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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배남준 2016. 9. 1. 14:03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1879~1910)   


   [과학자이야기] 김점동 - 박에스더 
       - Dr. 박 에스더



  1890년 10월, 박에스더는 여성병원 ‘보구여관’ 의사로 내한한 로제타 셔우드(Dr. Rosetta Sherwood)의 통역을 맡게 된다. 에스더의 영민함을 눈여겨 본 당시 이화학당의 교장이었던 스크랜턴 대부인의 추천이었다. 당시 박에스더는 환자를 돌보는 직업에 존경은 느끼면서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병원에서 통역을 하려면 환자의 환부를 봐야 하고, 수술실에도 들어가야 하는 등 14세 어린 여성으로 감당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느 날 입술이 갈라진 아이 하나가 병원에 들어왔다. 구순구개열, 흔히 언청이라고 부르는 병이었다. 아이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당시 한국의 의술로 볼 때 언청이는 평생 놀림을 받아야 하는 불치병이었던 것.


   “수술하면 정상이 된다.”는 에스더의 통역에 아이의 부모는 놀랐다. 아이의 수술이 시작되고, 수술 칼이 얼굴에 닿자 피가 쏟아졌다. 지켜보는 에스더가 더 떨렸다. 며칠 후 아이의 얼굴에서 붕대를 풀었다. 정상으로 돌아온 아이를 보자 부모는 감격해서 울었다.

 

 “아, 정말 놀랍다. 모두 고칠 수 없다고 포기했는데 저렇게 간단히 고치다니.” 에스더는 처음으로 의술의 힘에 놀랐고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그래 나도 훌륭한 의사가 되어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살 거야.”


   조선시대 여성들의 지위는 낮았다. 병에 걸려 도 치료받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간단히 치료가 되는 종기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다리를 못쓰게 될 만큼 악화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광혜원(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이 있었지만 여자는 바깥출입도 잘 못하던 시기라 여자들만이 갈 수 있는 병원이 필요했던 것. 보구여관(保救女館)은 1887년(고종 23년)에 스크랜턴 부인의 제안으로 미국 감리교 여성의사인 M.D. 하워드가 이화학당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이다.

 


한국최초의 여성의사 박 에스더 


 

의사로 헌신하기로 다짐하다


   에스더의 이름은 김점동(Esther kim pak, 朴愛施德)이다. 서울 정동의 가난한 선비인 김홍택과 연안 이 씨 슬하 딸만 넷인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에스더가 10세 무렵 정동에서는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김홍택도 미감리회 초대 선교사였던 아펜젤러의 집에서 잡무를 보고 있었다. 신앙이 있어서라기보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이화학당을 세우고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여자아이들을 교육하던 스크랜턴 부인이 에스더의 아버지를 설득해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영어와 산수 등 일반과목과 함께 주기도문, 찬송, 기도 등을 배우면서 점차 신앙의 길로 들어섰던 것.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에스더는 이화학당에 들어가면서 정신과 영혼의 변화를 겪게 된다.


   1888년 여름밤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쳤다. 기숙사 방에서 두려움에 떨던 에스더는 선교사들이 들려주었던 노아 홍수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동료 학생들과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했던 것. 기도가 끝나자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에스더는 벼락에 놀라 성직을 다짐했던 ‘루터’처럼 바로 그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그 헌신은 1890년 보구여관에서 셔우드의 통역을 하게 되면서 ‘의사’라는 직업으로 구체화 된다.


   1891년 1월 25일, 에스더는 올링거(F. Ohlinger)에게 세례를 받는다. ‘에스더(Esther)’는 이때 받은 세례명으로 태어날 때 부모님이 지어주신 ‘점동’이 보다 더 많이 불리게 된다. 에스더는 셔우드가 보구여관 안에 만든 ‘의학반’에서 의학의 기초를 배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 
                     -뒤에 건물이 여성전문 병원-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의사가 되다


  1893년, 당시 17세였던 에스더의 나이는 14세만 되면 결혼을 종용하던 당시의 풍습으로 보면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외부 활동을 계속하던 에스더에 대한 부모의 염려로 결혼을 서둘렀다. 그해 5월 24일, 박유산이라는 청년과 결혼한다. 셔우드(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 ‘로제타 홀’로 불림)와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 부부의 중매였다. 박유산은 홀 선교사의 조수로 일하던 믿음이 깊고 성실한 청년이었다. 가난했지만 선비 집안이었던 에스더와 맞지 않는 낮은 신분의 청년이었지만 에스더는 결국 부모를 설득해낸다.


