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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신앙인 김재원 아나운서와 대담 [펌]

배남준 2016. 7. 27. 22:05



 



김재원 아나운서와 볼펜 주고받기 놀이를 했다. 말이 주고받기지, 마주 보며 볼펜을 던질 테니 잘 받아서 다시 던져보라고 했다. 그래서 몇 번 던지고 받기를 했다. 유명인과 인터뷰 도중에 이런 놀이라니…, ㅎㅎ 참 재미있었다. 그러다 그가 돌연 볼펜을 확 던졌다. 받지 못한 볼펜이 기자의 가슴에 추락했고, 순간 당황했다. ‘이게 뭐 하시자는?!’ 1초쯤 기분이 불쾌해지고 얼굴색도 슬쩍 붉어질 뻔했는데, 그가 태연스레 해명에 들어갔다.


“사람끼리 대화를 잘 못한다는 건 바로 이런 게 아닐까요?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던지면 상대방이 잘 받을 수 없으니까요.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아아, 그래서 그랬구나.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확실하게 배웠다. 말을 잘하는 직업인(職業人), KBS 아나운서 김재원(46세)을 모른다면 아마도 대한민국 아줌마 시청자는 아닐 것이다. 그가 2008년부터 이금희 아나운서와 함께 진행해온 아침마당을 하차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 4월 어느 날,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에 그의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그럴 정도로 그는 시청자의 사랑을 많이 받는 방송인이다.


아침마당 진행은 5년이지만, 일부 시청자는 그가 아침마당을 진행한 지가 십년이 훨씬 넘었다는 ‘착각’도 한다. 1995년에 입사한 그가 97년부터 8년간 아침마당 토요노래자랑 진행을 먼저 했으니 그런 착각을 할 법도 하다.
물론 경우에 따라 1년을 보아도 10년 사귄 사람처럼 친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다. 일부 시청자의 ‘착각’은 어쩌면 김재원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 아닐까. 그는 현재 저녁시간대 방송인 ‘6시 내 고향’을 진행하고 있다. 백김치처럼 담백하고 맑고 꾸밈이 없고, 한편으로 묵은지처럼 숙성하고 발효된 속깊은 말로 출연자와 시청자 사이를 맛나게 연결하는 진행솜씨는 변함이 없다.


그의 ‘말 잘하는 비결’이 궁금했다. 그런데 그가 들려준 비결은 단순히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 속에 담긴 뜻, 곧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할 뿐 아니라, 자기의 마음부터 먼저 말해야 진정한 소통이 이뤄지기 때문이란다. 그러자면 마음을 말하고 읽기를 많이 연습해야 한다고 했다. 자기의 마음을 말하기도, 남의 마음을 읽기도 그저 되는 건 아니니까.


그가 최근《마음 말하기 연습》(푸르메 간)이라는 책을 냈다. 아나운서가 말하기에 대해 쓴 책인 줄만 알고 단순하게 집어든 독자라면, 뜻밖에 저자의 개인사와 하나님 이야기까지 더러 나오는 대목에서 감동 받으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의 마음 말하기는 겉절인 배추 같은 경량의 기술이 아니라, 고난이 깊었던 삶과 거듭난 신앙 가운데 오래 묵혀 묵직해진 언어라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갓 씻어낸 샐러드처럼 신선한 느낌을 주는 비결은 또 뭘까? 김재원에게 ‘꾸미지 않고 덧붙이지 않고, 마음에서 숙성된 담백한 언어로 말하기’가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글 이한민 / 사진 도성윤

 

책을 봤는데, 담백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더군요.

저는 글에서도 숙성을 좋아합니다. 쓸 때는 수첩에 쉽게 쓴 글인데요, 대신 오래 묵혀둔 글이지요. 써둔 글 중에서 나중에 봐도 이상하지 않은 걸 모아 책으로 낸 겁니다. 제가 SNS를 하지 않는 이유가, 생각나는 대로 쉽게 올린 글이면 저도 모르게 일파만파 퍼질 수 있거든요.

