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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음을 기뻐하자(조선일보 4.27) - 권이복 신부

배남준 2016. 4. 27. 07:18

  

지난 세월의 나, 지금의 나는 존재 방법일 뿐, 전부는 아냐
이런 일 저런 일 겪고 살며 그렇게 영원을 살아가는 것
살아있음을 찬미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대

권이복 남원 도통동 성당 신부
권이복 남원 도통동 성당 신부

4년 전 이맘때! 얼었던 대지가 생명으로 들썩거릴 즈음, 나는 병원에 있었다. 40㎝가량 대장을 잘라냈는데 그 수술 자리가 협착돼 한 달 넘도록 한 모금 물도 마시지 못하고 젖은 거즈로 메말라 갈라진 입술만 축이며 연명하고 있었다. 당시 나의 유일한 소망은 물… 물 한 모금 넘겨보는 것이었다. 물… 제발 물 한 모금 마셔봤으면!

이른 새벽 시체처럼 흐느적거리며 창가에 서니 전날 내린 봄비로 대지는 온통 생명의 밭! 새순이 불뚝불뚝 솟아오른다. 저 흙! 생명의 흙! 흙 한번 밟고 싶다. 간호사에게 부탁했다. 딱 한 시간만 자유를 달라고, 대추나무 연 걸리듯 주렁주렁 걸려 있는 이 링거줄, 한 시간만 떼어 달라고…. 환자복 위에 두툼한 외투 걸치고 텃밭으로 나갔다. 아직은 싸늘한 초봄, 금방 갈아놓은 밭 모퉁이에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고 맨발이 되어 흙 위에 섰다. 생명의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신비로운 감촉, 참 황홀했다. 그때 그 감촉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른 아침 이글거리는 아침 햇살, 싱그러운 아침 공기, 그리고 내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열기…. 이 모두가 하나 되어 병들어 시들어가는 나를 어떤 미지의 세상으로 옮겨놓았다. 어디로부터 오는지 알 수 없는 기쁨이 병든 내 몸을 꽉 채운다. '살아있음' 그것만으로 행복하다. 모든 것이 다 고맙고 감사하다.

가끔 생각한다. 그때 나에게서 잘려나간 나의 일부, 40㎝의 대장,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직 남아있는 나의 육신은 장차 어찌 될런가? 때가 되면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O(산소)·H(수소)·C(탄소)·N(질소)…―나를 이루고 있는 물질들이 다 흩어져 제 갈 길로 가고 나면 나는 대체 어디에 어떻게 있을까? 나는 몇몇 물질의 조합에 의해 한순간 아른거렸던 신기루 같은 것인가. 64년 나의 삶, 지금의 나의 삶, 앞으로 살아야 할 나의 삶, 이 모두 비비 꼬인 단백질칩(DNA)의 재생에 불과하단 말인가.

[ESSAY] 기뻐하자, 살아있음을
/이철원 기자

알제리 사하라 사막의 고원 지대 악섹크램, 해발 2800m 산속 은둔소에 머문 지 보름여가 지났을 때, 더위와 추위에 떨며 미숫가루 한 잔, 바게트 한 쪽과 빗물 받아먹고 살며 끝없이 애원했다. "저 이제 그만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음성이 나를 부른다. "나와라!" 돌담 쌓아 만든 움막에서 기어나왔다. "누워라." 돌담 쌓아 만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나는 죽어갔다. 온몸이 굳어버렸다. 숨이 멎었다. 시신 염하는 소리, 그리고 땅을 파고 묻는 삽질 소리가 들린다. 죽은 내가 묻히는 광경을 나는 그냥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대로 나였다.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나는 그대로 나였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나의 체험들이 얼마나 사실인가!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저 그런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난 환각이나 환청이 아닌가? 인정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사실이냐 아니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련의 여정을 거쳐 깨닫게 된 진리! 믿고 확신할 수 있게 된 그 진리가 중요한 것이다. 그 진리란 '지난 64년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 또 앞으로 살아갈 나, 곧 죽어 사라질 나, 이 모든 것은 나의 존재 양태, 존재 방법일 뿐, 나의 본성, 나의 전부는 아니다'는 것이다. 내 고유의 삶, 나를 이루는 나라는 DNA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60조 세포의 생멸, 이에 따라 나타나는 나의 감각, 나의 감정, 나의 의지 등등은 '나'의 존재 양태요 존재 방법일 뿐 나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때에 따라 올챙이로 있을 수도 있고, 때에 따라 개구리로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때에 따라 얼음으로 있을 수도 있고 수증기로 있을 수도 있고 마시는 물로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지금 들에 산에 나가보라. 얼마나 찬란한지. 연초록 새잎이 얼마나 예쁘고 보드라운지. 단 하루, 아니 단 한 순간도 변하지 않는 생명은 없다. 그렇게 영원을 산다. 나도 그렇다. 이런 일 저런 일, 이 병 저 병 앓고 산다. 그렇게 그렇게 영원을 산다. 오 아름다워라! 오 행복하여라! 존재한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이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가끔 이 귀한 생명을 빼앗길 것만 같은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어찌 그리되겠는가. 이미 이 일은 내 일이 아닌데. 내 사랑하는 그님, 그님의 일일진대. 기뻐하고 찬미하라! 살아있음을!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되었음을!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