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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은 작가 삶과 신앙 - 남편 김동리 작가와의 사랑을 회고

배남준 2016. 5. 8. 14:29

요즘 케냐 '투르카나의 어머니' 임연심 선교사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

  저서 :  ' 삶이 말하게 하라'


  [펌]

“김동리는 지나간 남자…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방에선 내보냈다”

격랑 같은 사랑의 흔적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서영은 작가의 집 현관문을 열자마자 기자를 맞이한 것은, 김동리와 찍은 사진이었다. 그것도 사람 키 반만 한 흑백사진 액자. 46세의 서영은은 76세의 남편 김동리가 붓글씨 쓰는 것을 한발 뒤에서 조신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거실 소파 뒤에는 짧디짧은 결혼기간 동안의 사진 두 컷이 보인다. 한 컷은 청담동 자택 마당에서, 한 컷은 지인들을 초대해 저녁식사 하는 사진이다. 서영은은 사진 속의 작은 잔을 가리켰다.

“이 잔 있지요? 이것만은 선생님이 직접 하셨어요. 사케 중탕. 다른 사람은 못하게 하셨지요.” 김동리는 사기 그릇에 뜨거운 물을 넣고, 그 안에 사케 잔을 넣어 술을 데워 마셨다고 한다.
소설가 서영은.
소설가 서영은.
서영은(71)이 이번에 낸 자전적 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해냄)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지인들을 초대해 저녁을 먹으면서 김동리가 사케 중탕을 손수 해 내는 장면이. ‘꽃들은 어디로 갔나’는 서영은이 14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로, 김동리와의 결혼 생활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담담하게 그려냈다. 70세가 넘어서야 토해놓는 지독한 사랑이야기. 그는 “내 자신을 객관화하기까지 4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했다. 감정도, 연민도 배제한 채 그려낸 소설은 연애소설이라기보다 한 남자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한 여인이 감내해야 하는 치열한 구도기(求道記)에 가깝다.

지난 2월 4일 출판기념 기자간담회 후 서영은 선생과 함께 그의 집에 들어선 길이었다. 공간이 보고 싶었다. 24세에 30세 연상의 연인을 만나 44세에 결혼하고 52세에 사별한 한 여인의 삶이 깃들어 있는 공간이 보고 싶었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세기의 로맨스를 혹독하게 치러낸 그 징글징글한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이 궁금했다. 김동리와 서영은의 연애담은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 강렬하다.

김동리는 26세에 교사 출신 김월계와 결혼해 다섯 아들을 뒀으나 소설가 손소희와 사랑에 빠져 첫째 부인을 버렸다. 다섯 아들을 데리고 손소희와 재혼했으나 김동리는 30세 연하의 작가 지망생 서영은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잠자리를 싫어한 손소희는 둘의 관계를 인정했고, 서영은을 따로 불러 “김동리 선생을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했다. 손소희가 세상을 뜨자 둘은 몇 달 후 서울 정릉 봉국사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김동리 74세, 서영은 44세였다. 김동리가 1995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 8년간 공식부부로 살았으나, 정상적인 부부생활은 단 3년에 불과했다. 김동리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서영은은 김동리가 세상을 뜰 때까지 간병인으로 살아내야 했다.

서영은이 공간을 기억하는 방식은 ‘미련’이라기보다 ‘무심’에 가까워 보였다. 서영은의 집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후배들이 올 때마다 가져다 준 화분이며 그림액자, 화장품이며 소품들이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거실 속 김동리와의 사진은 그중 하나였다.
서영은은 “버리는 것을 잘 못해요. 언젠간 꼭 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선생님한테 배운 것 같아. 선생님은 저보다 더 정리를 안 하시는 분이었어요”라며 웃었다. 기자가 출판사를 통해 자택 인터뷰를 제안하자마자 서영은이 한 말은 “그럼 청소를 해야겠네”였다고 한다.