 

거의 매일 걸어서 출퇴근을 한다고도 썼던데.

집이 여의도에서 4킬로미터 거리인 마포에 있습니다. 어느 날 한번 해봤더니 괜찮은 거예요. 제 걸음이 그렇게 느리지는 않아서 한 37,8분쯤 걸려요. 버스를 타도 집에서 역까지 15분, 다해서 30분쯤. 이래저래 큰 차이 없거든요. 물론 ‘하루도 빠짐없이’라고 말하면 실제와 좀 많은 공간이 생기죠. 항상은 아니고요, 비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날 아니면 하루 한번 편도로, 일주일에 4,5번은 걸어서 출근 또는 퇴근을 합니다. 5년 전 캐나다 연수 다녀온 후로 차를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교통 주로 이용하고요. 아침마당 할 때는 주로 퇴근할 때 걸었고 요즘은 출근할 때, 왕복을 다 걷기는 한 달에 서너 번 되고요.

 

마포대교 위에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가지가지 해요. 하늘 보기 하고요, 강 볼 수 있고. 정말 오만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어요. 특히 ‘분노의 용변’이라는 걸 그때 하는데요, 제게 쌓인 분노나 쌓이려는 분노를 순간순간 털어버리는 거예요. 또 저는 여행을 참 좋아하는데요, 일상에서 여행을 자주 다니기가 쉽지 않잖아요. 하루에 40분 정도를 그렇게 저를 위한 여행의 시간으로 투자하는 것이죠.

또 사랑의교회 제자 훈련 때 의무적으로 로마서 8장 전장을 어렵사리 암송했는데 점점 잊어버리는 게 아깝더라고요. 다리에 오르는 순간 암송 시작하곤 합니다. 또 제가 다녀본 나라들, 아는 선교사들 이름 부르며 오대양 육대주 훑는 중보기도를 하죠. 제가 중보기도 덕을 많이 본 사람이거든요.

 

여행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여행 같은 연수 기간을 제법 오래 가지셨더군요.

입사하고 10년쯤 됐을 때 반복되는 일들을 하다보니까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마흔을 바라보니 뭔가 인생의 한 획을 그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재충전도 필요하고 해서, 삶의 하프타임 삼아 캐나다 행을 결정했지요. 원래 1년 생각했는데 1년 있다가 돌아올 곳이 아니더라고요. 2년 있기도 아쉬워 3년을 채우고 왔거든요. 회사나 어디 공식 지원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요. 당시 프로그램을 세 개 하고 있었는데, 그걸 내려놓고 떠나는 저의 행보를 회사에서나 제 주변에서나 이해할 수 없었을 거예요. 예측하지 못할 미래의 두려움 속에서도 과감하게 정리하고 나갔거든요. 지금은 고등학생이 됐지만 그때 초등학생이던 아들하고 아내하고 다 데리고.

 



가서 공부만 하신 겁니까?

회사 다니면서 할 수 없는 일을 많이 했지요. 이를테면 샌드위치 집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스시집에서 배달하고 중국인 주방장 밑에서 설거지도 했어요. 생계를 유지해야 했으니까 그런 공부 아닌 공부도 했어야 했고. 물론 진짜 공부야 첫 해는 방문연구원으로, 그 다음해부터는 대학원생으로 언어정책학을 했지만, 여행을 워낙 좋아하니까 짬짬이 많이 돌아 다녔어요.