   에스더 부부는 1894년 5월 4일 닥터 홀의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진료를 계속한다. 1894년 청일전쟁이 터지고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던 평양. 2년 4개월 동안 그곳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진료를 계속하던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는 발진티푸스에 걸려 순교하고 만다. 남편을 양화진에 묻고 로제타 홀 선교사는 뱃속의 아기와 돌이 지난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로제타 홀은 에스더에게 본격적인 의학 공부를 권했다. 박에스더(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부부도 함께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로제타 홀 선교사의 친청인, 뉴욕 리버티에 도착한 에스더는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리버티 공립학교에 등록한다. 1895년 에스더는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해 9월 에스더는 뉴욕시의 유아병원(Nursery and Child's Hospital)에 들어가 그곳에서 1년 이상 근무하면서 생활비를 버는 한편 개인 교수를 통해 라틴어와 물리학, 수학 등을 공부한다. 1896년 10월 1일, 스무 살의 에스더는 드디어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현재 Johns Hopkins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는다. 박유산은 로제타 홀의 친정에서 농장일을 하며, 생계비를 벌었다.


   1900년 6월, 스물네 살의 나이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에스더는 한국 최초의 여성의사가 되었다. 꿈꾸던 의사가 되었지만 에스더는 기쁘지만은 않았다. 6년 동안 노동을 하며 아내의 학비와 생활비를 뒷바라지 하던 남편이 불과 20일 전에 급성 폐결핵으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음식과 문화도 전혀 다른 미국에서 힘듦과 외로움, 향수병을 견디며 외조를 기쁨으로 감당했던 남편의 미국행은 오로지 아내를 돕기 위해서였다.

 
   의사와 교육가로 헌신하다

에스더는 미국에서 보장된 화려한 생활도 뒤로 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고국에 돌아온 에스더는 이미 한국에 들어와 의료봉사를 펼치고 있던 로제타 여사와 조우한다. 6년 전에는 조수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동역자로 힘을 합쳤다. 에스더는 이후 10년 동안 의사와 교육자로 힘껏 봉사하는데, 통역자로 드나들었던 서울의 보구여관을 맡아 한국인 여의사가 한국 여성을 진료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또 순교한 홀 의사의 뜻을 기념해 지은 평양 기홀병원과 황해도,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며 무료 진료 사역을 펼친다. 평양에 광혜여원의 건물을 신축하고, 한국 최초의 간호원 양성소 개설에도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로제타 홀 선교사를 도와 평양맹아학교와 전도 부인을 양성하는 여자성경학원 교수로도 활약한다. 이런 공로로 1909년 경희궁에서 고종황제가 임석한 가운데 열린 대한부인회 주최의 ‘해외유학 여성 환영회’에서 은장(銀章)을 받기도 했다.


   한 달에 300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며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던 에스더는 1910년 4월 13일,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에 결핵이 걸려 34세라는 나이에 짧고도 큰 삶을 마감했다.


   죽음 뒤에도 삶의 향기를 풍기다


   로제타 홀의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은 에스더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폐결핵 전문의가 된다. 결핵요양소를 세우고, 한국 최초로 결핵요양소의 운영비 마련과 결핵에 대한 계몽과 선전을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는 등 결핵 퇴치에 앞장섰다.


   2006년 한국과학기술부는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을 최연소로 입학해 졸업한 박에스더의 공을 기려 과학기술 선현 분야에 박에스더를 선정,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다. 보구여관의 맥을 잇는 이화여대 의과대학 동창회에서는 2008년부터 ‘자랑스러운 이화의인 박에스더賞’을 제정, 의사로 박에스더의 정신을 잇는 동문 여의사에게 시상하고 있다.


   평양 선교를 떠나며 에스더에게 동행할 것을 물었던 로제타 홀 선교사에게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는 데는 어느 곳이라도 가겠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나를 죽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에 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라고 의연히 대답했던 에스더. 그 삶이 그 신앙의 답이 되었다. ( 주간기독교 / 이연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