서영은의 서재는 말 그대로 서고(書庫)였다. 볕 드는 창문 자리를 남겨두고 사방으로 책장이 있었고, 한쪽 벽에는 몇 겹씩 책장이 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방바닥 여기저기 책이 천장에 닿을 듯 수북이 쌓여 갔다. 방에는 김동리의 흔적이 없었다. 책도 사진도 메모도 남아 있지 않았다. 70대의 그녀는 여전히 문인들이 지어준 별명 ‘모딜리아니의 그녀’를 닮았다. 긴 목에 마른 체구, 갸름한 눈매에 알 듯 말 듯한 표정. 눈빛은 먼 산을 향해 있다. 그는 녹내장이다. 왼쪽은 시력을 거의 잃었고, 오른쪽 시야는 반만 남아 있다고 했다. 노안인 줄 알다가 4년 전에야 발견했다. 거실에도, 서재에도 재미(在美)작가 이현이 그려준 그의 초상화가 있는데 모딜리아니의 그녀를 꼭 닮았다. 목이 길고 깡마르고 눈동자가 어디를 응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서재에 있는 낮은 테이블에 그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 통통한 서영은 선생님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깡마르고 고뇌하는 이미지가 강렬해요. 몸에 군살이 붙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나요.
“딱히 그런 건 없어요. 키 164㎝에 체중 54㎏이에요. 평생 살이 쪄본 적이 없어요. 48~55㎏을 왔다갔다 했어요. 살이 찌지 않는 것은 체질인 것 같아요. 음식 남기는 것을 싫어해 일부러 소식은 안 합니다. 수영과 걷기운동은 꾸준히 해요.”

- 이 방에 김동리 선생의 흔적이 보이지 않네요.
“네. 2007년 산티아고 다녀와서 선생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방에서 내보냈어요. 김동리는 나에게 지나간 남자예요. 법적으로는 미망인이지만 김동리와 관계된 모임에 미망인으로 참석하거나 그런 건 전혀 하고 싶지 않아요. 단독으로 홀로 서고 싶어요. 작가이자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열매를 줄 때쯤 삶을 뒤엎고 다른 의미를 찾는 작업을 해왔어요. 계속 김동리 미망인으로 있으면 죽은 열매를 거둘지언정 실제 삶에서 새로이 획득하는 것들이 가로막힐 수 있어요. 그래서 나 혼자 이렇게 공포를 해요. ‘김동리는 지나간 남자다’. 그렇다고 사랑이 지나간 건 아니에요. 부부로서 맺은 인연이 어디 가겠어요. 내면에서 김동리에게 의존하는 의존적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 김동리 선생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남아 있나요.
“기억 속에는 남아 있어요. 그래서 눈이 오거나(둘 사이에는 눈에 얽힌 추억이 많다. 서영은이 한시(漢詩)를 적은 편지를 김동리가 살던 집 앞 눈 속에 파묻고 돌아오기도 했고, 김동리 앞에서 서영은이 눈 위에 벌러덩 누워 보기도 했다) 선생님이 좋아하는 물건이나 사진을 보면 문득문득 차오를 때가 있어요.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희석되긴 해요. 김동리에 대해서는 여한 없이 (사랑을) 쏟았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어요.”

- 쏟은 만큼 김동리 선생으로부터 충분히 받았나요.
“(1초의 망설임 없이) 전혀요. 받을 생각을 안 했으니까. 바라지도 않았고요. 성격적으로 제가 그래요. 속으로 피 흘리면서 감내하는 거죠. 김동리와의 사랑은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에요.”

- 김동리 선생은 생전에 “나는 다 가진 남자다. 첫째 부인은 자식을, 둘째 부인은 재산을, 셋째 부인은 사랑을 주었다”고 말했지요. 김동리 선생도, 서영은 선생도 서로를 ‘단 하나의 운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한 번도 ‘이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요.
“운명은 내가 수임(受任)을 해야 만나요. 의심을 하면 요만큼밖에 안 와요. 운명이라고 믿고 자기 자신을 던져야지요.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온전히 자기 자신을 던져야 오시는 겁니다.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던지는 만큼 보이는 거예요. 상처든 뭐든. 운명적인 사랑은 상처일 수밖에 없어요. 인생의 사계(四季)를 다 보여주는 것이니까. 겨울은 혹독하고 공허한 것이잖아요. 따뜻하고 아름답기만 한 것은 운명이 아니에요. 끝까지 가서 공허까지 열매로 거두는 것이에요. 운명이란 지속적인 흐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느끼는 거죠. 나는 이 생에서 이 사람한테 묶이겠구나, 하는. 그게 아무리 혹독한 시련이든 간에. 그 결심이 운명인 거죠.”
결혼 2년 후(1987년). 김동리가 76세, 서영은이 46세다.
결혼 2년 후(1987년). 김동리가 76세, 서영은이 46세다.
- 결혼 이후 혹독한 시련이 쓰나미처럼 몰려왔지요. 소설을 통해 “그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 생이 만든 신기루였을까”라면서 “사랑은 진즉 결혼생활에서 메말라버렸다”고 했고, 전처 자식들과의 재산문제, 김동리 선생의 병마 등 생의 고통이 잇따랐습니다. 결혼을 후회합니까.
어휴. 너무 감사해요. 결혼 생활이 흉터투성이인데, 그 고통을 견디면서 사람이 됐으니까. 하나님을 진짜 만났잖아요. 이런 모든 것들이 결혼을 통해 왔기 때문에 감사할 일밖에 없어요.”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됐겠군요.
“네.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 것 같아요. 별수 없이 자기중심적인, 싸가지 없는 작가로 있었을 거예요.”