캐나다를 베이스캠프로 해서 아는 선교사들이 있는 곳으로, 좋게 말하면 선교여행이지요. 예를 들면 페루, 에콰도르, 볼리비아 2주씩, 심지어 코소보에도 갔다 오고. 캐나다 원주민 아동을 위한 축구캠프 자원봉사도 가고. 제가 지금까지 전 세계 다녀본 55개 국 가운데 캐나다에 있을 때 한 30개 국 가까이 가본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값싼 세계항공이용권 구입해 2달간 미국 동부 거쳐 유럽 전역으로, 터키, 이집트, 이스라엘 들러 태국과 일본으로 한 15번 타고 내렸나? 세 식구가 마음껏 여행하고 왔지요. 그래서 제가 가족여행을 적극 추천하는데, 아이가 태어난 후로 가족이 그렇게 24시간 같이 있을 기회는 거의 없거든요. 장기간 가족여행을 하면 가족의 라이프스타일 다 알고 성향도 알게 되니까.


 

다녀와서 더 바빴던 것 같군요. 학위논문에 방송에 교회 순장까지 하게 됐다고요.

학위에 욕심 내 한 공부는 아니어서 논문을 미뤄놓고 캐나다 갔던 건데 마음 한 편에 숙제가 있는 것 같아 불편하더라고요. 한 1년 반 동안 경영학 박사논문 쓰면서, 대학 강의 나가면서, 제자훈련 받으면서, 아침마당 하면서, 가장 밀도 있는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 순장이 되었어요. 지역 순장은 아니고 장애아동을 둔 아버지들 모임을 섬깁니다. 저의 제자훈련 담당 목사님이 장애아동부서도 담당하는 분이어서 그 부모캠프에 한번 시간을 나누러 갔던 게 계기가 됐습니다. 장애아동을 둔만큼 삶에 많은 문제와 고민을 해결하시고 경지에 오른 분들이라, 일주일에 한번 모이는데 제가 더 많은 도움을 받지요.

 

순모임에서 삶을 나눈다고 하셨는데, 살아온 이야기를 이제 들어볼까요?

저는 엄밀히 말하면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열심히 믿으셨는데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신자다 보니까 아버지가 신앙을 버리고 어머니를 선택하셨지요. 그래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강요하지 않고 성경책 속에 어머니 사진 넣고 기도를 하셨대요. 그러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를 할 때 부모님을 졸라 기독교라 썼어요.

 

아마 그때 아버지 어머니도 갈등을 겪고 계셨던 모양이에요.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미용실이 대연각호텔에 있었는데 1971년 화재 때 미용실 누나들 몇 명이 세상을 떠났거든요. 어머니가 그 충격을 안고 몇 년을 지내오신 건데 버거우셨을 거예요. 그래서 1977년에 신앙의 길을 선택하셨고 나는 친구에게 교회 데리고 가달라 해서 동부이촌동 한강교회 출석했어요.

어머니는 신앙생활 몇 년 못 하시고 간암으로 투병하다 제가 중1 때 세상 떠나셨는데, 참 뜨거우셨어요. 새벽마다 웅얼웅얼 방언으로 기도하셨던 것 같고, 주방에서 일하시다 창문 향해 “예수님!” 외치기도 하시고. 버스를 타면 저 버려두고 옆자리 누군가에게 전도하시고.





아버지에 대해 각별했던 게 이해가 됩니다.

아버지가 엄마 역할까지 하려고 무척 애쓰셨어요. 엄격하게 기르면서도 사랑을 표현하고 도시락도 친히 싸주셨어요. 튼실한 계란말이도 한결같이. 아침잠이 많은 저를 깨우기를 늘 힘들어하셨는데, 새벽마다 잠결에 들린 아버지의 도마 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명해요. 울적할 수밖에 없던 제 청소년기에 교회에서 위로를 많이 받아서, 교회 중고등부를 열심히 다녔고요.

 

아나운서 되고 싶다는 꿈은 언제 가졌습니까?

