 파키스탄에 선교사로 파송한 것도 “‘많은 것을 네가 그저 받았으니 그저 주어라’ 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진실한 마음으로 복종” 한 경우였다. 『자서전』 400.
이처럼 김활란에게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였고 그의 교육 및 종교 활동은 이러한 은혜에 보답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김활란은 1913년 하늘의 음성을 듣는 종교 체험을 한 후에도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으로 기도생활을 하면서 신비로운 신앙 경험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그가 작사한 “캄캄한 밤 무서운 바람 불 때에”라는 찬송가는 1921년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태평양 선상에서 경험한 종교적 체험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었다. 일제 말기 총독부에 끌려 다니며 강요된 ‘친일’ 행각으로 심신이 피곤해 지쳤던 어느 해 여름, 진관사에서 열린 여자기독교청년회수양회 기간 중에 “부활하신 예수를 뵈었으며 그 체험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힘을 주었다.
” 김동길, 156.
김박사의 장례식은 평소의 유언인 "장례식 대신 더 풍성한 생명의 길로 환송해 주는 환송예배를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거기에 적합하게 모든 승리와 웅장하고 신나는 음악회가 되기를 원한다"는 부탁에 따라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에서 웅장한 환송 음악회가 장례식을 대신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그녀의 영전에 대한민국외교공로상 최고훈장을 추서했다. 일생을 독신으로 오직 한국의 복음화운동과 교육일선에서 헌신한 그녀는 기독교의 정신을 모든 생애를 통해 몸소 실천한 세계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펌 [발췌]
- 故 김활란 총장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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