- 결혼이 서영은 선생님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요.
“수모와 굴욕이 많았어요. 그 앞에 무릎을 딱 굽힐 줄 알게 된 거죠. 거기에서는 내가 교만한 게 일절 통하지 않아요. 자기에게서 비롯된 실핏줄 같은 것이 내 가슴속에 꼭짓점으로 마주치는 상황이에요. 피할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고 마주치기에는 너무 벅찬. 그럼에도 죽을 수는 없잖아요. 어떤 식으로든 치러내야 하잖아요. 죽기를 각오하고 벽에 머리를 부딪쳤을 때 문이 생기는 것, 그게 인생 같아요.”

- 보통 사람들은 결혼 후 불행하면 이혼을 떠올립니다.
“이혼? 어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너무나 힘들게 사랑을 가꾸어 왔고, 그 결과로서 치러야 할 것들이었기 때문에. 끌어안는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사랑은 행복을 위해 하는 게 아니에요. 후배들에게 그럽니다. ‘행복하기 위해 결혼하려면 꿈 깨라. 인간이 성숙하기 위해서 결혼한다고 생각하면 답이 될 수 있다’고.”

- 다시 돌아간대도 김동리 선생과 결혼할 건가요.
“네. 두 번, 세 번이라도. 왜냐하면 그건 내가 정화될 게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니까요. 한 번에 정화된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 서영은 선생님은 어려서부터 위험한 사랑을 꿈꾸어 왔습니다. “나밖에 모르는 남자는 관심이 없다. 사랑을 나눈 대상이 열 명쯤, 또는 그보다 더 많아도 좋다. 그런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선택된 여자이고 싶다. 나의 사랑을 얻으려면 남자는 그런 모험을 해야 한다. 가정을 가졌든, 수도승이든, 아편에 미쳤든, 노름에 미쳤든, 사랑을 얻기 위해 그가 치르는 대가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다”(‘내 사랑이 너를 붙잡지 못해도’ 중)라고 한 적도 있고요.
“자기 성품이 자기 삶의 그림을 만드는 것 같아요. 저기 아버지 사진 보이죠? (책상 위 흑백사진 속 남자는 그를 꼭 닮았다.) 신학을 하신 아버지는 온화하고 신사셨어요. 너무 뻔하게 사셔서 오히려 우리 아버지는 왜 바람을 안 피나 이럴 정도였지요.”

- 김동리 선생과 사별 후 숱한 여행을 다니셨지요. 지금까지 50개국 165개 도시를 방문했고요. 서영은 선생님에게 여행이란 뭔가요.
“낯선 곳에 나를 던지는 거예요. 위험천만한 곳에 나를 던져놓고 새로운 모험을 하는 거죠. 사랑의 방식과 비슷해요. 극단적 상황까지 밀고 가서 내 자신의 내면의 힘을 시험해 보는 거예요.”

- ‘꽃들은 어디로 갔나’에는 여자가 이별을 시도하려 했다는 걸 알고 남자가 주먹으로 여자의 얼굴을 때립니다. 실화인가요.
“네. 실화예요. 실제로도 그랬어요. 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거예요. 그 순간 느낀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어요. 이 정도로 나를 붙잡고 싶어하는구나, 하는 확인으로 읽혔어요. 이별로 가는 과정이 많았음에도 그걸 넘어서게 한 건 사실 김동리 선생이었어요. ‘사랑은 목숨 같은 거야. 목숨을 지키려는 의지를 가져야 해’라고 하셨지요.”

- 산티아고로 떠나기 직전 유언장을 쓰셨지요? 유언장에 재산의 일부를 ‘매맞는 여성을 위해 쓰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나요.
“전혀요. 맞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우리 선생님은 속이 연약해요. 두려움이 많은 분이었죠. 선생님이 ‘세월’이라는 시에 썼듯, 이 세상 삶을 시간적으로 흘려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선연하게 느끼신 때가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석양빛이 거실로 스며드는데 ‘나는 이 시간이 왜 이렇게도 무서울까’ 그러시더라고요. 선생님은 겉으로는 강하지만 속은 여리고, 오히려 저는 속이 남자죠. 굉장히 독해요.”