아나운서는 어릴 때부터 제 꿈이었는데 그 일을 과대평가하고 저 자신을 과소평가해서 꿈을 내려놓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제 꿈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중고등부 시절에 학생부 총무를 3년 했는데, 다니던 교회에서는 총무가 예배 끝나고 광고를 했거든요. 그때 매주 백여 명 앞에서 마이크 잡고 5분 이상 광고를 한 게 제게는 무대 적응훈련이 됐던 것 같아요. 또 대학 가서는 국립맹학교 가서 자원봉사로 수학과 과학을 가르쳤는데 그림과 그래프를 다 말로 표현해줘야 했거든요. 그리고 청년부 리더 하면서 지금 통독원 하시는 조병호 목사님을 알게 됐어요.

그 분이 신대원 시절에 만든 한시미션이라는 단체와 함께 지리산 오고가며 전도활동 하고, 산골 어르신들 이야기 들어주며 마음 읽는 훈련을 하게 된 겁니다. 5년간 해마다 여름과 겨울 두 번씩, 성경통독사경회에서 10번 통독사(通讀士)도 했어요. 저 아나운서 만드시려고 하나님이 나름대로 빚어 가셨던 것 같은데 저는 학원 캠퍼스 사역을 하겠다고 유학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다시 저를 부르셨지요.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미국 유학 중 새벽 2시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아버지였어요. “내가 아프다. 네가 들어와서 장례식 치르고 가야겠다” 하시더니 전화가 끊겼어요. 아버지는 그래놓고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거예요. 그때 저는 결혼한 지 두 달째였는데, 하루만에 돌아와 중풍병자 아들로서 병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기저귀 갈아드리고 밥 떠먹여드리고 걸음마 가르치고, 제가 갓난아기 때 아버지가 제게 해주셨을 일을 되갚은 것이죠. 아내는 졸지에 친정으로 돌아가고 제 도시락 수발을 시작했고요. 하나님께 ‘배신감’이 들어 그때는 기도도 못하겠더라고요. 제가 미국 있을 때 40분 걸어 날마다 새벽기도 했었거든요. 아버지 혼자 계신 게 절실하니까 도와달라고….

병원에서 보호자들의 유일한 낙이 텔레비전 보는 것뿐이에요. 저도 하루는 넉 놓고 텔레비전 보고 있는데 손범수 아나운서(독실한 신앙인)가 헬리콥터에서 내리더니 손을 쫙 뻗으며 “KBS 21기 신입사원을 모집합니다!” 하고 외쳐요.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모집” 하는데, 저도 모르게 “나도 아나운서나 한번 해볼까?” 했거든요. 아무 말 않던 아내가 다음날 도시락 가져올 시간 지나서야 나타났어요. 손에 KBS 누런 봉투 하나 들고서. 그때부터 아버지 주무시면 철야공부를 시작했어요. 장인어른이 일간지 오려서 시사상식 퍼 나르시고 병실 보호자들은 채널 선택권 제게 다 양보하시고. 의사, 간호사, 보호자, 심지어 환자들의 염원까지 담아 두 달 동안 죽도록 공부했더니, 합격시켜 주시더라고요.

 

하나님이 꿈을 이뤄주신 거네요.

하나님이 하신 것이죠. 제 직업은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피값으로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운서가 되면 바로 무슨 사역자처럼 쓰임 받을 줄 알았는데 큰 변화는 당장 없었고요, 한 10년 지나니까 이제는 때가 되었는지 유스코스타(Youth KOSTA)에서도 부르고, 여기저기 이렇게 간증도 하게 하시네요. 제가 최근 한 5,6년 사이에 새삼 깨달은 것이, 하나님은 저의 꿈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하나님이 제 삶을 잘 그려 가실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루실 것이니 제가 이제는 제 꿈을 꾸지 않겠다고 기도합니다. 제가 제 삶을 계획하고 스스로 그려가지 않겠다는 것이죠. 대신 하얀 스케치북을 늘 하나님 앞에 내놓겠습니다. 파스텔, 물감, 포스터칼라, 크레용 같은 것도 다양하게 준비해놓겠습니다. 제가 제 인생에 준비한 도구로 하나님이 마음껏 그림을 그리시면 됩니다라는 삶의 태도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듣고 보니 아내와 처가도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부인은 어떻게 만나신 겁니까?