- 김동리 선생은 죽음을 무서워했나요.
“네. 선희라는 여자 아이가 있었어요. 늘 김동리 선생과 술래잡기를 하다가 잡혀줬지요. 그 아이가 어린 시절에 죽었어요. 그때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생긴 것 같아요.”
서영은 자화상.
서영은 자화상.
- 책 제목이 ‘꽃들은 어디로 갔나’입니다. 꽃의 상징은 뭔가요.
“이 작품을 사랑을 주제로 하겠다는 건 아니었어요. 인간과 인생의 깊이를 다루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 소설만큼은 시간이 필요했고 40여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어요. 산티아고를 다녀와서 순례기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를 썼고, 작년에 ‘돈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를 썼는데 그 두 작품이 이 책을 쓰는 과정이 된 것 같아요. 살아낸 사랑은 처음과 끝이 달라요. 시간이 흐르면서 인생이 주는 시련과 고난, 기타 아픈 것들이 스며들면서 끌어안지 않고는 더 이상 한 발도 나아가지 않는 것으로 바뀌지요. 꽃은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움의 절정이지만 식물에게 그 꽃은 상처의 한 모습이에요. 꽃으로 나타난 상처는 그것이 끝이 아니에요. 쓰러질 때 비애를 거쳐서 열매로 변환되고, 그 열매는 다시 씨앗으로 돌아가서 다시 꽃으로 순환돼요.”

- 이 작품이 김동리 선생과의 사랑을 다룬 마지막 사랑 이야기가 아닌가 봅니다.
“아니에요. 다 끝나지 않았어요. 마지막 휠체어 부분 있지요? 내내 3인칭으로 흐르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1인칭으로 바뀌어요. 그때부터 한 권의 책이 더 필요해요. 이번 책이 꽃에 대한 책이라면 다음 책은 ‘열매’에 대한 책이 될 것이고, 그 다음 책은 다시 ‘씨앗’으로 돌아가 썩을 밀알이 되는 과정을 담으려 해요. 눈이 너무 아파서 그때까지 글씨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눈이 버텨준다면 꽃을 통해 상징되는 삶을 구도의 시작과 끝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좀 전에 기자간담회를 마치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물어봐주지 않아서 서운하다”고 했는데, 요즘 일상은 어떤가요.
“(테이블 위 가득한 자료를 가리키며) 이 자료 보이죠? 작년에 돌아가신 임연심 선교사에 대한 자료예요. 이분이 자신의 이야기를 제가 써줬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어요. 임연심 선교사는 28년간 케냐의 오지에서 고아들을 위해 선교활동을 하신 분으로 ‘투르카나의 어머니’로 불리시죠. 기독교사에 길이 남을 혁명적인 발자취를 남긴 분이에요. 이분이 길러낸 고아가 70~80명에 이르는데 그중에는 교사, 금융인, 회계사, 정치인 등 리더급도 많아요. 저는 딱 두 번 만난 적이 있어요. 처음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을까’ 했죠. 취재를 할수록 이유를 알겠어요. 작년에 그분이 계시던 곳에 다녀왔어요. 케냐 나이로비에서 자동차를 타고 23시간 달려야 닿는 척박한 오지죠. 원시부족 간 전투도 잦은 위험지대예요. 그곳에 가서 20여명의 현지인을 인터뷰했어요. 이분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1월 한 달 동안 아침 금식을 했어요.”

- 나이도 많으신데 금식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요.
“어휴. 그것도 부족해요. 아침에 커피 마시고, 그림 그리고 그런 평범한 일상생활을 통해서는 이분이 겪은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신앙적인 발자취를 더듬어 가려면 이분이 겪은 신앙적 벼랑과 위기를 직접 알지 않고는 쓸 수 없어요. 접근의 기초죠.”

- 이번 소설은 문체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거리감도 생겼고, 탄탄해진 느낌입니다. 오랫동안 구도를 해왔는데, 자신의 의지로 감정과 충동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습니까.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이 기존의 삶에는 없구나’ 하는 게 너무나 분명해졌으니까요.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 문을 활짝 열어두고도 ‘찬바람이 들어오는구나, 사람들이 들여다보는구나’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아요. 자기 안에 결핍감이 없어지면서 집착 또한 없어졌어요. 물건이든 사람이든 감정이든.”

70대의 서영은은 나이듦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생머리 단발머리의 그에게서는 여전히 여인의 향기가 났다. 헤어지기 전 물었다.
“김동리 선생이 어디가 그렇게 좋았습니까?” 그는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에너지가 강했어요.”


김민희 기자 mini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