초등학교 동창입니다. 짝꿍이었는데 넘어오면 안 된다고 책상에 금 그어놓던 사이였죠. 같은 교회 다녔고 대학생 때 선교활동도 같이 했습니다. 다닌 대학은 달라 서로 소개팅 시켜주기도 했는데 “그래도 네가 제일 낫더라” 고백하고 몰래 연애를 시작했지요. 유학 가기 직전에 공개했다가 저 혼자 유학 가서 1년은 편지로 큐티 나누고, 방학 때 들어와 결혼해서 같이 미국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두 달만에 아버지가 쓰러지신 거예요. 또 두 달쯤 지나 아버지가 긴 병에 진입할 것 같으니까 장인장모가 저에게 혼자 돌아가라 하셨어요. “자네 처랑 우리가 자네 아버님 돌볼 테니” 하시면서. 사실 아버지 쓰러지던 첫날밤에 지켜준 분도 장인이시거든요. 하지만 어떻게 그래요? 딸 시집보내고 두 달만에 그렇게 됐으니 그 분들이 가장 황당했을 텐데, 지금껏 서운한 말씀 한 번 안 하셨어요.

 

방송과 아버님 간병생활 어떻게 다 감당하셨습니까?

신입사원 연수받는 석 달 동안도 병원 간호사 방에서 양복 갈아입고 출근했는데, 아버님이 그 와중에도 간병인을 원치 않으시니 낮 시간이 문제잖아요. 당시 제 친구 중에 지금 코소보 선교사로 가 있는 이성민이 있었는데, 선교 나갈 준비 중이라 시간 있다고 낮에 대신 봐줬어요. 결국 제가 첫 해 춘천지국 발령 나서야 간병인을 받아들이셨지요. 그래도 저는 오후에 퇴근하면 2시간 청량리행 기차 타고 왔다가 막차 타고 다시 가서 몇 시간 쪽잠 자고 새벽에 출근했다가, 오후 되면 또 서울 오는 생활을 반복했어요. 서울 발령 받고서야 집에서 5년 정도 아버지 모셨는데, 밤 근무를 주로 해서 마감뉴스하고 아침에는 아버지 모시고 재활병원 다니고….


아버지 숨 거두실 때 저는 평일 아침마당을 대타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핸드폰 사고 사흘째였는데 방송 끝나니까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오더라고요. 화수목금 장례 치르고 오니까 아침마당 책임 프로듀서가 “무리한 부탁인 줄 알지만” 하면서 또 토요일 진행을 해달라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노래자랑 진행을 했죠. 저는 방송인이니까.

 

김 아나운서에게 방송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방송에서 복음적인 언어를 쓸 수는 없어요. 하지만 수백만 시청자에게 복음의 이미지는 심어줄 순 있거든요. 제 언행을 통해, 삶의 모습을 통해. 그래서 저는 방송 프로그램이 제 삶의 터전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12장 1,2절에 나오는 거룩한 산 제사가 제게는 방송인 것이죠. 그래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 부르실 때까지 쓰임받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는 인생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말 잘하는 비결 조금 더 들려주시면?

성경에 소금으로 고르게 하듯 말하라는 말씀이 있죠(골 4:6). 저는 그걸 “언어 소금통을 가지라”고 바꿔 말해요. 이때 소금이란 기도이고 말씀이고 평소에 쌓아둔 독서일 수도 있어요. 또 제가 볼펜 던지기 보여드렸습니다만, 사실 대화란 유리공을 주고받는 일입니다. 잘 받으려고 조심하고 또 잘 주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모두 필요하거든요. 소금 같은 언어로 내 마음을 잘 들려줄 뿐 아니라,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믿음을 증명하는 삶 또한 중요하다는 것도 잊지 말았으면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